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5) 삼위일체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방금 같이 읽은 이 말씀은 축도할 때 주로 쓰이는 성경 구절입니다. 민수기에 있는 축도의 말씀과 이 말씀을 보통 축도 성구로 사용하는데, 보통 이 말씀을 사용합니다. 오늘은 소요리문답의 5문과 6문의 내용, 즉 삼위일체 교리에 관하여 설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정말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누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면, 그건 뭐 더 두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무조건 이단입니다. 마귀도 삼위일체 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기독교 역사에는 삼위일체 교리에 걸려 넘어진 이단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교리사(敎理史)를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이 교리에 걸려 넘어진 이단이 정말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양태론(樣態論)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양태론을 삼위일체 교리로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양태론이 무엇입니까? 양태론은 삼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고유하고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어떨 때는 그리스도도 되시고 성령도 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어떨 때는 성부도 되시고 성령도 되시며, 성령께서도 어떨 때는 성부도 되시고 그리스도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각 위를 고유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통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 중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로 양태론을 가르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만큼 양태론은 빠지기 쉬운 오류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역사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책을 따로 하나 저술하였고, 루터나 칼빈도 삼위일체 교리를 많이 설명했습니다.
그런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할 때, 우리는 어떤 부분을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선, 하나님의 유일성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 한 분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로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능력과 권능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크거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금 모자라거나, 성령 하나님께서 모자라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이에 비해, 이슬람교는 단일신(單一神)을 믿습니다. 저들이 믿는 단일신, 즉 ‘알라’를 우리 말로 해석하면 ‘오직 하나뿐인 신’입니다. 이슬람교로 개종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이슬람 신자(무슬림)가 됩니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입교하면,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절하고, 라마단 금식 준수 등의 몇 가지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처럼,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神) 개념에는 성자나 성령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유일하신 신으로서, 능력과 지혜와 권능이 동등하신 삼위께서 한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렇지만 이 유일하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일체가 되신 분입니다.
물론,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삼위일체 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 말이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연속 교리 설교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쭉 강해하다가, 결국 끝에 가서는 “삼위일체는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지, 이것을 이성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설령 삼위일체를 탁월하게 논증한 수많은 신학책과 철학책을 다 읽는다고 해도, 우리의 이성으로 ‘삼위가 일체’이시라는 사실을 지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누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산부인과 의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 말씀으로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적과 기적을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일이 어찌 이적이고 기적일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이성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실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토대로 해야 하며, 삼위일체 교리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봅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를 한 구절 안에서 모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창세기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대목에서 이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킹 제임스 역(흠정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복수형으로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단일신이셨다면 당신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말을 쓰시지 않고, ‘내가’라는 말을 쓰셨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가리킬 때면 언제나 단수형으로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아하, 삼위 하나님께서 계신다!”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삼위께서 계신다고 증거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고유한 성 삼위, 그러나 일체이신, 즉 한 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유일하면서도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사역을 각자 나누어 감당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적용하고 이루어 가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각자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는 이렇게 역할이 서로 다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꼭 감당하신 역할에 맞는 위격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도 함께 찾았다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나아가셔도 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님이시여.”라고 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하나님 아버지만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각 위의 어떤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더라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지혜와 권능과 모든 것에서 동등하시지만, 구속의 사역에서 감당하시는 역할을 각자 나누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삼위 하나님 가운데 특별히 먼저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신약 시대를 보통 ‘성령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오순절주의자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를 가리켜 ‘성부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지내신 33년의 기간을 ‘성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가 세워진 이후, 즉 오순절 이후를 ‘성령의 시대’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시대’라는 말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오신 근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 즉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서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나 설교자는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고 하지만, ‘성령행전’이란 말은 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라는 말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시대’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 말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께서 구속의 사역에서 감당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임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는 20세기를 ‘성령이 임재한 시대’라고 하면서, 특별하게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전 1,900년 동안에는 성령님께서 교회에 임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회에 계시면서 늘 당신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항상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가장 크고 핵심적인 사역은 바로 죄인이 회심하는 구원의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이 방언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복음과 진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오순절주의자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악령의 역사입니다. 악령이 틈타고 역사하는 면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신사도 운동이나 성령 운동의 그 각종 더러운 모습들을 보십시오. 그런 일이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역사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하게 보존하시고 드러내시며, 그것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의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다음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요 1:1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사역을 감당해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역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셨던 33년 중에서 마지막 3년 동안, 즉 공생애 기간에 이 십자가 사역을 온전하게 감당하셨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있어 신약 성경만큼 표면적으로 확 나타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활동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보면,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구속 사역에서 각자 감당하신 일에 관하여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이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신학자가 교묘하게 꾸며낸 교리가 아닙니다. 단지, 성경이 그 사실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또한, 양태론을 비롯한 일체의 반(反)삼위일체 교리는 거부하셔야 합니다. 모르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이 말하는 잘못된 교리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질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몬교 역시도 예수님에 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가 피조물인 우리에게 굉장히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이 삼위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세워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존 칼빈이 예배를 인도하기 전에 항상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보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항상 이 말을 합니다.
“다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칼빈이 예배드리기 전에 항상 사용했던 문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칼빈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 즉 당신의 백성(교회)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겁니다. 성부 하나님께만, 혹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만, 아니면 성령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시간에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안 받으신다거나, 성령 하나님께서만 받으신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성령 운동하는 사람이 특히 위험한 것입니다.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에서 꼭 성령님만 계신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이 행하는 사역의 명칭부터가 성령 운동입니다.
입만 열면 ‘성령, 성령’하면서, 마치 지금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시는 것과 같은 왜곡된 인식을 심어줍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성령 운동은 이단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사역을 나누어서 늘 함께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 가운데 어느 하나의 위격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보십시오. 기독론(그리스도에 대한 신학)밖에 없습니다. 성부도 없고, 성령도 없습니다. 왜 바르트의 신학에는 균형이 없습니까? 성부와 성령에 대한 신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정말 줄기차게 성자 예수님만 말합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바르트에게 삼위일체에 관한 온전한 개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삼위일체 교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지 않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분명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인이며 머리가 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기도와 예배와 찬양의 대상은 누구이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구 찬송가 1장에서 6장까지 어떤 찬양이 나옵니까? 성부, 성자, 성령 각 위격에 대한 찬양이 나오잖습니까? 비록 짧지만 바로 이런 찬양이 진정한 찬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는 이러한 온전한 찬양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대속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과”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구속의 사랑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의 교통 하심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성령의 교통 하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면서 떠나지 않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께 임재하여 달라고 열심히 구하며 초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정말로 무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께서는 이미 거듭난 사람의 심령 안에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한 이상하고 왜곡된 교리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면서, 그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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