「시민운동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시민운동 진단3」 잘못된 시민운동 참여가 교회와 사회에 가져오는 폐해는 무엇인가
김재호
▲ 많은 사람이 민주화 투쟁의 성지처럼 떠받들었던 명동 성당의 모습
<출처: (CC-BY-SA) Exj (wikipedia)>
성스러운 일과 속된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서 ‘나 홀로 경건함’을 추구하는 잘못된 수도원 신앙을 낳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과 ‘이 세상에 속한 일’을 구분하지 않은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려 버린다. 왜냐하면 ‘심판받아 멸망할 이 세상에서의 경건함’이 아닌, ‘이 세상 자체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누룩이 ‘사회 참여’라는 미끼를 통해 어떻게 한국 교회와 사회를 파괴해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자유주의 신학, 하나님 말씀 안에 있기를 거부하는 가짜 신학(철학)
자유주의 신학은 너무도 다양해서 그 가르침을 한두 가지로 종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가르침이 한목소리를 내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성경에 관한 부분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자유로운 사고’에 기초한 신학 체계이기 때문에, 그 ‘자유로운 사고’를 온전히 성경의 가르침 아래 놓는 일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에는 오류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명제적인 방식(A는 B이다)으로 기술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거부하면서 자기 신학을 전개한다. 그런 ‘거부’를 통해 자기 생각(철학)을 신학 체계 안에 끼워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게 확보한 공간 안으로 자기 생각(철학)을 밀어 넣고, 그것을 발판 삼아 ‘자유로운 사고’의 활동 반경을 점점 넓혀간다. 그러다가 성경을 사실상 용도 폐기(성경은 일반 종교 문서 가운데 하나)하는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런 사실은 실제 역사를 통해 이미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상 체계를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적 토대가 신학이라는 사실을 거부했다.
그와 함께, 신학은 영적인 세계라는 상층부를, 철학은 자연 세계라는 하층부를 이해하는 별개의 도구라는 이론을 정립했다.1 비록, 이원론(二元論)의 틀을 따라 철학의 자율적인 활동 영역을 자연 세계로 제한하기는 했지만, 그 일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인 ‘자유로운 사고’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준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영역을 할당받은 자율 철학은 아퀴나스를 배신했다. 이원론을 역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초자연적으로 관여하는 일은 그분의 완벽함을 손상하는 것’이라는 이신론(理神論)을 개발해낸 것이었다.
자율 철학은 그렇게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하고, 그분을 천상 세계에 영원히 ‘감금’하려고 했다. 이러한 철학의 반란 앞에서 신학은 무기력했다. 철학의 자율성을 보장해달라는 말은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증표를 보여달라고 했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에 자율성을 보장해준 신학은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신론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빠르게 잊어버렸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무신론이 주류인 이상한(?) 세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경은 수많은 종교 문서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었다. 그 안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과 에덴동산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설화(說話)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도 장차 실제로 임할 나라를 의미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힘을 모아 이룩해가야 할 이상향(理想鄕)’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었다. 쉽게 말해, 철학은 천국과 지옥, 영원한 심판과 부활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추방’해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은,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과 ‘영원한 심판’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을 어리석게 여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힘으로 ‘지상낙원’을 이룩하려는 헛된 소망을 품는다.
쉽게 말해, 그들은 성도가 아니라 혁명가나 사회 운동가로 다시 태어난다. 그들의 입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구속주 예수’가 아닌, ‘억압과 착취에서 민중을 구원하는 혁명가 예수’가 나오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기브온 족속과 동맹을 맺었다가, 이스라엘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가시와 올가미를 그 옆구리에 놓고 말았다(수 9:14; 삿 2:2, 3). 그와 같이, 철학도 신학의 토대를 서서히 허물어뜨린 다음에, 성경과 복음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리고 말았다.
2.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만든 암 덩어리
이런 자유주의 신학이 개발해낸 교회의 사회 참여 이론이 바로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이다. 민중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 체계를 구축하는 토대를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 언약’에 두지 않고, ‘억압받는 민중’에 둔다.2
다시 말해, 민중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닌, ‘민중이 지배세력의 억압을 떨쳐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주체도 교회가 아닌 ‘민중’이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민중 신학은 원래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것을 강조하며 출발했지만, 80년대부터는 단순한 저항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민중 신학은 점차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길로 나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를 검토하여 수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기독교적 마르크스주의가 바로 ‘성육신 신학’이다.
민중 신학의 이 ‘성육신 신학’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셨다.’라는 성육신 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이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해체하여 세상과 하나 된 사건’을 뜻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기존의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해체하여 억압받는 민중과 하나 되고, 민중 혁명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해서 그 일을 이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참 의미라고 하면서 말이다.3
이러한 민중 신학의 가르침은 향린 교회와 같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측)에 속한 진보 개신교회 안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소속된 수많은 교인과 목사들은, 민중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를 이루기 위해 ‘반(反)독재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 군부 정권이 사라지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민중 신학은 아주 다양한 사회 구원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다원화되었다.
오늘날, 민중 신학은 교회와 세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다.4 경제 정의, 환경, 인권, 노동, 동성애 합법화, 통일, 여성 해방, 언론 자유, 교육 개혁 운동을 비롯하여, 교회 세습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민중 신학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다. 누군가는 이 말을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본인이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실제 사례도 있다. 이 사례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용산 참사’ 사건이다. 민중 신학은 이 사고가 일어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동산 개발자와 세입자 사이의 ‘경제 정의 실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폭력 시위를 합리화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민중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 본인과 가까운 한 사람은 망루에 시너 같은 휘발성 물질을 공급하면서 폭력 시위를 주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이 사고로 생명을 잃지는 않았으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자,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많이 충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이 민중 신학에 근거하여 벌인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강하게 항변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당시 이명박 정부의 시위 진압이 부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 신학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우리 사회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문제를 ‘계급 투쟁’의 틀로 바라보게 하면서, 민중의 편에 서지 않는 모든 세력을 불의한 억압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을 쳐부수어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를 이룩하라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선동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절대로 ‘재벌’과 ‘산업화 세력’의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실상 ‘애굽의 우상’이고 ‘맘몬’이라는 사상을 계속 주입하고 있다.
민중 신학이 진보 개신교회의 사회 참여 이론이었다면, 해방 신학은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 이론이었다. 해방 신학을 가리켜 ‘남미의 민중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민중 신학이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수용할 때 참고했던 선례가 바로 해방 신학이었다.5
이 해방 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원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겉모습을 바꾼 것을 계기로 탄생한 신학이다.6 그래서 기존의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목적을 ‘모든 죄, 곧 가난이나 질병 등에서도 해방되는 것’까지 확대하여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교회가 사람을 가난과 결핍으로 몰아가는 악한 정치, 사회 구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며, 그 일도 교회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7
해방 신학은 얼핏 보면 자유시장경제 체제도, 공산주의 체제도 지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항상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기존 사회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태생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80년대 후반이 되자 그 사실이 명백해졌다. 결국, 교황청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서 해방 신학에 공식적으로 퇴짜를 놓았다.8 하지만 그때는 이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같은 단체가 결성되어 ‘군부, 개발 독재 타도’라는 명분을 앞세워 엄청난 사회 활동을 한 다음이었다.
실제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구티에레스의 『해방 신학』을 번역해 출간하는 것을 허락하고, 성당으로 피신한 민주화 투사들을 보호해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면서 군부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9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명동 성당은 한국 민주화 투쟁 역사의 ‘성지(聖地)’이자 산 증인처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교황청이 해방 신학에 두 차례에 걸쳐서 퇴짜를 놓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천주교 안에서도 해방 신학을 대하는 기류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말년에는 굵직굵직한 사회 쟁점에 대해 노무현 정부의 입장과 정반대되는 발언과 행보를 보여서 진보 진영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그런데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계속 좌경화하는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달라진 현대 사회의 기호(다원주의)에 맞추어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여전히 현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무력화한다면, 교회 전체가 좌경화하는 흐름도 멈춰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계속 좌경화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진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는 박정희-신군부 세력을 ‘군부, 개발 독재 세력’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의 이름으로 이들의 정치 생명을 끊어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나라가 북한이라는 더 심각한 독재와 불의로 무장한 세력과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라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이, 군부 세력이 사라지자 공산 이념을 따라 학생 운동을 주도하며 반(反)정부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민주화 투사’라는 훈장을 달고 사회 전면을 주도하는 계층이 되었다.11
군부 세력과 직접 맞섰던 민주화 투쟁 1세대들은, 후대 운동권 인사들이 지나치게 친북 성향을 보이자 뒤늦게 그들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12 그러나 그런 때늦은 시도가 무슨 실효성이 있겠는가? 되려, 그들은 민주화 1세대가 나이 먹은 사람들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맞받았다.
아마도 1세대 인사들은 민주화를 이룩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이뤄낸 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여기는 이들을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가게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쓸모 있는 바보’가 바로 그들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3. 민주화 철학, 한국 교회와 신학교 전체를 병들게 하고 무너뜨린 암 덩어리
신학이 철학에 제한된 영역만 허용하자, 철학은 그 사실을 역이용하여 신학을 용도 폐기해버렸다. 그와 같이, 신학이 철학과 사실상 동등한 입장에서 공평한 상호 교류를 약속하자, 철학은 이번에도 그 사실을 역이용하여 신학을 용도 폐기해버리는 일을 벌였다.
이전에는 고립시켜 말라 죽게 했다면, 이번에는 점령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철학에 점령당한 교회와 신학교에서는 성경과 신학이 특정한 사회 이념을 뒷받침해주는 ‘얼굴마담’ 노릇을 한다. 거기에 넘어간 교인과 신학생은 성도와 목회자가 아닌, 혁명가나 기업가로 길러진다.
예를 들면, 철학에 점령당한 신학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천국을 향해 나아간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과 착취에 맞서 참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구속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환경, 노동 운동 등에 뛰어들고 반정부 투쟁에 목숨을 걸게 된다.
또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도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여러 가지 광고 기법과 조직 경영술을 활용하여 사람들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일을 통해서도 그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목표로 삼은 계층의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끌어모은 뒤, 제자 훈련과 같은 ‘양육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로 만들어 가라고 가르친다. ‘주님의 제자는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그럴싸한 말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이처럼, 철학의 전술에 넘어간 교회와 신학교는 한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 영생을 얻는 일을 점점 ‘절대적인 사명’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그런 일은 교회와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나아가, 그 일에 전심전력하는 교회와 신학교를 ‘신학이 빈곤하고 유치하며, 편협하고 수구적인 곳’이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굳게 붙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회가 이와 같이 철학에 점령된 가짜 신학의 영향을 받아, 너무도 성급하게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가 민주화 투쟁기와 ‘전환기’인 노태우 정부를 거치면서, 그 가짜 신학 이론을 토대로 교회와 신학교를 바라보고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교회라고 하면 대부분 ‘복음 전도, 영혼 구령, 성경 교육’에 힘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부터는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 정신적 빈곤 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힘쓰는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적이라는 교회와 신학교조차 그런 사회의 인식에 손발을 맞추는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90년대가 되자, 교회와 신학교는 보수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문화 사역’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바자회, 열린 음악회, 헬스클럽, 인문학 교양 강좌, 카페 교회 등을 운영하면서 ‘교회의 품격’을 높이는 데 힘썼다. 그런 일이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가짜 신학(철학)’의 전제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일인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교회와 신학교가 ‘민주화 철학’에 잠식되는 일이 30년 가까이 계속되자, 정통 교리와 신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허수아비’처럼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수많은 교인과 목사가 어떻게든 사람을 결단하게 하여 예배당에 앉혀 놓은 뒤 ‘제자 훈련’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복음 전도라고 착각하는 일이 매우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공연 형태의 ‘찬양 집회’에 참석하여 기분이 한껏 들뜬 것을 예배 중에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거나, ‘좋은 말씀’을 듣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는 이가 부지기수인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조금만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면서, 그 현상이 나타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자’(?)라고 ‘선포’(?)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와 신학교 안에서 정통 교리가 사라져 버리자, 교인과 신학생들은 수많은 이념과 사상을 분별하고 평가할 올바른 잣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농민, 피고용인,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면, ‘참 깨어 있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자기 자원을 잘 활용하여 남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이들을 시기하지 말고, 그들의 재산권을 존중해주는 게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하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난다. 대번에 ‘거룩한 교회 안에서 정치 선동이나 하는 타락한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욕을 먹게 된다.
원래, ‘하나님의 정의’는 민중, 약자, 권력자, 부자 가운데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공평한 개념이다(출 23:2, 3). 그러나 ‘민주화 철학’이 교회와 신학교를 점령한 뒤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정의’는 철저하게 민중과 약자 편만 들어야 하고, 권력자나 부자 편은 절대로 들면 안 된다. ‘민주화 철학’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 모든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이처럼, ‘민주화 철학’은 교회와 신학교를 거의 파탄 내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믿고 섬기는 대상은 대부분 ‘사람의 지혜’라는 우상이다. 이런 우상을 교회 안에서 몰아내자고 하면 ‘타락한 권력의 하수인’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이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가 결국 둘 다 구렁텅이에 빠져 멸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4. 마무리하며
자율적인 활동 영역을 보장받은 철학은 반드시 정통 신학과 교리를 무너뜨리는 일을 감행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검을 손에 들고서, 교만하고 방자한 철학의 거짓말을 남김없이 쳐서 무너뜨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후 10:3~5). 특히, 신학으로 위장한 철학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 민낯을 만방에 밝히 드러내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마귀가 점령한 붉은 전사 양성소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는 혁명가로 성장해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취하는 이들이 되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면, 교회 안으로 침투한 그 거짓말들과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한다(롬 13:1, 2).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이 싸움을 감당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이다.
각주
1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김영재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5, pp. 13~17.
2 한영제 발행, 『기독교 대백과사전 18권』, 기독교문사, 1996, pp. 320, 321.
3 같은 책, p. 322.
4 같은 책, p. 323.
5 같은 책, p. 322.
6 같은 책, p. 322.
7 한영제 발행, 『기독교 대백과사전 16권』, 기독교문사, 1995, pp. 247, 248.
8 가스펠서브, 『교회 용어 사전: 교리 및 신앙』, 생명의말씀사, 2013, 네이버 지식백과
9 https://ko.wikipedia.org/wiki/김수환(5, 6공 시절)
https://namu.wiki/w/해방신학(아시아에 끼친 영향)
10 https://ko.wikipedia.org/wiki/김수환(2000년대 이후의 활동, 야당 및 진보 진영과의 갈등, 반미주의에 대한 비판, 친일 청산 문제 관련 논란)
11 김철홍, 「[김철홍의 좌파 탈출기]-대통령 탄핵 대한민국은 이미 내전상태: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의 위기… 87년 민주화 세력 인민민주주의 꿈꿔」, 미디어펜, 2017. 2. 22.
이동호, 「나는 왜 좌파 사상을 버렸나?」, 자유경제원, 2016.10.27.
12 https://ko.wikipedia.org/wiki/강원용(생애 후반)
https://ko.wikipedia.org/wiki/문익환(범민련 재편 노력과 사망)
https://ko.wikipedia.org/wiki/김수환(반미주의에 대한 비판, 평가와 비판)
「시민운동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시민운동 진단3」 잘못된 시민운동 참여가 교회와 사회에 가져오는 폐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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