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24) 구원의 순서
Yale Presbyterian Church 예일 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디도서 3장 5,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9과 30문, 구원의 순서를 설교하겠습니다. 소요리문답 제29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어떻게 사람에게 적용되는지를, 제30문부터 제38문까지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 하나씩 차례대로 설명합니다.
라틴어로는 ‘오르도 살루티스(ordo salutis)’라고 하는 구원의 순서(또는 서정)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유효한 부르심(소명), 회심(거듭남), 칭의, 양자 됨, 성화, 영화, 이렇게 6가지로 이루어진 구원의 전체 과정을 뜻합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유효한 소명).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그분께로 돌이키게 하십니다(회심). 세 번째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칭의).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양자 됨). 다섯 번째로, 우리를 이 땅에서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 가십니다(성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 우리를 완전히 영화롭게 하십니다(영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은 바로 이 6가지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자마다 순서나 요소를 조금씩 달리하기도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보통 이 6가지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원의 순서는 기초 신학 공부 과정에서 꼭 나올 만큼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들은 이와 관련한 내용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목회자 중에서도 더러는 알지 못합니다. “구원받았다.” 하면, 그저 거듭나는(born again)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세부적으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잘 배우면 신앙이 견고하고 풍성해집니다.
앞으로 이 구원의 순서에 대해 하나씩 설교할 텐데 그전에 미리 알아야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순서는 순차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몰라서 오해하면 ‘아, 구원에는 순서(과정)가 있어서 일단 유효적 소명을 받고, 그리고 한 1년 정도 뒤에 회심하고, 그다음에는 칭의와 양자 됨도 차례로 하나씩 받게 되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순서는 정통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지, 시간순으로 나열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는 모든 부분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심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양자 되고 거룩해지며 영화롭게 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물론, 거룩해지는 일(성화)은 그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며, 영화롭게 되는 일(영화)은 이 생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이루어질 약속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소요리문답 제29, 30문을 통해 구원에 대한 핵심 교리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의 구원은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 보통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만 이야기합니다. “유일한 구주(救主) 예수님께 찬양 드리며 영광을 올립시다.”라고만 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와 능력이다.”라고 합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택하시고(성부), 이루시며(성자), 적용하시는(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여러분, 칼빈이나 로이드 존스의 설교문을 읽어보십시오. 그 설교문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영광스러움이 풍성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함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 잘 나타납니다. 구원은 성자 예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누군가는 이 말을 오해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부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성경과 올바른 신학을 몰라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입니다.
한편,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큰 잘못과 오류들도 있습니다. 먼저, 사람에게는 구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나 현대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구원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고전과 현대를 망라해 자유주의 신학에는 한결같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만 하는 죄인이다.”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죄’라는 단어 대신에 ‘부적응’, ‘내적 부조화’, ‘연약함’, ‘사회적 모순’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영적(초자연적)인 세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아득한 먼 옛날의 신화로 취급합니다. “예수의 복음이란 건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토착 신앙으로, 서구 문명이 발전하기 전에 믿었던 신화에 불과하다. 오늘날처럼 과학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교회는 이제 그런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이던 미개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며 가르칩니다.
그다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로마 천주교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구원의 궁극적인 근거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 편에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하셔도, 그가 그 일을 거부하거나 은혜를 자기 공로로 증진하지 않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능력이 그를 구원으로 이끄는 데는 부족하고 모자란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상을 따르는 곳에서는 항상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 대해서 많이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성경이 아닌 세속적 인본주의와 심리학에 기초해서 알려줍니다. 물론, 그런 가르침은 인간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려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죄로 죽었으며, 모든 소망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지 못합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신자가 과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신자나, 신앙 생활한 지 30년이 넘은 신자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보면 대체로 “글쎄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아닌가요?”라고 막연하게 대답할 뿐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얘기해주면, 금세 얼굴빛이 변하며 “아,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은 아닌 거 같아요.”라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했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나아가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과 같은 성경과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그의 체험은 거짓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지(誌)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공연 예술 비평 기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모차르트를 전공하는 어느 연주자가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했는데, 뉴욕타임스 예술 비평 기자는 그 연주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습니다. “곡은 모차르트의 곡인데 그곳에 모차르트는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연주자가 모차르트만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딤전 3:15)”라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말씀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위와 같은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작 거기에는 참되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없는 곳에 참되신 하나님께서 임하시겠습니까? 그런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A. W. 토저는 『갓 (GOD)』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잘 지적했습니다. 그는 당대 교회를 보며 “오늘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풍성하게 들을 수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풍성할까?”라고 탄식했습니다.
오늘날, 이 수많은 이단들은 도대체 왜 생겨난 것입니까? 바로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단을 연구하는 단체도 많고, 이단의 발생을 놓고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교회에서 참되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최근에 명성교회에 가서 부목사님 한 분을 뵙고 왔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찬송가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선물로 주셨는데, 여기 이 ‘이단 목록표’도 주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이 목록표가 꼭 필요했는데 말입니다. 이 목록표는 인터넷에 게재된 자료를 인쇄소로 가져가서 현수막처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목록표를 보고 그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왜 여기에 가장 큰 이단인 로마 천주교는 없을까요?” 이 목록표에 로마 천주교가 없는 이유는 분명히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엄청난 비난을 받기 싫거나, 아니면 천주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따, 예배 끝나고 이 목록표를 자세히 보십시오. 여기에 수록된 이 수많은 이단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밭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성경적 교리를 풍성하게 가르쳐서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 곳곳에서 마치 이 잡듯이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우리 영혼에 얼마나 풍성함과 부요함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지금보다 더 많이 힘쓰십시오.
좋은 신앙 서적을 많이 읽으십시오. 앞에서 언급했던 토저의 『갓 (GOD)』말고도 헤르만 바빙크의 『신론』, 이번에 부흥과개혁사에서 나온 아이작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Looking unto Jesus)』도 좋습니다. 좀 있으면(당시 2011년) 같은 출판사에서 스테반(스티븐)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최근에 출간 예정 목록에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스테반 차녹의 책이 가장 좋습니다.
이제, 소요리문답 제30문을 살펴봅시다. 소요리문답 제30문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까?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구원을 적용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면, 그 일은 절대로 그의 생각이나 의지를 따라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시체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상태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래서,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나올 생각을 하거나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 죽은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힘입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됩니다.
여러분, 100명이 똑같이 복음을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50명이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 택함 받은 50명은 성령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고 거듭나게 해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반면, 택함 받지 못한 50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성령님께서 하나님께로 이끌어주지 않으시므로, 복음을 들었어도 하나님 믿기를 거절합니다.
이런 일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납니다. 왜 똑같이 복음을 들었는데 몇몇만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까? 이런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믿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은 왜 그런 의지를 사용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왜 영생과 영벌 사이에서 영생을 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무엇이 그의 의지가 구원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의 타락한 마음입니다.
성령님께서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시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올 사람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안 가려고 악을 쓰며 버티는 이들 중에서 몇몇만 “너희는 내 것이니 이리로 와라.” 하시며 꽉 잡아 당신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너희는 내가 택하지 않았으니 너희 좋을 대로 해라.”라고 하시며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모두를 다 택하지 않으시고, 그중에 몇몇만 택하셨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그 뜻을 알 수는 없으나, 다만 그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알 수 없는 사실을 사람의 지혜로 설명하려고 하다가 나온 겁니다. 제가 볼 때, 아르미니우스는 처음부터 선택 교리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칼빈주의에 동의하는 것 같다가 나중에 돌아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만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은 소요리문답만이 아닌 대요리문답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구원은 성부, 성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성령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하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살펴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의 이 역사가 없다면,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주된 사역은 중생과 회개입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중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방언과 온갖 신비한 체험을 원할 때만 성령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까? 성령님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처럼, 한국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를 이상한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내게 하는 정도로만 여깁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령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까? 성령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달라는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해달라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 함께하시지, 신비한 것들을 구하는 자리에 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의 거짓 가르침이 하도 널리 퍼져 있다 보니, 많은 이들이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잘못 이해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마치 방언 기도를 하거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것,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을 마구 표출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그 밖의 다른 역사도 많이 행하십니다. 특별한 섭리로 성도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인도하십니다. 냉랭해지는 성도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도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일 안에서 행하십니다.
은사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컬주의자들도 성령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니, 교리 논쟁은 그만하고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는 일에 힘쓰자.” 그렇게 교회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지 말고 무조건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성령 하나님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한 사람이 죄와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고 떠나게 역사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죄를 미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방언이나 온갖 놀라운 체험을 앞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참으로 성령님 안에 있게 된다면,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죄를 미워하며 죄에서 떠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존귀하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선민(選民)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멸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참 감람나무 가지인 그들은 찍혀 나가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우리 이방인들이 대신 그 자리에 접붙여졌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입양되어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과 문화는 양자에 대한 개념이 약해서, 이 양자 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양자? 입양되는 거 말하는 거지?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구 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양자를 친자(親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양자는 양부모의 모든 권리와 지위와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한마디로, 양자가 되기 전에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그는 양부모의 자녀로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놀랍고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원히 벌 받을 죄인이 만왕의 왕의 자녀로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영화롭게 됩니다. 그때는 한순간에 우리의 모든 불순물이 싹 빠져나가 완전히 거룩하고 흠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완전히 영화롭게 됩니다. 부활의 몸을 입고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영화롭게 되는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이처럼,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는 참으로 성경을 탁월하게 해설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웁니다. 반면, 자유주의자와 현대주의자들은 구원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 천주교도들은 구원을 성령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은사주의자들과 교회연합주의자들은 성령님을 ‘은사’와 ‘무조건적인 화합’을 주시는 분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으라고 하는 교회,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분이시라고 가르치는 교회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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