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걸러내기」 EDM 논란으로 본 현대 찬양의 오류
– 진정한 찬양이란 무엇인가?
박지훈
▲ IVF 전국리더대회 EDM 공연 장면
출처: 유튜브 캡쳐
얼마 전 어떤 기독교 웹 사이트에 기사가 올라오면서 화제가 된 EDM을 알고 있는가?
아마 일반적인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그 말은 상당히 생소하게 다가올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본인 역시도 관련 기사를 접하면서 그 말을 처음 들었다. EDM이란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lectronic Dance Music)’의 약자로서, 주로 음악 지기(DJ)가 전자 음악 장비를 사용해서 연주하는 클럽 음악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한마디로 EDM은 ‘클럽용 춤곡’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생소하기만 한 이 음악이 이처럼 큰 논란을 몰고 온 것은, 모 선교 단체가 개최한 전국리더대회 개막식에서 EDM 찬양 공연을 무대에 올렸고, 그 공연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면서부터였다. 본인은 그 소식을 듣고 난 뒤, 해당 기독교 언론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그 기사를 읽어보았다. 읽어보니 그 기사는 주로 해당 공연을 한 EDM 음악가를 취재한 내용을 주된 내용으로 싣고 있었다. 다음은 그 기사 중에 가장 핵심적인 대목만 발췌한 부분이다. 이 대목에서 그가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가 잘 나타난다.
「교회에서 EDM을 하는 것에 대해 이질감을 느낀다고요? 오히려 EDM은 동시대적인 음악이에요. ‘교회 열심히 다니는’ 신실한 청소년과 청년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청소년, 청년들에게는 진짜 동시대적(contemporary)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돌 노래, 댄스 음악을 들어 보세요. 전부 EDM적 요소가 있어요. 흔히 말하는 발라드·밴드·포크에 익숙하고, EDM에는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느끼는 이질감인 거죠.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말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궁극적 관심에 이를 수 있느냐는 거라고 생각해요. EDM으로 찬양이 되느냐, 하나님 만날 수 있느냐는 거죠. 아직 부족한 점은 많지만 충분히 찬양으로 가능하다고 봐요. 무엇보다 저 자신 스스로 디제잉1 워십을 하면서 하나님께 경배감·경외감을 느끼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2
기사를 통해 나타난 그의 논지를 정리해보면 이와 같다.
– 교회가 이 시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동시대적(contemporary) 음악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 음악 장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어떤 음악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단지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편견을 넘어서야 한다).
– 음악의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음악이든 그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사실, 이런 논지는 별로 낯선 것이 아니다. 그동안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찬양을 옹호하는 이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들이다. 다른 점이라곤, EDM 찬양이 CCM보다 세속 음악을 더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 EDM 음악가가 제시한 논지는 CCM 옹호론자라면 적극적이든 암묵적이든 기본적으로 다 동의하는 내용이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부인하면, 결국 현대 세속 음악을 기꺼이 찬양에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과 대의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한번 생각해보라. 교회가 찬양에 쓰일 음악을 건전한 신학적 기준을 따라 구분하는데, 어떻게 세속 음악이 무분별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처럼 저들의 주장에 깔린 핵심 전제는 “모든 음악은 다 훌륭한 찬양의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찬양 음악에 어떤 제한이나 구분을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을 “편견을 가지지 말라.” 또는 “당신이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말로 표현하면, 이러한 주장은 더욱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저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CCM의 영역을 넓히려는 저들의 주장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들의 논지는 성경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지금부터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CCM의 오류
사실 음악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므로, 어떤 음악의 용도나 적합성을 따지는 일에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CCM 옹호론자가 제시하는 논지에 설득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음악이 엄연히 인간의 창작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창작물은 원작자의 창작 의도에 따라 저마다 고유한 목적과 용도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음악 역시도, 당연히 지은이가 의도한 고유한 목적과 용도가 장르마다 존재하게 되어 있다.
EDM도 마찬가지다. EDM은 그 이름(Electronic Dance Music)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본질은 ‘전자 춤곡’이다. 그러므로 EDM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흥을 돋우고 흥분 상태를 조장하여서, 사람들로 춤을 추게 하는 감각적인 요소와 기법이 주로 사용되는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없으면 EDM이 될 수 없다. EDM이 만들어지고 연주되는 근본 목적과 이유는 그와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과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은 찬양이 영적인 노래여야 한다고 가르쳐준다(엡 5:19). 육신적 감각을 자극하여 흥을 돋우고, 그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뛰노는 노래가 과연 영적인 노래일 수가 있을까? 이처럼, EDM은 이미 창작 목적에서부터 영적인 노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격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정말 부끄러운 사실은, 오히려 이방 종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본인은 지금껏 신나는 클럽 음악이나 귀를 찢는 듯한 헤비메탈 가락이 울려 퍼지는 모스크나 불교 사원 혹은 천주교 성당을 본 적이 없다. 이방 종교조차도 어떤 음악이 자신의 종교적 목적과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본성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분별이 없는 이방 종교조차 그러할진대,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세속 음악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는 말인가?
혹시 ‘아, 우리 교회는 EDM을 안 하니까 괜찮아. 이 문제는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EDM과 CCM은 본질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CCM은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서, 번역하면 ‘동시대적 기독교 음악’이다(‘동시대적’이라는 말은 앞서 나온 EDM 음악가의 말에서도 중요한 논거로 언급되었다). 여기서 ‘동시대적 음악’이란 결국 ‘대중음악’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 대중이 향유하는 음악이 바로 ‘동시대적 음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CCM은 대중음악에 ‘기독교적인 가사’를 덧입혀 부르는 찬송인 것이다. 그러나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이 즐기는 음악이다. 대중음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의 육적인 기쁨을 충족시켜주고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반면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영적인 노래이다. 이처럼 대중음악과 찬송은 전혀 다른 두 대상(세상 사람,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지는 음악인 것이다.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올림픽 경기에서 나가서 금메달을 따낸 우리나라 선수의 시상식이 열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어떤 선수가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잊은 듯한 밝은 얼굴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국민들은 마치 그 일이 자기 일인 양 함께 기뻐하고 뿌듯해 한다.
그때, 시상식 진행자가 기뻐하고 있는 선수의 목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메달을 걸어주고, 그 선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 메달을 입으로 가져가서 살짝 깨물어 본다. 그러고는 자기 가슴에 오른손을 살며시 가져다 얹으면서 왈칵 쏟아져 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는다. 이윽고 태극기가 힘차게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순간, 진행자의 실수(혹은 의도)로 인해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주최 측에서 둘 다 국가이니 뭐 어떠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분명히 다들 미쳤다고 하면서 분노에 치를 떨 것이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그런 주최 측의 태도를 우리나라를 희롱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일개 나라를 기리는 노래도 그러한데, 하물며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신령한 노래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대상 25:3). 그런 분을 기리는 찬양은 마땅히 그에 합당한 품격과 기법으로 만들어지고, 또 정성스럽게 다듬어서 사용해야 한다. 다 같은 노래이니 어떻게 해도 괜찮다는 식의 생각은 그분을 조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조롱받는 분이 아니시므로, 그런 일을 하는 이는 결국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갈 6:7).
우리는 CCM 옹호론자의 논리가 성경이 아닌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컬 신학, 그리고 감상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위의 EDM 음악가도 역시 자유주의에 가까운 신학자 폴 틸리히의 주장을 논거로 사용하고 있으며, 막연한 자기 생각과 감정에 기준을 두고 신앙생활 하고 있음을 기꺼이 시인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의 근본 문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그 가르침에 자기 생각과 경험을 맞추어 교정하는 대신, 거꾸로 자기 생각과 경험에 성경을 억지로 꿰맞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과 경험에 불과한 것들을 마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양 오도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과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모욕하는 악독한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찬양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적 본성을 만족하게 하는 바탕에서 태어나는 잘못된 찬양 음악에서 철저히 떠나고 멀어져야 한다. 또한, 진정한 찬양이 무엇인지 오직 성경에서 그 근거를 이성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찬양이란 무엇인가? 우선, 찬양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찬양’이라는 단어는 기릴 찬(讚)에 오를 양(揚)이라는 한자를 조합한 단어이다. 즉, 찬양이란 ‘하나님을 기리고 높이기 위한 노래’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기리기 위한 목적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한다. 찬양에서는 사람의 육적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마 5:48).
그렇다면 성경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참된 찬양의 조건으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첫째, 찬양은 영적인 노래여야 한다(엡 5:19).
‘영적’이라는 말은 ‘육적’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대조된다. 물론, 성경은 육신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의미의 ‘육적인 것’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요 6:63).”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노래에 일부 영적인 요소가 있으면, 나머지 부분은 조금 육적이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온전히 영적인 노래를 부르라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CCM 사역자가 인정하듯이, CCM은 동시대의 대중음악 기법을 차용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기법들에는 인간의 정욕을 자극하고 감정만 잔뜩 끌어 올리려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참된 찬양은 그런 육신적인 요소와 기법을 완전한 배제한 영적이고 거룩한 노래여야 한다.
둘째, 찬양은 질서가 있는 노래여야 한다(고전 14:40).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말씀은 비록 찬양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말씀은 분명히 “모든 것을”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찬양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찬양은 단정하고 조화로운 내적 질서를 갖추고 있는 노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엄숙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한다.
난잡하다고 할 정도의 현란한 기교, 불규칙한 박자, 본래의 형식과 내용의 왜곡, 정신을 놓고 뛰어놀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형태의 노래를 찬양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찬송은 부르면 부를수록 질서와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더욱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노래여야 한다.
셋째, 찬양은 전인격으로 부르는 노래여야 한다(엡 5:19; 요 4:22-24; 시 47:7).
여기에서 근거 구절로 제시한 에베소서 5장 19절은, 찬양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위 구절의 ‘마음’이라는 단어는 주로 사람의 전인격을 표현할 때 쓰이는 용어로서, ‘진심을 다해’, 혹은 ‘감상에 푹 잠긴 채로’ 찬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3 사람의 전인격은 지성, 감정, 의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의 참 의미는 찬양에는 풍부한 지성, 진실한 감정, 순전한 의지가 함께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도 CCM은 찬양으로 부적합하다. CCM은 지성, 감정, 의지적 측면 모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지성은 거의 완전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CCM을 제대로 부르려면, 많은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느끼고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제대로 된 CCM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지성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요한복음 4장 22-24절에서 우리는, 찬양이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묵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편 47편 7절은 우리가 ‘마스길’, 즉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사실, 이런 사실은 굳이 특정 구절을 예로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운 지식으로 가득한 지식의 보물 창고이다. 그러나 CCM은 이러한 놀라운 지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세상 사람의 기호에 휘둘린 CCM의 가사가 어떠한지 한번 유심히 살펴보라. 저속하고 유치하며 심각할 정도로 경박스러운 데다가 쓸데없는 반복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심지어는 잘못된 지식을 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지성만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찬양으로 부른다고 해도, 그냥 무미건조한 지식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9, 20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전인격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찬양 음악은 위와 같은 요건을 충분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만들어지는 대중음악은 이러한 찬양의 기본 요건을 본질상 갖추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올바른 대안은 무엇인가? 이제껏 수많은 기독 음악가가 참으로 위대한 찬송을 많이 작곡해왔다. 그들이 물려준 찬송 역시도 참 훌륭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 만한 찬송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찬송으로 만든 시편 찬송이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가사를 쓴다 한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가사를 쓸 수 있겠는가?
또한, 여러 종류의 시편 찬송들 가운데 가장 추천할 만한 시편 찬송은 역시 1500년대에 제네바에서 칼빈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제네바 시편 찬송가 (Genevan Psalter)』이다. 이 시편 찬송가는 시편 말씀을 그대로 가사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가락도 바른 신학에 근거하여 만들고 다듬어졌다. 그래서 곡조가 꾸밈이 없고 소박하고 정갈하며 절제되어 있어서 예배용 찬송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CCM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시편 찬송은 무척 어색하고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필자 역시도 시편 찬송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생소하고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감상적인 음악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찬양에 얼마나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지를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시편 찬송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좀 더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편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고, 하나님을 참되게 높이는 거룩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잘못된 찬양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CCM을 비롯한 현대 찬양 음악 대부분은 장차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의 흐름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교훈과 하나님의 뜻에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가고 있다. 처음에는 손뼉을 치며 찬양하는 형태부터 시작해, 기타나 드럼같이 흥을 돋우는 데 더 효과가 큰 악기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더니, 심지어 이제는 EDM과 같은 클럽 음악이 버젓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려고 하고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흐름이 교회를 어디로 이끌어가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선하는 죄인의 교만한 본성과 더불어, 그러한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통해 거룩한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려는 마귀의 교묘한 술책이 깔려 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비성경적인 신학 위에 세워진 거짓 찬양의 미혹을 주의하도록 하자. 본인 역시도 CCM의 미혹에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미혹이 얼마나 교묘하고, 그 교묘한 미혹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음악을 통해 충족되던 자기의 육적인 욕망을 부인하고 돌아서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타락한 감정과 기호를 계속 따라가면서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를 것을 명령하셨다(마 16:2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된다면, 우리 자신의 감정과 기호 역시도 기꺼이 미워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눅 14:26; 요 12:25).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 중에 아직 이러한 미혹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교묘한 속임수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찬양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따라 모든 잘못된 것을 멀리하고 악한 자들을 대적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각주
1 전자 음악 장비로 EDM 등을 연주하는 행위
2 ”여기가 ‘교회’야 ‘클럽’이야?” 뉴스앤조이, 2015.07.21.
3 마틴 로이드존스, 『성경적 찬양 (Singing to the Lord)』, 이태복 옮김, 지평서원, 2009, p. 69에서 참고함.
(※ 한 주간 1 명, 총 3,034이 읽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시편찬양은 어떤건가요??
제네바 시편 찬송가를 말합니다. 다음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시면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네바 시편 찬송가 듣기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ccm 프로듀서를 꿈꾸는 학생입니다 긁을 읽다보니 작성님께서는 거룩하고 엄숙하게 제작의도를 갖춘 찬양이 찬양이라는 점에서 조금 이해되지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시지만 성경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것은 엄숙한 찬양을 통해서 한게 아닌거같아서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신약과 구약는 구속사적으로 동일하지만, 예배의 외적 형태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예배의 한 형태가 존재한다고 신약에 그대로 적용하는 일은 무리가 있습니다.
즉, 다윗이 이러저러하게 했으니 우리도 해도 된다라는 결론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춤을 춘 일도 구약의 제사 의식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음악은 그안에 고유한 형식과 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힌두교 명상 음악에 찬송 가사를 붙혀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엄청나게 어색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인의 정서와 감성, 문화에 맞춘 노래에 하나님 찬송하는 가사를 붙혀 몸을 흔들며 찬송하는 일도 엄청나게 어색하다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