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시민운동 진단2」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시민운동1 참여 방법은 무엇인가
박지훈
▲ 고고회파 기도서 낭독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의 모습
들어가면서
최근, 우리나라는 격렬한 이념 대립으로 큰 혼란에 빠져있다. 국가관, 역사관 등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양 진영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부 교회가 시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일은 ‘교회가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가?’라는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교회의 시민운동 참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기관인 교회가 이 세상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시민운동이라는 방식 자체도 거룩한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반해, 찬성하는 사람들은 지상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사역을 훼방하는 사회 문제에 한해서는 교회도 관여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양쪽 진영의 주장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심각한 변형과 해를 끼치는 문제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후자의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이 세상일에 휘말려서 복음 전파라는 본질을 내팽개치거나, 진리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세상의 궤계를 수수방관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이들의 활동을 영적인 차원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은 참으로 정당하며 필요하다. 사도 바울도 진리를 변호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려고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황제에게 항소하지 않았던가(행 23:11; 25:11)?
그러나 오늘날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대부분 이러한 영적인 원리보다는 세속 사상이나 이념을 따르고 있다. 영원한 천국이 아닌 윤리, 도덕적인 업적 성취에 소망을 두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른다. 민중 신학, 여성 신학, 흑인 신학 등을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해방하는 혁명가 예수를 믿는다.
다시 말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좌익 이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좋은 명분과 목표를 앞세우더라도, 우리 죄를 대속하신 성경의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 복음’이라는 거짓 복음 위에 세워진 가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문제가 복음 전파 및 진리 수호의 문제와 직결되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면서 판단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서고 무너지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교회는 나서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본래 사명을 저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 문제가 진리를 얼마만큼 훼손하는지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잘못된 잣대를 사용하면,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문제를 진리와 직결된 문제라고 오판하게 된다. 교회가 직접 뛰어들 만큼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데도 직접적인 저항 운동에 나서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잣대로 사용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실제 역사 속에서 성경을 가장 온전하고 공정하게 해석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위협보다도, 그릇된 신학이 훨씬 더 진리를 위협하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교회사에 나타난 모범 사례
그렇다면 교회가 진리 수호 차원에서 세상의 중대한 위협에 맞서 시민운동과 같은 일을 벌인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경에는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라고 가르칠 뿐이다(롬 13:1~6). 물론, 이 말씀은 권세자가 어떤 요구를 해도 다 들어줘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권세자의 요구가 하나님의 계명에 반(反)하지 않는다면, 성도는 마땅히 그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뜻이다(행 5:29).
실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당한 황제 숭배 요구를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통치자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그에게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으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롬 13:1). 그러므로 권세자가 성도에게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면, 신자는 그 요구를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 그런 불복종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롬 13:3). 그 불복종은 모든 권세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하려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불복종은 권세자와 교회가 서로 불화하는 일을 가져온다. 간혹, 권세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물러서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치열한 힘겨루기를 하면서 승자와 패자가 갈릴 때까지 다투기 마련이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는 초대 교회의 황제 숭배 거부를 용인하지 않고 기독교를 맹렬하게 핍박했다. 초대 교회도 거센 박해에 무릎 꿇지 않고 황제 숭배를 계속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했지만, 초대 교회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으며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불화가 시작되고 약 300년이 지난 뒤, 로마 황제는 한 발 물러서는 것도 모자라 아예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개조해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아무리 악한 통치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권세를 곧바로 거두어가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교회를 연단하고 성도의 신앙을 정결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악한 권세자와 맞서게 될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계획을 바라보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허락하셨던 권세를 그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적당한 때에 거두어 가실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 고대 사회와는 다르게, 현대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권세자의 권한을 다양한 측면에서 합법적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는 권세자가 부당한 권한을 행사하려고 할 때, 그 일을 반대하며 저지할 수 있는 정당한 수단과 장치가 존재한다. 이 사실은 현대 교회가 고대 교회에 비해 큰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악한 권세자가 부당한 요구를 할 때, 그 요구를 거부하고 순교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 성도에게는 권세자의 잘못된 요구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와 장치가 주어져 있다. 이를 잘 사용하여 합법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교회와 성도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순교는 성도가 이 땅에서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진리 수호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권세자에게 적절하게 대항한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사례가 있다. 고교회파 성공회 신자였던 찰스 1세는 1625년에 영국 왕이 되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신앙을 화해시키는 정책을 폈다. 청교도를 맹렬하게 핍박한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으며, 1637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영국 성공회에 편입시킬 목적으로 왕이 임명한 주교를 파견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파견된 주교는 교회 안에서 성공회 기도서를 낭독하면서 사람들의 신앙을 바꾸어놓으려고 했다. 더구나 스코틀랜드 교회에 적용하려던 기도서는 잉글랜드에서 사용하는 기도서보다도 고교회파 색채가 더 짙었는데, 이는 교회 통합을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2
이러한 진리와 신앙 양심에 대한 왕의 부당한 탄압에 대해,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격분했다. 존 녹스의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교인들은 정통 장로교 교리를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면서 자랐다. 그런 이들에게 영국 왕의 시도는 타락한 로마 카톨릭 신앙으로 되돌아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같은 해 7월 23일에 성 자일스 교회에서 성공회 기도서를 낭독하던 에든버러 주임 사제에게 의자가 날아드는 일이 일어났다. 제니 게디스라는 여인이 고교회파 색채가 짙은 기도서를 듣다못해 사제에게 의자를 집어 던진 것이었다. 그 일을 신호탄 삼아 모든 회중이 일제히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고, 그 사제는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황급히 교회를 떠나갔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어지자, 스코틀랜드의 유력자들은 장로교 교리와 예배 양식을 지키려는 성도의 마음을 모아 「국가 언약(The Scottish National Covenant)」이라는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어떤 이들은 생명을 바쳐 진리를 지키겠다면서 피로 서명하기도 했다.
‘국가 언약’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큰 지지를 받았으며,3 그해 10월에 열린 스코틀랜드 총회는 이 ‘국가 언약’을 굳게 지키기로 결의했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가 보낼 진압군에 대비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찰스 1세가 실제로 진압군을 보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주교 전쟁(Bishops’ Wars)으로 불리는 이 전쟁의 승자는 스코틀랜드였다. 전쟁에서 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성공회로 편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 교회 역사 속에도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를 병합한 일본 제국은 1930년대 중반부터 그 지배를 영속화하려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정책을 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사를 참배하고 천황을 숭배하는 의식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전 국민이 어쩔 수 없이 이 의식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반대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제국은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닌 단순한 국가 의례에 불과하다면서 교회를 압박했다. 교회는 일제의 집요한 강압과 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무너져 내렸다.
1938년 2월에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강하던 평북 노회가 신사참배를 승인하자, 한국 교회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해 9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차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승인됨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가 우상에게 무릎 꿇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가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어떻게 신사참배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다룬 「장로교 언약 문서」를 작성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토대로 작성된 이 문서는 “스코틀랜드 언약파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신사참배와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자들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성경적 교훈을 기초로 장로교 언약 문서를 작성하였다.”4라고 작성 이유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즉, 목숨 바쳐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 언약도의 전례를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문서에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고,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은 사역자는 예배를 인도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박영창 등은 신사참배 강요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본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진정서를 일본 의회 단상에 투척하면서 항의하기도 했다.5
이들 외에 몇몇 목사와 선교사도 일본인 관료를 통해 합법적인 방식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평양 신학교 학생들은 평북 노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을 때 극렬하게 항의했다. 한국 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寤)의 신앙으로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옥사했으며, 그가 목회했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교인도 목회자와 뜻을 함께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았다.
이 사례 외에도 종교개혁과 청교도 혁명과 같이, 교회가 진리를 정면으로 대항하는 악한 무리에 맞서 현대의 시민운동과 비슷한 방식을 채택하여 저항한 사례는 매우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훼손하는 세력이 일어날 때,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러한 교회사의 모범 사례를 참고해서 그들을 적절하게 대적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교회사의 모범 사례를 잘 계승하고 본받기 위한 전제조건 두 가지
교회사에 나타난 이 좋은 모범을 잘 본받으려면, 우선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참된 신학과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둘째, 정통 신학에 기초해 세속 이념과 사상을 잘 분별하고 파악해 놓아야 한다.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사역으로 설립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정통 개혁주의 신앙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찰스 1세가 주교 제도를 도입하고 성공회 기도서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모든 스코틀랜드 교인이 로마 카톨릭 신앙으로 돌아가기 위한 디딤돌이 놓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앞서 언급했던 제니 게디스는 “이 부정하고 사악한 로마 카톨릭의 사제여, 어찌 감히 내 앞에서 더러운 미사를 올리겠다는 것인가?”라고 외치면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던 고령의 여인이었던 그녀를 따라 온 회중이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가 얼마나 탄탄한 교리적 지식과 신앙 위에 서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도 장로교, 그중에서도 보수 신학을 추구하던 이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주기철 목사는 개혁주의 신조를 따라 목회하는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배우며 자랐다. 한부선 선교사의 「장로교 언약 문서」도 철저하게 정통 장로교리와 신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사참배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해외 선교부도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처럼 보수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김양선 목사는 『한국 기독교사 연구(韓國基督敎史硏究)』라는 책에서 “보수 진영이 붕괴되매… 자유주의 신학 내지 일제의 탄압에 따르는 일종의 변질된 신학 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다”라고 쓰기도 했다.6 이는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 신학에서 벗어난 변질된 신학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실제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교단별로 분류해보면 장로교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당시 장로교의 교세가 가장 컸다는 사실과 함께 오직 성경에 근거한 정통 신학이 올바른 신앙 양심 형성과 실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교회 역사는 우리에게 정통 신학이 교회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정통 신학이 교회 안에 견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면, 교회는 외부의 위협이 다가올 때 강하게 대항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게 된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한국 교회는 자유주의 성경 주석서인 『아빙돈 단권 주석』이 크게 인기를 끌 정도로 정통 신학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거센 위협이 닥쳐오자, 수많은 목회자가 교회의 생존을 명분 삼아 진리를 타협하는 길로 나가고 말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그나마 타협하기라도 했지, 이제는 아예 진리를 위협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면서 협력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모범이 있다고 해도, 그 모범을 제대로 본받을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큰 신앙의 위협이 다가온다면, 한국 교회는 또다시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깊이 슬퍼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도 참된 신학과 신앙의 토대를 비교적 잘 닦아놓은 교회도 적게나마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정통 신학에 근거하여, 어떤 이념과 사상이 진리와 가깝고 교회에 유익한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이런 일은 한국 교회에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건국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핍박하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살펴보면, 양상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근본적인 성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북한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에서는 심한 이념 대립과 갈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도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좌우 이념의 뿌리와 열매를 두루 살펴보면서, 특정 사상이 교회를 대적하고 파괴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좌우 이념은 무엇이며, 그 열매는 어떠할까? 먼저, 좌익 사상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좌익 사상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치사상의 경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좌파’라고도 하며 ‘우익(우파)’과 대립되는 말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안정보다는 변화, 성장보다는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 정치사상이나 정치세력을 가리킨다.」7
좌익 사상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지만, 근본 토대는 무신론과 인본주의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동성애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낙태 옹호 등의 반(反) 성경적인 사상이 모두 이 좌익 이념에서 나왔다. 좌익 이념이 결실한 공산주의는 역사상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파괴하고 대적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올바른 교회와 성도를 “사랑이 없고 판단하는 자”로 낙인찍은 것도 바로 좌익 계열 사상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특성상, 좌익 사상은 북한이 대남 공작을 벌이는 교두보 역할도 한다.
기독교 역사가 깊은 서구 사회에서조차도, 좌익 사상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자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크게 침해당했다. 동성애 비판을 원천적으로 막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으며, 동성애를 성경 말씀대로 죄라고 가르치거나 동성 결혼 주례를 거부한 목사에게는 엄청난 벌금을 물렸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도 짧을 뿐더러,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공산 독재 세력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좌익 이념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면, 한국 교회가 맞게 될 재난은 서구 교회가 겪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좌익 계열의 사상에서 말하는 분배와 평등은 일부 빈곤층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그 약간의 유익은 사회가 발전하는 기반을 무너뜨려서 온 국민의 생활 수준을 하향 평준화하는 심각한 역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좌익 사상이 어떤 측면에서도 유익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반면, 우익 사상을 대표하는 자본주의와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종교개혁, 특히 청교도의 경건하고 성실한 삶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물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영국 왕과 성공회의 폭압을 신앙으로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이다. 자본주의도 개신교도의 경건하고 검소한 삶으로 인해 자본이 대거 축적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우익 사상은 기본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비롯하여 경제, 정치,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준다. 그러므로 우익 사상에 기초해 건국한 나라에서는 교회가 마음껏 성경 말씀대로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우익 사상도 극단으로 흐르면 전체주의로 변해서 교회에 직접적인 해를 줄 수 있다. 혹은, 지나친 세속주의가 힘을 얻어 교회가 스스로 타락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우익 사상도 성경 말씀처럼 완전한 사상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은, 건전한 우익 이념을 채택한 국가에서는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번성했으며, 교회가 번성하는 나라에서는 꼭 우익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측면에서 볼 때, 우익 사상은 기독교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회와 함께 번성하고 쇠락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기본적으로 우익 사상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교회를 가장 참혹하게 파괴하는 김 씨 공산 왕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상 이 문제는 단순한 이념,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빛과 어둠이 싸우는 영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성도라면 마땅히 가장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 자손도 계속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번성할 수 있는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딤전 2:2).
교회는 이러한 토대 위에 서 있으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심각하게 진리를 훼방하는 세력이 나타났을 때,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보여준 좋은 모범과 같이 그들을 대적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의 모범을 본받아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진리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세력이 나타났을 때,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좋은 모습을 잘 계승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굳게 믿고 의뢰해야 한다. 이는 교회와 성도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만 따르기 위함이다. 큰 위기 상황이 찾아오면 사람은 당장 눈앞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게 되기 쉽다. 악한 세력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면, 폭력적인 방식도 용인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주권과 계획에 따라 악인의 득세를 허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무조건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말씀만 따르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끝까지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분의 교회를 돌아보시며 그 믿음에 응답하신다.
둘째,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악한 세력의 정체를 널리 알리고 그들을 저지하는 데 힘써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한다. 이 권리가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오용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보장된 이 권리를 유독 교회와 성도만 사용하면 안 될 이유는 없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활동이 전적으로 합법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당한 공격에 반대하는 집회를 합법적인 형태로 열고, 총회와 같은 교회 연합체의 이름으로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교회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이기도 하며,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본래 사명이기도 하다.
셋째, 교회를 더 이롭게 하는 편에 서서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교회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정당에 대책을 마련하기를 촉구하면서 당사를 방문하거나, 선거가 있다면 악한 세력을 가장 잘 저지할 만한 공약을 제시한 정치인과 정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를 극심하게 대적하는 북한을 옹호하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세력에 표를 던지는 일이 없게 주의해야 한다.
넷째,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을 향해 전 국민적인 반대와 결사항전의 의지가 일어난다면, 교회와 성도도 기꺼이 그들과 함께 무기를 잡고 싸워야 한다. 성경에서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악한 여왕 아달랴를 제거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교회사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가 대표적이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는 로마 카톨릭 신앙의 옹호자인 메리 여왕에 맞서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도 로마 카톨릭 신앙을 믿는 프랑스-인디언 연합 세력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휫필드, 에드워즈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영국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말은, 교회가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과 통치자를 심판하시려고 그분의 교회를 싸우도록 섭리하신 경우가 꽤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은 교회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다소 특수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이 네 가지 사실을 유념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면, 반성경적 세력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여 교회를 위협하는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좋은 모범을 잘 계승하고 본받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맺으면서
이 글은 우리나라 교회가 현재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간략하게 쓴 글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방법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암울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되, 복음 전파와 불신자들의 영혼 구원 문제가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그런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진리를 대적하는 자의 영혼도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다.
진리에 속한 믿음의 사람들이여! 항상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히 행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말자.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합당한 삶은 바로 그런 삶이다.
각주
1 시민운동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정치, 이념의 영역에서 교회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반대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복있는 사람, 2015, p. 257.
3 이때, ‘국가 언약’에 서명한 이들은 “언약도(covenante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4 신종철, 『신학적 입장에서 본 장로교회사』, 도서출판 그리심, 2012, p. 387에서 재인용.
5 위의 책, p. 394.
6 위의 책, p. 395에서 재인용.
7 [네이버 지식백과] 좌익 [left, 左翼] (두산백과)
「시민운동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시민운동 진단2」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시민운동 참여 방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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