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 편에서는 루터가 많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보름스(Worms)로 찾아가보겠습니다. 보름스는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1156년에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된 뒤로 제국의회가 100번 이상 열렸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 유명한 의회는 1521년의 ‘보름스 의회(the Diet of Worms)’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 역사적인 의회가 열린 보름스 대성당(Wormser Dom)과 루터가 심문을 받았던 장소, 그리고 종교개혁 기념 동상이 세워져 있는 루터 광장(Luther Platz)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름스에는 아침 일찍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가 4월이라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날이 맑아서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일정이 보름스를 둘러본 다음 다른 도시로 이동해 숙소를 잡고 쉬는 것이어서, 저는 모든 짐을 등에 짊어진 채 보름스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루터 광장이 있다고 해서, 우선 그곳부터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 저 멀리 보이는 루터 동상(Lutherdenkmal)의 모습
어느 곳이든지 찾아가는 동안에는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런 마음이 훨씬 더 크게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종교개혁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여러 신앙 선배들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동상들은 에르네스트 리첼과 다른 조각가 3명1이 12년 동안(1856~1868) 함께 작업해서 만들었고, 전체적인 설계는 리첼이 담당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동상을 세워놓은 위치입니다. 루터가 심문을 받은 보름스 의회가 열렸던 장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소유하는 관계로, 그곳에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기념물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장소에서 약 100미터 가량 떨어진 이곳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그때는, 마치 여러 종류의 과자로 가득한 ‘종합 선물 세트’(아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매우 들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루터 동상은 광장 한 가운데 가장 높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루터 동상 하단부의 네 면에는 루터가 했던 말, 종교개혁과 관련이 깊은 인물의 얼굴, 루터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의 한 장면을 표현한 부조를 하나씩 배치해놓았습니다.
그리고 루터 동상 하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전(前) 종교개혁자로 불리는 이들, 곧 왈도파를 이끈 피터 왈도, 영국의 종교개혁 선구자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체코)의 개혁자 얀 후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앉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장 정면에서 보면, 시계 방향으로 돌며 사보나롤라, 왈도, 위클리프, 후스의 순서로 동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대기 순서를 따라 왈도부터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루터의 말과 인물 부조, 그리고 주요 장면 부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피터 왈도 (Valdez, Peter Waldo, 1140~1205)
– 그의 손에 있는 성경과 지팡이가 그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피터 왈도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진 인물을 아니지만, 교회 역사가들은 그를 최초의 종교개혁자라고 평가합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부유한 상인의 삶을 살던 그는 어느 날, 사제 한 명을 고용해 라틴어 성경 일부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왈도는 그 번역된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살아가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의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해지기 원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뒤,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아주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바로 왈도파(Waldenese)입니다. 그들은 2인1조로 프랑스 각 지방을 돌며 복음을 전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짓 교리와 전통(미사와 연옥 등)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번역 성경과 각종 경건 서적을 보급하는데 힘썼습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179년에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열어 왈도파를 ‘무식한 집단’이라고 규정했고, 교황 루시우스 3세는 1184년에 베로나 공의회에서 “누구든지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반대되는 발언을 하거나 그런 사상을 품기만 해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파문당할 것이며, 세속 정부 당국에 의해서도 응분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칙령을 공포(公布)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섭고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열어서, 수많은 왈도파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왈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 핍박을 피해 주변 국가로 흩어져서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곳을 떠돌며 복음을 전한 왈도는 훗날 얀 후스가 개혁의 불길을 일으키게 될 ‘보헤미아(체코)’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흩어진 왈도파 가운데 일부는 알프스 산 너머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은 극히 험준한 알프스 산맥 남부에 자리 잡은 덕분에 로마 카톨릭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 후예가 알프스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남부 지역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거나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복음과 진리에 기초해 일어선 그들이 계속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사실, 탐방 초기에 프랑스를 한참 둘러보고 있을 때, 이 왈도파 유적지도 방문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지역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교통 수단이 잘 갖추어지지 않을 정도로 험준한 곳이어서 선뜻 찾아 나서기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을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데, 제게 그런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
– 그의 손에도 역시 성경이 들려 있습니다.
그 옆에는 전에 얀 후스의 탐방기 편에서도 잠깐 소개해드렸던 존 위클리프의 동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도 불리는 위클리프는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힙스웰(Hipswell)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석한 데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 16세에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가서 여러 해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1361년에는 밸리얼 칼리지(Balliol College)의 학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362년에 옥스포드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어떤 계기인지 모르지만)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성경에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결국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참고한 어떤 책에서는, 위클리프가 어떤 한 사건을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어 개혁을 추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책에 의하면, 1365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위클리프의 재능을 높이 사서 사제 후보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일은 없던 일로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 부임한 수도사 출신의 대주교가 그 일을 위클리프가 아닌, 다른 수도사에게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로마 교황청에 호소했지만, 교황청의 반응은 참으로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위클리프가 로마 교황청과 수도원주의를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클리프가 그런 사적인 원한으로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클리프가 추진한 개혁의 핵심은 자기를 외면하는 교황청과 수도원주의를 대신할, 어떤 다른 기구를 세우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교황이라는 엄청난 권력의 위협을 성경의 권위로 맞섰습니다.
즉, 위클리프는 그런 사건이 있기 전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모순과 부패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이미 상당히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내놓은 교회 개혁 방안과 그것을 실천한 방식을 살펴보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우선, 그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내놓은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교황과 고위 성직자는 세상 권좌에서 물러나야 하고, 왕은 재물을 교황청에 보내지 말고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영적인 의무를 감당해야 할 교회가 세속 권력과 재물을 추구한 것이 잘못이라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참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교회 안에는 그렇지 못한 자가 너무도 많고, 타락하고 부패한 교황의 실상은 적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세 번째로, 로마 카톨릭의 성찬론인 화체설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찬 자리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네 번째로, 성경은 오류가 없고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경을 번역해 모두가 읽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협과 방해를 무릅쓰고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2그의 추종자들이 그 성경을 갖고 다니며 각지에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롤라드파(Lollards)3라고 불렀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는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습니다. 교황이 어떻게 연옥에 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느냐면서, 전혀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이러한 개혁을 조직적으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그 사상을 책과 강연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파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개혁사상은 어떤 종파나 조직에 의해 보존되어 후대로 이어지지 않고, 전국을 떠돌며 복음을 전한 롤라드파와 그가 남긴 책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그가 뿌린 진리의 씨앗은 훗날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원동력이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밖에도 그의 글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를 종교개혁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을 끝내고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위클리프와 관련 있는 장소를 한 군데도 방문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곳도 꼭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위클리프 동상 옆으로는 지난 번에 소개해드린 얀 후스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이미 살펴보았기에, 여기서는 따로 더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얀 후스 편을 참고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후스 동상 옆에는 발음하기 참 어려운 이름의 소유자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는 루터보다 약 한 세대 정도 앞서 살면서, 타락한 자기 시대와 교회를 향해 강력하게 회개하라고 외쳤던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중세의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동상도 약간 선지자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보나롤라는 1452년에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커서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사보나롤라도 부모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어나갔지만, 그 책은 사보나롤라의 마음에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느낀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그의 삶은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결국, 그는 1475년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도미니크파에 속한 볼로냐(Bologna)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 살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수도사가 된 사보나롤라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열정적인 수도원 생활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책을 통해 신앙의 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하여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7년 동안 수도원 생활을 하며 신학을 공부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라는 작은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문예 부흥(르네상스)의 중심 도시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는 쾌락과 탐욕에 깊이 빠져 지내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같은 주제를 집중적으로 설교하며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설교보다 가르치는 일에 더 힘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몇 년 뒤, 산 마르코 수도원장이 된 사보나롤라는 로마 카톨릭 교회 안의 부패와 타락이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대중 설교자로 복귀했습니다. 시대의 어두움과 교회의 내적 타락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큰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 찬 그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피렌체 시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家)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문예 부흥을 지원하여, 도시의 영적 상태가 크게 황폐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렌초는 그런 설교를 하지 말라고 부탁도 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몇 년 뒤, 로렌초가 죽고 그의 아들 피에로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도 더 시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피에로는 시민의 동의 없이 피렌체에 불리한 내용이 담긴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회의를 열어 피에로를 탄핵하고, 샤를 8세에게 보낼 특사로 사보나롤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만큼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은 그의 설교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특사로 파견된 사보나롤라는 특유의 힘있는 설교를 통해 샤를 8세를 감복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했으며, 피렌체 지역은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렌체 시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보나롤라에게 피렌체를 다스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보나롤라도 피렌체를 새 예루살렘과 같이 거룩한 도시가 되게 하겠다는 꿈을 꾸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권좌에 앉은 그는 악한 범죄자를 처벌하고, 도박을 금지했으며, 사치스러운 것들을 없애고 경건하고 엄숙한 생활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음란 서적과 그림, 사치품, 이단 서적들을 모아 불태워버린 일, 이른바 “허영의 소각”입니다. 그때, 유명한 화가인 보티첼리도 그 일에 참여하여 이전까지 그려놓은 작품을 태웠다고 전해집니다. 그 정도로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피렌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의 한계와 결점도 분명했습니다. 그는 예리하기는 했지만, 넘치는 열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다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게다가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종종 예언을 하곤 했지만, 그 예언은 수시로 빗나갔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열광하던 시민들은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엄격하고 진중한 신정 정치에 싫증을 내며 전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이들의 반발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졌습니다. 즉, 도시 전체를 새 예루살렘처럼 경건하게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때, 가장 악랄한 교황 중의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알렉산더 6세가 교황에 선출됨으로써,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사보나롤라가 달갑지 않았던 그는 사보나롤라의 입을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통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추기경의 지위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즉, 방해와 협박으로는 안 되니까,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입을 막으려고 꾀한 것입니다. 그때,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통해 답변한 말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내가 원하는 바는 추기경의 모자도 아니고 주교의 관도 아닙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 대신에,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성자들에게 주신 바 순교의 붉은 피로 물든 모자,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 뒤에도, 사보나롤라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타락한 교황과 교회를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크게 분노하며 사보나롤라를 파문해버렸습니다.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던 피렌체 시민들도 그 파문을 계기로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시민들은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달려가 사보나롤라를 체포했으며, 교황은 ‘이단이자 교황청을 멸시한 자’라는 죄목으로 그에게 화형을 선고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고문을 받고, 캄캄한 감옥에서 손이 묶인 상태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바울과 후스처럼 많은 글을 썼습니다. 죽음조차도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던 것입니다.
1498년 5월 23일 아침, 피렌체의 중앙 광장에서 사보나롤라의 화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전에 그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아 열광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은 이제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하라!”라고 외치며 그를 조롱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화형을 집행하기 전에 주교가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 교회)와 승리의 교회(천상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노라.”라고 한 말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전투적 교회에서 이제 떠나지만 승리의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들어가려는 승리의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시대의 한계와 개인적인 결점이 다소 뚜렷하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오직 주님께 온전히 충성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사보나롤라는 45살의 나이에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지나 그토록 뜨겁게 사모했던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물론,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사회와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몰아내려는 데 치중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도 기꺼이 그를 종교개혁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만큼, 그는 자기 시대의 오류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던 인물이었습니다.
▲ 동상 앞면 하단부에 있는 루터의 말과 두 인물의 모습(요한과 요한 프리드리히 1세)
이제, 루터 동상 하단부에 있는 루터의 말과 인물 부조, 그리고 주요 장면 부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상 정면에는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한 그 유명한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그 말 아래쪽으로는 작센 선제후를 지낸 두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왼쪽의 인물은 작센의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의 뒤를 이은 ‘변함없는(확고부동한)’ 요한(Johann der bestandige, 1468~1532)입니다. ‘지혜공’의 동생인 그는 형이 통치하던 방식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제후가 되었을 무렵 독일 지역에서는 ‘농민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봉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 뒤 그는 귀족과 농민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요한은 루터와 개신교 신학자와 교류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선제후였습니다. 그는1530년에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을 독려하며, 황제에게 너무 순종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의 신학자들에게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나와 내 나라에 공을 돌리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드리라고 말해주어라.」
그 말을 들은 루터는 “나는 작센의 선제후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 선제후는 제국의회가 열린 다음 해인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을 결성하여, 로마 카톨릭을 믿는 황제가 군사적 행동을 취할 것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종교개혁을 계속 진행하고 보호했던 요한은 그다음 해인 153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리는 장남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에게 돌아갔습니다.
‘변함없는’ 요한 옆에 표현되어 있는 인물이 이 요한 프리드리히 1세입니다. ‘관대한’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 der Großmütige)라고 불리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게오르크 슈팔라틴(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루터 사이를 중재했던 인물, 아우크스부르크 편 참고)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고, 루터와도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후로도 루터의 글을 탐독하고 그 글이 출간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다방면으로 종교개혁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서부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대외적인 문제가 정리되자, 카를 5세는 1546년에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열고 제국 안을 어지럽히는 종교 문제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앞서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황제의 속내를 충분히 확인했던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노한 황제가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47)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황제의 승리로 돌아갔고, 전쟁에서 패배한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카를 5세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여전히 비텐베르크를 지키며 항전하고 있던 그의 아내가 황제와 협상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냈습니다.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황제와 협상하며 영지 대부분과 선제후 지위를 내놓고 비텐베르크 성문을 열어주었지만, 신앙의 문제만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풀려난 뒤, 그는 바이마르(Wiemar)로 가서 남은 생을 보냈고, 제후와 백성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순교로 간주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긴 것입니다.
혹시, 아우크스부르크 탐방기 편에서 소개해 드렸던 사진 하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안나 교회에 루터 초상화와 나란히 걸려 있는 초상화 한 점
그때, 저는 루터 초상화와 나란히 걸려 있는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 나 ‘관대한’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글을 쓰면서 잘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맞을 듯했습니다. 루터 동상 하단부에 있는 얼굴 부조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는 넓은 챙 모자를 쓰는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 사진과 거의 비슷한 그의 초상화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루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아우크스부르크 논쟁을 생각하며 이 사진을 바라보았기에, 그 옆의 인물을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편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주인공은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루터가 평소 마음에 품고 체계화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더구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루터교의 공식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루터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서와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기 조금 어려운 인물이 바로 요한 프리드리히 1세입니다. 그는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일부 업무와 외교 문제를 담당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나오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앞장섰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독일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아우크스부르크에 두 사람의 초상화를 나란히 걸어놓아도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 보름스 의회에 불려나간 루터가 카를5세 앞에서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
그 아래쪽에는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을 부조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제가 섬기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시 상황을 참 생생하게 표현해놓은 이 부조를 보면서 함께 종교개혁에 대해 공부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재정이 필요하겠지만, 꼭 한 번 함께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동상 왼편 하단부에 적힌 글귀와 두 인물의 모습(유스투스 요나스와 요하네스 부겐하겐)
동상 왼쪽 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습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고 진정한 삶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이 문장이 이렇게 번역되어 나오기까지는 사촌 누나의 도움이 컸습니다. 원래, 저는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독일어를 영어로 바꾼 뒤 우리말로 번역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막상 옮기고 나니까 뭔가 조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던 중에, 독일에서 10년 가까이 유학 생활을 했던 사촌 누나가 생각났습니다. 사촌 누나에게 연락하자, 흔쾌히 문장을 우리말로 직역해서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조금 의역해서 부드럽게 한 뒤 다시 누나에게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위의 문장은 그렇게 몇 번 오고 간 끝에 나온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도움을 준 사촌 누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 아래쪽에 있는 인물은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1493~1555)와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입니다. 먼저 소개해드릴 요나스는 루터의 영적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루터와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남다른 언어 재능으로 종교개혁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라틴어로 발표된 「95개 조 반박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한 주인공이 바로 그였습니다. 훗날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요나스는 원래 법학을 공부하던 인문학자였지만, 루터와 그의 친구들과 교제하면서부터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521년에 루터의 추천을 받아, 비텐베르크의 궁성 교회(귀족들이 출석하던 교회)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루터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 했고, 루터가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루터는 그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루터에 관해 손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루터 옆에서 실질적인 비서 역할을 감당해준 요나스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요나스 반대편에 있는 부겐하겐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물입니다. 앞서 비텐베르크 탐방기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그는 1523년에 루터의 추천을 받아 성 마리엔 교회(시민들이 출석하던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부겐하겐은 루터의 담임 목사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루터와 폰 보라의 결혼식을 주례하였고, 둘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자 세례를 주고 그들의 후견인이 되어 그들을 끝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한, 루터가 소천하자 루터의 장례식도 담당했습니다. 참으로 부겐하겐은 루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였습니다.
▲ 루터가 세례를 받고 성찬을 집례하는 모습(왼쪽)과 결혼하는 모습(오른쪽)
그 요나스와 부겐하겐의 얼굴 부조 아래쪽에는 루터가 세례를 받고 성찬을 집례하는 모습과 폰 보라와 결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루터에게 세례를 주고, 둘의 결혼식을 주례하는 인물이 바로 부겐하겐입니다.
▲ 동상 뒷면 하단부의 글귀와 두 인물의 모습(울리히 폰 후텐과 프란츠 폰 지킹겐)
동상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12제자(사도)들에게 전하도록 한 복음은 그분의 칼이다. 주님께서는 그것(복음)으로 마치 번개와 천둥이 치듯 세상을 치셨다.」
그 글귀 아래쪽에 있는 두 인물은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선 인물입니다. 이들은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 1488-1523)과 프란츠 폰 지킹겐(Franz von Sickingen, 1481-1523)으로서, ‘기사 전쟁(騎士戰爭, 1522~1523)’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사상을 발표하자 가장 먼저 관심과 지지를 보낸 이들은 독일의 귀족 계층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사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지만, 정작 루터의 신학에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번져가는 개혁의 불길에 힘입어 민족의 권리를 되찾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데 뜻을 두고 움직였습니다. 나아가 ‘기사의 시대’라고 불린 중세 시대 동안 누렸던 그 찬란한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였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후텐은 혁명가라고 불릴 정도로 열정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자로서, 기사 전쟁의 머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킹겐은 후텐의 이론에 호응한 군사 지도자로서, 독일 라인 지방에 거주하는 기사를 모아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1522년 9월, 트리어(Trier) 대주교령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트리어 대주교는 지방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그 공격을 잘 방어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격을 가해 그들을 패퇴하게 했습니다. 란트슈틀 요새로 피신하여 저항하던 지킹겐은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으며, 후텐은 요새가 함락되자 스위스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몇 개월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 전쟁을 일으킨 주역의 얼굴이 루터 동상 한쪽 면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사 전쟁이나 농민 전쟁과 같은 사회적으로 반향이 큰 사건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회를 영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는 그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난 복음을 위해 싸우되, 피를 동원하지는 않겠네 …(중략)… 세상은 말씀으로 정복되며 말씀으로 교회는 섬김을 받고 재건되는 법. 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일어났으므로 사람의 손을 안 써도 망할 것일세.」
▲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궁성 교회(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 앞에 걸어놓는 장면
이 부조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었습니다.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교회 문 앞에 걸어 놓음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 동상 오른편 하단부의 글귀와 두 인물의 모습(존 칼빈과 울리히 츠빙글리)
마지막으로 동상 오른쪽 면에 새겨놓은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그 어떤 인간의 규정도 그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에 따라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자유롭기 때문이다.」
동상에 새겨놓은 이 문구를 번역하면서 ‘아무래도 이 글귀들은 종교개혁 3대 논문이라고 불리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뽑아놓은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터가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문구를 동상 정면에 놓고, 위의 논문에서 문구를 각각 하나씩 골라 나머지 세 면에 놓으면 딱 맞아떨어질 듯했습니다. 최근에 다음 편을 준비하면서 해당 논문을 읽고 있는데, 같은 글귀로 볼 만한 문장이 나오면 확인해보고 여러분께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인물인 칼빈과 츠빙글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들과 관련 있는 유적지를 소개하며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칼빈과 츠빙글리의 얼굴 부조 아래쪽에는 성경을 번역하고 설교하는 루터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름스 의회가 끝난 뒤,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임을 파악하고, 지혜로운 비밀(?) 작전을 펼쳐 루터를 바르트부르트 성에 피신하게 합니다.
루터는 그곳에서 조용히 머물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부조 왼쪽에는 그 모습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부조 오른쪽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루터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제, 광장 모서리를 따라 루터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인물의 동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광장 정면 왼쪽 귀퉁이에는 긴 칼을 들고 서 있는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der Weise, 1463~1525)
프리드리히 3세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봤던 모습처럼 한 손에 아주 긴 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대담하고 지혜로운 성품을 참 잘 표현해낸 것 같습니다.
▲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 Reuchlin, 1455-1522)
광장 뒤쪽의 왼쪽 귀퉁이에는 독일의 저명한 인문학자이자 히브리어 학자였던 요하네스 로이힐린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멜란히톤의 종조부(친할아버지의 형제)였던 그는 멜란히톤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멜란히톤은 어렸을 때부터 로이힐린에게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며 출중한 실력을 쌓았습니다. 로이힐린이 나이가 지긋해졌을 무렵, 비텐베르크 대학은 그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교수로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제안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사하면서, 대신 멜란히톤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로이힐린은 루터와 멜란히톤을 연결해준 장본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루터와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로이힐린은 멜란히톤이 탁월한 인문주의 지식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돕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멜란히톤에게 비텐베르크를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멜란히톤은 그 말을 거절했습니다.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는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로이힐린은 독일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건설자’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특히, 그가 1506년에 발표한 『히브리어 입문』은 종교개혁자들이 직접 성경 원문을 읽고 연구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던 교황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직접 읽으며 진리를 깊이 깨닫고 붙들게 된 데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로이힐린이 루터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루터 동상 한쪽에 그의 동상을 세워놓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성경일까요, 아니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일까요?
광장 뒤쪽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루터의 단짝 멜란히톤의 동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동상을 처음 봤을 때, ‘어, 멜란히톤의 위치는 광장 앞쪽의 오른쪽 귀퉁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이 헤센의 필립 공작(또는 방백이라고 부름)4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왜 이 자리에 멜란히톤 동상을 세웠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동상의 설계자는 칼(정치)로 종교개혁을 도운 인물을 앞쪽에, 펜(지식)으로 도운 인물을 뒤쪽에 배치해놓은 듯했습니다.
▲ 헤센의 필립 1세(Philip I of Hessen, 1504~1567)
멜란히톤 동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던 그 자리에는 헤센 공작인 필립 1세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있습니다. 이 인물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는 않지만, 앞서 소개해드린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슈말칼덴 동맹을 이끌었던 주요 지도자입니다. 종교개혁에 열심을 내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고, 억류된 지 5년 뒤인 1552년에 풀려났습니다. 그 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영지 재건에 힘쓰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을 해체했고, 그것으로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도 종말을 맞게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성경적 진리의 재발견에 기초한 영적 갱신 운동이었지, 정치 권력에 힘 입어 사회 구조를 개편하려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은 정치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제국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는 1555년 9월 25일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열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라고 불리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 협정은 루터교에 로마 카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주었고,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은 로마 카톨릭을 믿을지 루터교를 믿을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신앙이 같은 제후의 영지로 이주하여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것과 같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이 조약이 체결될 무렵 제국 안에서는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신앙이 크게 성장해 있었지만, 개혁파 신앙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어쨌든 제후의 신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100년 뒤, 30년 전쟁5이라고 부르는 전쟁으로 독일 지역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종교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었습니다.
이제, 광장 귀퉁이를 잇는 모서리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여인들의 동상을 소개해드릴 차례인 듯합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순간적으로 ‘음, 이 여인들은 누구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쟁쟁한 인물과 한 자리에 함께 동상을 세워놓은 거지?’ 하는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었습니다. 그 의문은 이번에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습니다.
▲ 평화의 잎과 함께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with the Peace Bell)
먼저, 광장 왼편에 있는 이 여인의 동상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년)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왼손)와 평화의 잎(오른손)은 그 둘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인의 표정에서도 평안함과 온화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저항하는 슈파이어(The Protestant Speyer)
광장 뒤쪽 모서리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이 여인의 동상은 1529년의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여러 제후와 도시 대표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함께 저항했던 사건을 기리는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제후의 신앙이 그 지역의 신앙을 결정한다는 기존의 결의를 폐기하고, 제국 안에서는 오직 로마 카톨릭만 믿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여러 개신교 제후와 도시 대표들은 황제의 그 결정에 강력하게 항의(프로테스탄트)하며, 기존의 결의를 지켜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무언가를 제지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의 무릎 위에 펴져 있는 커다란 책은 황제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한 듯합니다.
▲ 슬퍼하는 마그데부르크(The grieving Magdeburg)
마지막으로 광장 오른쪽 모서리 한 가운데 있는 이 여인의 동상은 얼핏 봐도 매우 어둡고 침울해 보입니다. 칼을 축 늘어뜨린 채 슬퍼하는 이 여인의 동상은 30년 전쟁 중에 일어난 ‘마그데부르크 학살(또는 약탈)’의 참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측에 속한 틸리 백작과 파펜하임 장군은 마그데부르크를 함락하고, 무려 25,000~30,000명 가량 되는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또한 도시 대부분을 파괴해서, 이를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재물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이제, 이 광장에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게 딱 하나 남았습니다. 바로 여인의 동상 아래쪽에 보이는 동그란 물체입니다. 이 물체는 가문이나 도시, 또는 집단과 나라의 계보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지인 ‘문장(紋章)’입니다.
이 문장들은 루터 광장 세 모서리를 따라 각각 9개의 문장씩, 총 27개가 달려 있습니다. 이 27개의 문장은 종교개혁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들을 의미합니다.6 그밖에도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7개 주(州)의 문장7도 루터 동상 최하단부 사면에 붙어 있습니다.
이번 탐방기는 이 루터 광장의 동상만 살펴보아도 분량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는 보름스 의회가 열렸던 장소를 돌아보며, 그와 관련 있었던 사건들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 에르네스트 리첼(1804~1861): 전체적인 설계를 담당함. 루터, 위클리프 동상 제작.
– 아돌프 폰 돈도르프(1835~1916): 사보나롤라, 프리드리히 3세, 로이힐린, 왈도, 마그데부르크 동상 제작 및 인물 부조 4편, 주요 장면 부조 2편 제작.
– 구스타프 아돌프 키예츠(1824~1908): 후스, 헤센의 필립, 멜란히톤, 아우크스부르크 동상 제작. 인물 부조 4편, 주요 장면 부조 2편 제작.
– 요하네스 쉴링(1828~1910): 슈파이어 동상 제작.
2 물론,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아 일일이 베껴 써야 했기에, 일반 성도가 성경을 구해서 읽기에는 값이 너무 비쌌고 수량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3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세상에서 “롤라드파”(Lollards)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이름의 기원에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기도문이나 찬송가를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르트’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4 신성로마제국의 귀족 제도는 다음의 블로그를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5 유럽 전역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진영으로 나뉘어 벌인 국제적인 종교 전쟁, 1618~1648
6 브라운슈바이크, 브레멘, 콘스탄츠, 아이제나흐, 아우크스부르크, 아이슬레벤, 엠덴, 에르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슈베비슈 할, 함부르크, 하일브론, 예나, 슈파이어, 쾨니히스베르크, 라이프치히, 린다우, 뤼베크, 마르부르크, 메밍겐, 뇌르틀링겐, 리가, 마그데부르크, 슈말칼덴, 슈트라스부르크, 울름, 비텐베르크
7 작센 선제후령, 브란덴부르크, 안할트, 로이틀링겐, 뉘른베르크,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헤센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5. 시드니 휴튼, 『기독교 교회사』, 나침반, 1994.
6.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솔로몬, 2007.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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