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복음 진단2」 현대 교회 안에서 번성하는 거짓 복음들
김재호
▲ WCC 부산 대회 개회를 선언하는 김삼환 씨의 모습
(사진 출처: WCC 10차 총회 홈페이지)
현대 교인들은 사영리(四靈理), 영접 기도, 강단 초청, 전도 폭발과 같은 실용주의 전도 프로그램과 관상, 침묵, 향심 기도 같은 영성주의 신앙에 친숙하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그런 일을 통해 교인이 늘었다거나 누군가 감동받아 조금 더 착해지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이 돌면, 입을 모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며 좋아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본래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면, 그들은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느낀다. 심지어, 속으로 사탄이 광명(光明)의 천사로 위장해서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결국, 자기의 타락한 정서를 포근하게 어루만져준 거짓 복음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2:22). 이처럼, 거짓 복음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목을 조이는 무서운 덫과 같다.
1. 현대 교회 안에서 번성하는 거짓 복음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참 복음의 핵심이듯, ‘교묘한’ 자기 신뢰가 거짓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보다 자기의 지혜, 힘, 체험, 선택, 공로 등을 ‘더’ 믿고 의뢰하게 하는 가르침이 바로 거짓 복음이다.
거짓 복음에는 복음의 본래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거짓 복음에는 복음의 본래 내용이 꼭 들어간다. 단지, 복음을 무력화하고 껍데기만 남게 만드는 ‘다른 가르침’을 덧붙이거나, 가장 중요한 내용 하나를 뺄 뿐이다.
실제로, 거짓 복음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꼭 다른 가르침을 덧붙여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롬 11:6).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분명하게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성당을 찾아가서 은혜와 믿음에 대해 사제와 이야기해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고 친절하며 따뜻함이 넘쳐나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화가 끝날 무렵에 ‘오직’이라는 두 글자를 은혜와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서 대화해보라.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표독하고 불친절하며 냉정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주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모든 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Monergism)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공로가 서로 힘을 합하는 협력 사역(Synergism)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항상 자기 공로가 부족하지는 않나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이 땅에서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다(요 3:14). 구원을 위해 쌓아야 하는 공로와 선행이 머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코앞에 예수님을 두고서도, 땅만 바라보며 도무지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러다 결국 테레사 수녀처럼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칭의(稱義)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행위를 구원받는 근거에 포함시키는 바울의 새 관점이나 유보적 칭의론 같은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각자 행한 바를 조사하여 그에 따라 심판하고 계신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조사심판교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상들은 자기 선행과 공로라는 옛 흑암, 즉 율법주의(nomism) 속으로 또다시 사람을 밀어 넣는다.
성당에서 거짓 복음이 무엇인지 맛을 보았다면, 다음으로 ‘구원파’라고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를 찾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성당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거듭남, 하나님의 은혜, 오직 믿음 등을 강조하면서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한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에, 거듭남과 믿음은 ‘깨달음’이라는 내적 자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한번 꺼내보라. 그러면 상황이 갑자기 확 바뀔 것이다. ‘아, 피상적이고 죽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구나.’ 하는 따가운 시선이 여러분의 얼굴에 마구 내리꽂힐 것이다. 그와 함께, “영적인 생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꼭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듭난 신자가 자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라는 자기 모순적인 궤변을 듣게 될 것이다.
거듭남은 성령님의 단독 역사(役事)이자 완전히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여러분 중에 영적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정말로 그렇게 살면,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를 임의로 부는 바람에 비유하셨다(요 3:8). 즉,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거의 모든 이들이 성령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자기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영혼은 말 못 하는 아이가 본성적으로 자기 부모를 찾듯,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쉼 없이 찾게 된다. 심령이 죄로 상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참으로 안식하게 된다. 또한, 그 구원의 은혜를 따라서 삶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해간다. 우리는 그러한 열매를 보고, 성령님께서 참으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구원파는 복음에 ‘깨달음’, 곧 내적 자각과 체험을 필수 조건처럼 덧붙인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고, 그분 안에서 참 은혜를 누리는 일을 훼방한다. 나아가, 내적 체험과 자각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공로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무저갱으로 사람을 인도한다. 그 길의 끝에는, 깨달음의 순간만 바라보면서 온갖 죄와 불신앙을 합리화하는 율법폐기주의(antinomism)라는 아볼루온이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체험, 환상, 계시, 방언, 기적, 물질 축복, 예언 등을 필연적인 결과나 조건처럼 가르치는 사상은, 본질적으로 구원파의 거짓 복음과 다르지 않다. 참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한 복음이다.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다 거짓 복음이다.
성당과 구원파를 통해 거짓 복음의 양면을 살펴보았다면, 그다음으로 향린 교회에 가보기를 바란다. 그곳에 가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강 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이다. 복음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溫情)의 손길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면, 그들과 참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복음의 부수적인 열매이지 복음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면, 그들의 안색이 확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이 세상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불로 심판 받아 없어질 것이니 세상을 완전하게 하기보다는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모든 어려움을 인내해야 한다는 말까지 꺼낸다면, 그들의 눈이 완전히 뒤집힐 것이다. “기득권층에 빌붙어 억압과 착취를 합리화하는 악마 같은 제국주의자 새끼”라는 말과 함께 거친 몸싸움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복음이란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닌, 이 세상을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죄로 죽은 영혼을 구원하기에 좋은 소식이지, 이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서 좋은 소식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 우리의 윤리, 도덕 의식, 활동의 모범이 되려고 오시지 않았다. 더욱이, 복음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대속, 부활, 재림을 역사적인 실재로 증거한다. 바울의 말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고전 15:17~19). 그러므로 이러한 일의 역사성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완전한 자기모순이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사회 활동과 인문학 강좌 운영 같은 문화 활동과 밥 퍼주기 같은 봉사 활동이 성경과 신학 연구보다도 더 환영받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환영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크게 진노하시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돈 상자를 뒤엎으신다. 그런 것들을 다 내쫓으신 뒤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엄숙히 선포하신다(막 11:17).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이 결국 복음의 본질을 하찮게 여기고 부인하게 하리라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의 부수적인 열매를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보다 더 중요시하게 하는 가르침을 멀리해야 한다. 그 길의 끝에는, 예수님의 재림이란 이 세상을 천국처럼 좋게 만들라는 은유이지 실제 사건은 아니라고 하는 거짓 복음이 입을 크게 벌리고 미혹된 영혼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곳을 둘러 보았다면, 마지막으로 명성 교회에 가보기를 바란다. 그곳에 가면, 지금껏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두루 섭렵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예수, 거듭남, 봉사 활동, 예수 부활과 재림의 실재성 등 그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즐거운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Ecumenism)이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결국에는 복음을 파괴하게 된다고 말하면 상황이 급변할 것이다. 나아가, 교회 연합 운동은 종교다원주의와 공산주의의 숙주 노릇을 해서 교회를 파괴하는 암 덩이가 된다고 하면, 광신적인 근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받게 될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어야 하니 지혜롭게 행동하자고 타이르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교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중에 끝이 좋은 사람을 별로 못 봤다고 하면서 생각을 빨리 바꾸라는 충고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연합과 일치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를 우선하지 않는 연합과 일치는 세속 친목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사도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유대교에서 나왔고, 종교개혁자들도 천주교에서 돌아섰다.
만약, 교리보다 연합과 일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옳다면, 개신교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옳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독교 자체도 빨리 유대교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심지어 유대교도 아브라함이 강 건너에서 섬기던 바빌론 종교로 돌아가야 하고, 바빌론 종교도 세계 종교와 연합하며 일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연합과 일치든 교리를 우선하지 않는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WCC나 NCCK 등이 주관하는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가 많다. 이들은 복음에 등을 돌린 교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교회에서는 논쟁을 일으킬 만한 진리는 점점 사라지고, 모두가 좋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위로와 격려만 남게 된다.
미사에 참여하는 천주교인과 개신교 예배에 나오는 성도가 똑같은 종류의 칭송을 받는다. 아무리 열심히 미사를 드려도 복음과는 상관없는 이방 종교 생활을 했다는 말을 누구도 할 수 없게 된다. 적은 누룩은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교회 전체를 한입에 집어삼킨다(갈 5:9, 10). 또한, 그 안에 아무것도 모르고 남아있는 영혼들은 복음을 아는 지식이 없어 함께 멸망하고 만다(호 4:6).
2. 마무리하며
참 성도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계속 머물지 못한다.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계속 밖으로 몰아내시기 때문이다(계 18:4). 하나님께서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여 멸하신다(계 2:9).
그러므로 그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속히 거기서 나오라.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물건을 가지러 돌아가지도 말라(마 24:15~18).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귀를 틀어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외치며 나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복음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복음 진단2」 현대 교회 안에서 번성하는 거짓 복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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