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5) 하나님의 선택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0문, 선택 교리에 대해서 설교하겠습니다. 선택 교리는 예정 교리와 함께 가장 많은 오해와 미움을 받는 교리입니다. 오늘날, 이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를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택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교리이며,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실질적인 유익이 많은 교리입니다. 교회는 이 귀한 교리를 충분하게 가르치고 설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한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정말 큰 잘못이며 실수입니다.
선택 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누군가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이 세상이 아무리 죄와 불경건함으로 가득해도,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누군가가 항상 존재합니다. 비록, 그가 지금은 온갖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그를 돌이키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때와 방법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크게 죄를 짓고 괴로워하다가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다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겠다고 분노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잔혹한 핍박을 가하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려고 선택하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그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되찾으시고 사도 바울, 곧 신약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택하신 이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극적인 방식으로 돌아온 이를 부러워할 필요도, 별다른 일 없이 조용하게 부르셨다고 해서 불안해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그 때와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와 방법을 그에 맞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선택은 누구 안에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하신 대표자, 즉 둘째 아담이시며 우리의 대속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 30절은 지금껏 말한 내용을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줍니다. 29절 초반부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알려줍니다. 이 말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아가 이 세상이 지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누구이며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이 어떠한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했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우리를 잘 알고 계셨으며, 그분의 생각과 뜻대로 계속 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되는 대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이들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한 자들’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우리 마음에서는 썩어 냄새나는 것밖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지어지기도 전에 그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런 무능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가엾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혀 새사람이 되게 해야겠다고 뜻을 미리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열심히 드렸다거나 헌금을 많이 냈다거나 교회를 잘 다녔다고 해서 우리를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과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고 어리석은 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창 8:21).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자격도 능력도 없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가엾게 여기셨고,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 주님의 형상을 닮은,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선한 뜻을 창세 전에 홀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전 오전 예배 때도 얘기했지만, 엄청나게 흉악한 죄를 짓고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천국에 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면서 무슨 선한 일을 했습니까? 그들에게 무언가 내세울 만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들을 그분의 나라에 들일 선한 뜻을 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선하고 일방적인 뜻이 그를 멸망에서 건져내어 영생으로 인도한 것이지, 그가 많은 선행으로 공덕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게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공로, 즉 자기 의(義)와 선행을 배격해야 합니다. 만약,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국이 공로를 쌓아 가는 곳이라면,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선을 행해야 할까요? 아니,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그 기준을 자기중심적으로 설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로주의를 말하는 순간, 사람은 각자 좋게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기준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저는 길을 가다 누가 버린 쓰레기를 깨끗하게 치웠으니 구원받을 만하겠지요.”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저는 물에 빠진 사람을 많이 구해줬기에 구원받을 만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공로주의는 ‘이만 하면…….’이라는 기준을 그 마음에 품게 합니다. 입 밖으로 그 기준을 말할 수도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각자 마음에 설정한 나름의 기준선을 아주 갖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어떤 선행이나 공로도 행하기 전, 곧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가르쳐줍니다. 무한한 영광 가운데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만 계셨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 사람의 무엇이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구원받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의롭게’ 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택하신 이들을 적절한 때가 되면 그분에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어머니 배 속에 있었을 때는 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십자가에 달려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때가 되면 택하신 자를 그리스도께로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성화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날마다 새로워지고 온전해지면서 더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을 말합니다.
한편, 영화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부활의 몸을 입고 모든 죄와 허물을 한순간에 완전히 벗어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흠이나 티가 없는, 지극히 정결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계속 성화 되는 가운데, 장차 영화롭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안에 있는 죄성은 순간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한 애착에 얽매여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성화는 바로 그런 옛사람에 얽매이지 않도록 힘껏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옛사람과 힘써 싸우는 게 아니라 처음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늘의 천사처럼 흠 없고 순결한 존재로 변화합니다. 그들은 죄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입으셨던 것과 같이 빛나는 흰옷을 입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다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복락이 누구 안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소망과 은혜는 모두 다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선택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이처럼,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참으로 영광스러운 교리이며, 연약한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선택의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그건 칼빈이 만들어낸 가르침인데 왜 그걸 믿느냐? 우리는 사람의 교훈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라고 얘기합니다. 선택의 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들으면 “어, 정말 그렇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껏 살펴보셨듯이, 그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선택의 교리는 지극히 하나님 중심적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칼빈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정리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선택의 교리는 유독 칼빈만 가르친, 그만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교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내용을 가르치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자기 철학과 사상을 따라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낸 게 전혀 아닙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나 진보적인 개신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는 정말로 사람의 지혜와 사상을 따라 새로 만들어낸 인간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종교 다원주의, 에큐메니칼주의, 여성 신학, 교황주의 등은 명백하게 사람이 자기 지혜로 만들어낸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딛고 있는 근거와 토대를 계속 추적해나가면, 결국에는 성경이 아닌 세속적 사고방식과 철학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의 교리는 정반대입니다. 계속 추적하면 할수록, 도저히 타락한 사람의 생각에서는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고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교리가 대표적인 칼빈주의 교리로 불리는 이유는 칼빈이 그 내용을 가장 체계적이고 훌륭하게 정리해서 그런 것이지, 그가 이 교리를 창안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으로 많이 받는 오해는 선택의 교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선택의 교리를 말해주면 종종 “저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선택의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은 그런 점을 빌미로 삼아, 이 교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악한 가르침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선택의 교리가 전제하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한 자기 마음을 따라 행하기 좋아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나아갈 뿐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창세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실 뜻과 계획을 홀로 세우시고, 그냥 내버려 두면 멸망할 뿐인 그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지 않으시면, 누구도 그분을 찾고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요 6:44). 즉,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과 의지를 갖게 되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를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 나오는 사람을 거절하고 쫓아내는 법이 전혀 없으십니다(요 6:37). 누군가 주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 저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안 된다. 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이니 받아줄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하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택의 교리는 누군가 주님을 찾고 그분을 영접하게 되는 일이 타락하고 한계가 있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한 일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그 일은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뜻과 계획에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가르침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그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자기 믿음과 구원이 참으로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유일한 토대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모하는 이들은 안심하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이미 창세 전부터 선택하셔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실 뜻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주일에 세례식을 행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증해주는 하나님의 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그 사실을 모두에게 확증해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더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의 무엇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선택 교리에 대해 많이 오해하는 부분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이 교리가 사람이 멸망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악한 가르침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하는 점은, 하나님께는 타락한 심령으로 멸망하는 이들을 반드시 구해주어야만 하는 어떤 의무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선의로 그들을 건져주시는 일은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분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누구는 사면하여 감옥에서 꺼내주고, 누구는 감옥에서 계속 죗값을 치르게 내버려 둔다고 해서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셨지만, 다른 누군가는 내버려 두어 멸망에 이르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그분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에게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 않으셔서 내가 영벌을 받게 되었다.”라고 핑계 대며 자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백이면 백,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 악행과 부패를 사랑한 죄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마땅히 베풀었어야 했던 무엇을 베풀지 않은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고한 사람을 지옥에 던져 넣으시지 않고, 불의한 죄인을 던져 넣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땅히 행하셔야 하는 공의를 행하신 것뿐입니다.
여러분, 천국 백성은 날마다 “제가 주님의 은혜와 선택하심으로 이 천국에 왔습니다.”라고 찬송하고, 지옥 백성은 항상 “내 죄 때문에 이 지옥에 왔습니다.”라고 울부짖는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 얘기는 신학적으로도 정말 잘 맞는 얘기입니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날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오직 자기 죄 때문에 멸망할 따름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은 우리들도 ‘아, 나는 참으로 구원받을 만했지. 나는 정말 잘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야.’라고 착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참된 성도는 자기의 무능력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으로 겸손하며 진실한 인내와 순종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어나갑니다.
성숙한 성도일수록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자기 의지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 믿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스물네 명의 장로가 자기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계 4:10). 반대로, 죄로 멸망한 부자가 지옥에서 한없이 괴로워하면서, 남은 가족만이라도 자기처럼 살다가 이곳에 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눅 16:23~28).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궁극적인 모습이 어떠한지를 참으로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선택 교리를 오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선택 교리는 주님 안에 있는 성도를 가장 안심하게 해주는 교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좀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세상 사람처럼 두려워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는 목회자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평소에 목회자가 선택 교리를 올바르게 가르쳐서 신자가 참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 물러서기만 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교인에게 진리를 증거하지 않고 세속적인 재미와 즐거움으로 가득한 쓸모없는 얘기만 하니, 교인들이 무슨 수로 그 마음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을 떨쳐내겠습니까?
여러분, 목회자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임종을 맞는 성도에게 참된 확신과 평안을 주는 일입니다. 목회자는 죽음을 앞둔 성도의 손을 잡고 “이제 영원한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테니 안심하십시오.”라고 위로하며 기도해주고,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목회자가 되면 안 됩니다. 만약, 목회자가 죽어가는 성도에게 참된 위로와 확신을 주기는커녕, “글쎄요, 돌아가신 뒤에 어디로 가게 되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충격을 받고 더 일찍 돌아가지 않으시면 정말 다행일 것입니다.
여러분, 천주교인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을 때 꼭 종부성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종부성사를 받으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죽어서 어디로 가게 될지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밀려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평안함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종부성사 받았다고 꼭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럴 가능성을 조금 더 높여줄 뿐입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종부성사를 받고 그 효력을 의지하려는 천주교인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합니까?
이방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설 때, 자기가 어디에 이르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보증해주는 이방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는 사람처럼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가는 이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됩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임종을 앞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꼭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꼭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가 복음의 위로와 소망 가운데 평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복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많은 재물이나 맛있는 음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영생,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천로역정』의 끝부분을 읽어보십시오. 그 대목에서 크리스천이 요단 강을 건너가며 순례 길을 마무리하는 장면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그려집니까? 그 부분을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와, 성도의 생애는 참으로 확신과 은혜로 충만한 것이로구나.’ 하며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임종을 앞둔 성도가 그와 같이 세상을 떠나도록 옆에서 도와주십시오. 그의 귀에 요한복음의 말씀과 시편 23편을 들려주면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는 참으로 영광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선택 교리가 성도의 신앙에 가져오는 유익은 참으로 크고 실질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가 영원한 정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 의의 자리에 이르러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일보다 신앙을 더 확고하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선택 교리는 참된 성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구원을 즐거워하는 자리로 인도해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선택하여 그 자리로 이끈 일을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엡 1:5)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우리를 선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신 일을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선택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것을 보면서 참으로 흐뭇해하십니다.
여러분, 아까도 얘기했듯이 지난 주일에 세례식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말로 다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분명히 천국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그 순수한 기쁨이 천국 전체를 들썩이게 했을 것입니다. 모든 천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흠이 없고 정결해진 성도(聖徒, Saints)가 된 일을 기리며 함께 축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성인(聖人) 교리가 더 악한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스스로 정한 몇 가지 기준에 합하는 사람만 성인으로 추대합니다. 카톨릭 달력에는 오늘은 무슨 성인의 날, 내일은 무슨 성인의 날이라고 하면서 거의 일 년 전체를 잡다한 성인의 날로 채워놓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인은 카톨릭 교회에서 임의로 추대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 모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패했고 타락했으며 더럽고 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선택하고 부르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무리, 즉 성도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와는 또다시 구별되는 성인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성성인(聖聖人)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대체 누가 그들을 따로 선택하여 우리와 구별한 것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여 따로 구별하신 참으로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신자와는 정말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거룩하게 구별 받은 존재인 줄도 모른 채, 세상 오물로 가득한 웅덩이에서 즐겁게 헤엄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여 구별하셨다는 이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세 전에 선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구별하셨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속 깊이 새겨두십시오. 그러한 성도의 존귀함을 조금도 양보하지 말고 철저하게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인답게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그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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