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헌금 분별하기
– 올바른 헌금이란 무엇인가
박지훈
지난 1월, ‘정의(井義) 헌금’이라는 다소 생소한 헌금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일이 있었다. 서울 도봉구의 모 교회에서 시행한 이 헌금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솟아나는 우물’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 교회에서는 매월 셋째 주일에 헌금을 내지 않는 대신, 교인들이 구제나 선교 등의 일에 자율적으로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교계(敎界)의 진보 진영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헌금을 참신한 헌금 개혁 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한국 교회에 헌금과 관련한 오류가 넓고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의 헌금’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헌금이 나타난 것도, 그러한 오류가 낳은 반향(反響)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오류에 대항하려다가 더 심각한 오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형태의 헌금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헌금을 각 성도가 그리스도의 중보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런 예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올려드리지도 않은 채, 신자의 개인적인 봉사와 헌신에 사용한 뒤 하나님께 드린 것과 같다고 여기는 발상은 사실상 바리새인의 ‘고르반’ 교리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막 7:11).
또한, 이러한 생각은 사람의 지혜와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히 여기는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을 힘입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헌금 행태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사회 참여·봉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다루는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가 분명하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을 숭배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오래전부터 교회의 부패와 부조리를 비판하며 교회 안으로 파고들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마귀는 오늘도 기존 교회의 오류와 부패에 질린 이들을 사로잡아 자기를 숭배하는, 배나 더 지옥에 가까운 자로 만들려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끼어 갈 곳을 잃어버린 가련한 주님의 양들은 이리저리 방황하며 고생하고 있다.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거나 번거롭다는 이유로 잘못된 방식을 계속 끌어안고 가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무엇이 올바른지 거짓인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하려는 것도 참된 성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성도라면 그럴수록 더욱 진리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시행 중인 잘못된 헌금의 폐해
먼저,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시행 중인 잘못된 헌금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회를 운영하려면 당연히 물질이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헌금으로 그 필요를 채워가게 하셨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기독교계 전반에 외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신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헌금을 강요하는 행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시행 중인 각종 절기 헌금, 특정한 제목이 붙은 감사 헌금, 특별 헌금 등에는 사실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골 2:16).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헌금은 오직 십일조, 자발적인 감사 헌금, 주정 헌금뿐이다(마 23:23; 고후 9:7; 고후 16:2).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헌금이 유행하며 교회 구석구석을 파고들더니, 이제는 심지어 구약 의식 제도를 빌린 일천번제나 월삭 헌금과 같은 새로운 헌금도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헌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영원한 제사를 무시하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목회자를 청빙하거나 직분을 맡기면서, 일정 액수의 감사 헌금을 내게 하는 잘못된 관행도 여전한 상태이다.
사실 교회가 외적인 성장이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본연의 영적인 사역에 집중한다면, 십일조, 자발적인 감사 헌금, 주정 헌금 외에 다른 헌금을 들여올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만으로도 교회가 자기 사역을 감당하는 데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외적 성장이나 사회 지위 향상에 눈을 돌리는 순간, 온갖 종류의 헌금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헌금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참된 예물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종교 사업을 번창하게 하는 주 수입원에 더 가깝다. 즉, 성경적인 헌금 원리를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헌금의 부패가 신학의 변질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개혁신학을 굳게 고수하면, 교회가 외적 번영과 성장을 좇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교회 초기에는 비교적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상당히 깨끗한 헌금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순절 은사주의와 번영 신학 등의 세속적인 신학이 힘을 얻으면서부터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그런 신학은 타락한 사람의 육적 본성과 잘 들어맞아서 외적 번영에 큰 중요성과 의의를 부여하게 한다. 이런 신학에 물든 목회자는 어떻게든 교회 규모를 더 크게 하려는 행동을 ‘구령(救靈)의 열정’으로 합리화하지만, 실제로 그들 마음속에 가득한 것은 자기 성공을 향한 열망이다.
또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영원한 천국이 아닌 물질적인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는 소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한마음이 되어, 많은 헌금이 큰 물질적 축복을 받는 통로라는 헛된 가르침을 열심히 가르치고 실천하기에 열심을 내고 있다(딤후 4:3, 4).
그러나 헌금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거나 부유함, 또는 사회적 지위 향상을 얻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다(행 4:33~37; 5:1~11). 그런 악한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 정신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대안 헌금의 오류와 폐해
이처럼 기존 헌금 생활이 계속 타락함에 따라, 그에 대한 반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대안 헌금을 제시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이들은 기존의 잘못된 헌금 행태에 대한 사람들의 염증을 잘 알고 있으므로,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또한, 교회가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글머리에서 언급한 ‘정의 헌금’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십일조 폐지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세속적인 헌금 행태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런 문제점을 개혁하는 방법이 비성경적이라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안 좋아지게 할 뿐이다. 기존의 문제는 각종 비성경적인 헌금을 모두 폐지하고, 성경에서 지지하는 주정 헌금과 십일조, 그리고 자발적인 감사 헌금만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성경 말씀은 헌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쥐어짜고 물질적인 축복을 추구하는 그릇된 행태를 조장하지 않게 경계하는 가운데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을 즐겨내도록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십일조 폐지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아서 핵심만 간단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십일조는 구약의 의식 규례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이 예수님께 속해 있음을 표현하던 고유한 방식이다(창 14:18~20; 히 7:2). 우리나 아브라함이나 똑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님의 지체이므로, 예수님께 올려드릴 십 분의 일을 믿음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헌금은 지극히 올바른 것이다.
이런 일은 신약 교회가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지만,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주의 날을 따로 구별하여 온 교회가 함께 예배의 날로 지키는 것과 같다(계 1:10). 그와 같이 십 분의 일을 거두어 ‘레위 제사장’에게 주는 십일조의 유대적이고 의식적인 외적 규례는 참으로 폐지되었으나,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께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구속사적인 맥락 안에서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공통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대안 헌금은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헌금에 담겨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뜻과 계획을 볼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따로 구별하지도 않고 그냥 개인적인 봉사에 사용하는 ‘정의 헌금’과 같은 대안 헌금은 사람들에게 기존 폐해에서 벗어났다는 정신적인 해방감을 안겨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다윗의 기쁨(삼하 6:12~15)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의 지혜와 생각을 따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까지도 얼마든지 바꾸고 폐지할 수 있다는 극도의 오만함과 교만함을 가르쳐줄 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위 ‘진보적 주장’ 밑바탕에는 항상 지극히 해로운 자유주의 신학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민중 신학, 해방 신학, 여성 신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은 번영 신학만큼이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한 인간 중심적 사상이다. 인본주의에 기독교 색깔을 살짝 덧입힌 이러한 신학은 교회가 영혼 구원이라는 본연의 사역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고, 고작 이 땅의 문제(정치, 철학, 인권 등)에나 집착하는 사회운동 단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최악의 영적 재앙을 가져온다. 진주 장수는 기꺼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진주(하나님 나라)를 얻으려고 했지만, 이들은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팔아 다시 이 세상을 얻으려 하고 있다(마 13:45, 46).
올바른 헌금 생활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시행 중인 헌금과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대안 헌금은 서로 대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양쪽 모두 성경을 이탈한 잘못된 신학과 사상으로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올바른 헌금 개념을 정립해야만 한다.
– 헌금의 기본 원리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이므로, 삶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한다. 따라서 헌금은 단순히 물질만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獻身)한다는 의미로 드리는 것이므로, 참된 헌금은 오직 거듭난 성도만 드릴 수 있는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릴 수 없는 ‘흠이 있는 제물’이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적용되며,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이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러므로 헌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속하시는 영광이 드러난다.
이처럼 헌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과 관련되어 있으며, 자신이 그 안에 온전히 은혜로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헌금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금할 때 하나님 앞에 고백한 대로, 주어진 모든 것(시간, 물질 등)을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또한, 헌금은 결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는 항상 공예배 중에 헌금을 올려드림으로써 이를 분명히 했다. 헌금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온전히 자신을 주께 드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수행하겠다는 공적인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온 회중이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헌금을 통해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의미만 지닌 헌금이란 있을 수 없으며, 헌금은 항상 공예배 중에 공적인 의미를 담아서 드려야 한다.
– 어떻게 헌금할 것인가
신약 성경에는 헌금과 관련한 몇 가지 지침이 나와 있다. 먼저 헌금은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 이 말은 각자 형편에 따라 해야 한다는 뜻이며(레 5:7),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음에서 귀하게 여기는 만큼 내야 한다는 의미이다(눅 7:46, 47).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에 담겨 있는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과부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셨다(눅 21:4). 또한 헌금은 아까워하거나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닌, 즐겨 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전에 급히 마련하여 드리지 말고, 주일이 되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두는 편이 좋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므로 헌금의 많고 적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자신에게 가능한 분량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는 얼마를 헌금하든지 간에 항상 부족함을 느낄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려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헌금은 그런 마음과 생각으로 드리는 것이며, 나머지 시간과 물질도 그런 태도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 헌금 생활을 하는 성도는 많이 헌금했다고 해서 어깨에 힘주며 으쓱거리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들지 않을 것이다.
글을 맺으며
오늘날 유행하는 수많은 거짓 주장과 미혹, 그리고 성도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올바른 헌금 생활을 해나가기가 정말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헌금은 성도가 잘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헌금의 참된 의미를 잘 이해하고 평생 올바른 헌금 생활을 해나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성도는 시간이 갈수록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그 뜻을 온전히 따르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또한 그런 성도가 많은 교회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갈 것이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각주
1 헌금의 기본 원리는 「헌상(헌금)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이승구 박사, 지팡이교회에서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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