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예배 진단2」 현대 교회의 잘못된 예배와 그 해악들
김재호
▲ 2005년에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플래닛 쉐이커스(Planet shakers)의 집회 모습
출처: (CC-BY-SA 3.0) SimonEast, wikipedia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섬기는 대상을 닮아간다. 우상을 섬기면, 그 우상처럼 어리석고 미련해진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황소처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신 9:13). 반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면, 그 사람은 점점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지혜로워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같은 인물이 거룩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모습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르게 섬기는가 하는 문제는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와 연결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잘못된 예배는 한 영혼을 완전한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를 섬기다가 거짓되고 더러운 마귀의 모습을 판박이처럼 닮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예배가 무엇인지 잘 알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예배가 드려지는 자리에서 속히 돌아서서 생명을 보전해야 한다.
1. 잘못된 예배란 무엇인가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인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며, 그들은 참된 감사와 기쁨으로 그것들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추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이나 외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단에서 피운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하여 분향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나온다(민 3:4). 또한, 신약 성경에는 주님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아서 많은 교인들이 질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은 사건도 나온다(고전 11:18~3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배만 기뻐 받으시고, 그렇지 않은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그분의 영광스러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과 나란히 서서 함께 영광 받기를 거부하신다. 이방 신들은 신자들이 ‘물량 공세’로 나오면 어떤 것도 다 용납하고 받아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정해주신 대로 드리는 예배만 열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영과 진리를 따라 오직 그분만 믿고 바라보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가 외적으로 어떤 일을 했든지 간에 그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요 4:24). 그가 아무리 헌금을 많이 냈어도, 성가대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어 찬송을 불렀어도, 예배 진행을 아무리 잘 도왔어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불쾌해하고 역겨워하신다. 그분의 눈앞에서 그 모든 역겨운 것을 치워 그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자를 찾으신다(사 1:11~1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짓된 예배가 사람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마 23:15). 그런 예배는 겉만 하얗게 칠한 무덤처럼 위선적인 사람만 만들어낼 뿐이다(마 23:2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기준을 조금도 낮추지 않으신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그분의 무한한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 속으로 우리를 끌어 올려 주신다. 그때, 우리는 옛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영광스럽게 보이는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면서 즐거워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예배가 아닌 예배는 모두 잘못된 예배이다. 모두 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는 항상 겸손하게 그분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지극히 미천하고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 현대 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예배의 모습
현대 교회 중에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정말로 찾아보기 어렵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원래 사제 중심의 의식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 집단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을 고수한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회조차도 치우쳐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먼저, 목회자들부터 그런 일을 행한다. 근래에는 성경 말씀의 본래 뜻을 풀어 강론하고 선포하는 성경적 설교를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신변잡기식의 만담(漫談), 심리적 위로와 만족, 처세술, 자기 자랑, 심성 함양, 연예·오락, 연극·영화, 세속 철학, 내적 성찰 등이 설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모 교회 강단에서는 ‘님의 침묵’이라는 설교가 행해졌고, 그 교회 담임 목회자는 개인 소셜 미디어 공간에 ‘투혼’이라는 칼럼을 게재하는 일이 있었다. 이 설교와 칼럼은 성도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타락한 설교와 칼럼의 전형(典型)이니, 한 번쯤은 듣고 읽으며 연구해 보기를 바란다.
이 설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핵심 내용이 성경의 진정한 본래 가르침이 아닌 세속적인 처세술이라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사역 현장에서 물러나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신 일을, 성공해서 사람들이 환호할 때 그 자리에서 물러나 침묵해야 하는 지혜를 가르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설교는 본질적으로 설교가 아닌 사람의 일반적인 지혜에 대해 말하는 인문학 강좌이다.
더구나, 이 설교에서는 물러나 조용히 있는 ‘침묵’을 리처드 포스터의 신비주의 관상 기도 개념과 연결해서 설명하기까지 한다. 또한, 담임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손뼉도 치고, 담임 목사님이 성대 결절 수술을 받아 예수님처럼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셨다는 어처구니없는 적용도 나온다.
그 결과, 이 설교는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우리 목사님’이라는 공개적인 칭송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정말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설교 시간에 이러한 엉터리 인문학 강좌를 늘어놓은 부목사를 불러서 호되게 꾸짖고 징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설교를 듣고 감동한 담임 목사는 하모니카를 불어 한 편의 감동적인 공연을 완성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그 무렵, 그 담임 목사가 개인 소셜 미디어 공간에 게재한 칼럼은 더 심각하다. 온갖 어려움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는 자기 목회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그 모든 것을 ‘투혼의 영성’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더 위대한 웅변의 삶을 살기 위해 조용히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근본적으로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렸듯이,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마음에 품고 기다리면서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 나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후사가 없는 현실 앞에서도 아들을 얻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불평하기도 했으며, 사라의 말에 혹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가 하나님께 크게 책망받기도 했다(창 15:2; 16:2; 17:1~21). 결국, 그가 말하는 ‘투혼의 영성’이란 성경이 가르치는 참 신앙이 아니라 자아도취이며, 타락한 자기 마음이 들려주는 헛소리에 속아 넘어간 착각이요, 망상에 불과하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회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서 웅대한 꿈과 포부를 마음껏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마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런 ‘영웅적인 영성과 행태’를 흠모하고 찬양하는 우상숭배의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 그런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보다도 수많은 공적과 함께 그들이 조용히 불태운 투혼이 더 칭송을 받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결국 그런 헛된 말에 마음이 사로잡혀 파멸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이런 예배는 명백하게 자기를 숭배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모인 회중 대부분은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에 끌려 그곳에 모인 것이지, 정말로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그곳에 모인 게 아니다. 그들은 가려운 자기 귀를 긁어줄 어릿광대 한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열심히 자기를 숭배하고 있을 뿐이다(딤후 4:3, 4).
다만, 이 일로 인해 쏟아진 수많은 비난과 공격을 좌익 세력의 정치적 공세라고 인식한 부분은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다. 실제로, 이 교회의 잘못된 설교가 ‘용비어천가’라고 비판한 교계 인사들 가운데, ‘세월호 4주기 기억 예배’ 설교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지독한 이념 선동 연설이었다며 호되게 비판한 이를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 개혁은 이러한 잘못된 신학과 신앙, 세속 이념과 철학 모두를 강단에서 몰아내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리를 몰아내려다가 호랑이를 맞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한편, 우리 시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잘못된 예배는 공연식, 연극식 예배이다. 현대 교회는 예배 전이나 중간, 또는 예배 시간 전체를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찬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놓는다. 또한, 세련되고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양을 감상하며 거기에 담긴 예술적 기교에 감탄하게도 한다.
이런 상황이 교회 안에서 한 30년 동안 이어지자, 최근에는 흔들고 춤추며 음악에 몸과 정신을 맡기는 ‘찬양 예배’가 마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양 여겨지고 있다. 그런 부분이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그들에게 진노와 저주를 선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저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 중심적이고 육체적인 찬양을 즐기고 나면, 탁월한 연기력과 연출력을 갖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 연극 한 편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설교자 스스로 울고 웃으면서 회중도 울리고 웃긴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면서 머슴 복장을 하고 무릎을 꿇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면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 달라며 주변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유명 인사를 데려다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들려주며 상대적인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고, 설교 중간에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깊은 ‘깨달음’을 주고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축복과 꿈으로 마무리한다. 그 막장 드라마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능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매주 성황을 이루며 상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헛된 연극의 감흥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는 금세 온갖 죄와 악이 차지해 버린다. 그래서 그는 갈수록 타락한 정서에 더 깊이 빠져, 결국 자기 기분이 고양되는 현상을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굳게 믿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매일 성령으로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자기 위선과 악함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일에 대해 기꺼이 유감을 표시하지만, 정작 자기가 지금 그 일을 행하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영적인 눈과 귀가 완벽하게 가려지고 막혀서 좌우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는 예배를 드릴 때 음악이나 다른 요소가 말씀의 본래 내용을 가리지 않도록 무척 주의했다. 즉, 그들은 오직 선포되는 진리 자체가 사람의 심령을 감화하게 하고, 다른 무엇이 감정을 자극해서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채로 날뛰는 열광주의가 되지 않게 조심하고 절제했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했고 인간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현대의 예배는 마법사 같은 목회자가 진리를 넘어서고 역행하는 다른 수단을 곁들여 성령님을 임하시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는 과정까지 직접 진행한다. 나아가, 얼토당토않은 복과 저주를 입에 올리면서 당장 이런저런 행동을 하라고 압박하기까지 한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과 불화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이자 자아숭배이며 자기 열정에 도취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마무리하며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섬기는 대상을 닮아간다. 지금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여러분의 생각과 성품을 거룩함과 진리를 아는 지식과 자기 부인과 겸손함과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는가? 아니면, 뭔가 와닿고 끌리는 것을 따라 행동하게 하는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영원한 천국이 아닌 이 땅으로 눈과 귀를 돌리게 하는가?
삶에서 실제로 맺는 열매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 잘 점검해보라. 예배가 어떻게 그런 열매를 맺게 했는지 주의 깊게 추적하고 검증하고 평가해보라. 그리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주저하지 말고 그곳에서 돌이켜라.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잘못된 곳을 떠나는 일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주목하시며 그를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예배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예배 진단2」 현대 교회의 잘못된 예배와 그 해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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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 공감합니다. 단,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할까요? 과연 이 땅에 제대로된 예배가 있긴 한가요?
청교도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를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신복음주의가 번성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 예배드리는 교회는 무척 드물어졌습니다. 일단, 시급한 부분은 신복음주의 문화를 거부하면서 정통 개혁주의 교리에 맞추어 강단 설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제네바 개혁교회에 한번 들러보시는 것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