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23)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신약 성경 빌립보서 2장 9~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8문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설교하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설교는 많이 듣게 되는 편이고, 성탄절이나 사순절 기간이 다가오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설교는 참으로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교인이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높아지심도 그분의 낮아지심 못지않게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높아지셨습니까? 첫째, 부활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다른 위대한 종교 지도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했으니,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는 생명의 구주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15:17)?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신학도, 신앙도, 훌륭한 예배당도, 아름다운 찬양도 다 무가치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망해지고 힘없이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승천(昇天)으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승천 교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승천 교리를 비웃고 조롱하면서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어떻게 사람이 구름을 탈 수 있나? 그걸 믿는 네가 한번 구름을 타 봐라.」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이 허구라는 온갖 학설을 제시하는데, 그 정도가 부활 교리를 부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 그분의 부활도 역시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는데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대체 어디로 가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믿는 성도들이 장차 어디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지에 대한 의문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그런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실로 인해 큰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렇게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시는구나. 천사들이 전해준 대로, 예수님께서 정말 저 모습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시겠구나.”라고 하면서 극심한 박해를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결코, 하나의 문학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구름을 타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남들 몰래 숨어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많은 제자가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만약, 한두 명의 제자만 지켜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면,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으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방송국이 있었다면, 취재진이 찾아가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현장을 취재하고 방송으로도 내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라는 게 정확한 대답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종종 이걸 물어보는데,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은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 안에 계시고, 또 우리 가운데 계신단다.”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정확한 답변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라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재림으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사 한 번 보겠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보십시오. 분명히, ‘모든 무릎’과 ‘모든 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고 시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욕하며, 온갖 악한 말을 늘어놓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이단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의 한 복판 안에서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한편, 앞서 말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도 역시 실제 역사로 보지 않고, 그 안에서 윤리·도덕적 의미만 도출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대목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좋은 의미를 끌어낼 목적으로 문학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즉,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예수님의 재림이 한낱 전설이나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역사적 사실로 말하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의 ‘역사성’이라고 합니다. 역사성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특정한 장소와 때에 어떤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한국사를 살펴보면, 김유신 장군,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과 같은 인물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위인들이 실존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그 시대에 살면서 그 위인들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문헌에 그들의 이름과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모든 일들이 실제 사실이며,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얼마나 자기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면, 성경은 한낱 해몽서(解夢書)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선하고 착하게 살자는 고상한 의미를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없습니다. 참으로, 역사성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영양가 없는 솜사탕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역사라는 바탕 위에 서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열두 사도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33년간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가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을 만들어내거나, 없는 일을 꾸며낸 신화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어떤 교주 한 두 명이 만들어낸 종교가 전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높아지심 중에서도 재림으로 높임을 받으실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눈앞에 실제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는 우리가 말할 수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같이 마태복음 24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읽어보셨겠지만, 이 마태복음 24장은 참 중요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장 전체를 설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4장 4,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여기서 보면,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만 자칭 메시아가 서른 명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 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자칭 메시아들이 활동하고 있겠습니까? 이어서, 6~9절을 보겠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마지막 날에는 많은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분명히 큰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23절~26절까지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어떤 표적이나 기적, 또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나도 신기해하며 그런 곳으로 몰려다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지금도 거짓 표적과 기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질병 치료도 하고 환상도 봅니다. 그 밖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왜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보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사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합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에서 누군가 불치병이 나았다거나, 맹인이 눈을 떴다거나, 죽은 자가 살아났다거나 하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면, 이 동네 전체가 차량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교회를 직접 보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분명히 그 동안 교회 잘 다니던 신자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위의 말씀만 제대로 알아도, 어리석게 이적과 놀라운 일을 찾아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설령 옆 동네의 어떤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도 그곳을 찾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또, 30,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서 통곡하는 모든 족속들은 누구입니까? 불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던 모습 그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전한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행 1:11).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대환난 때도 성도는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모두 죽고 아무도 남아 있지 없다면, 굳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택하신 자들을 모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성도는 대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또, 36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역사상 수많은 이단이 예수님께서 몇 날 몇 시, 어디에 재림하신다고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하도 틀리니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몰래 다시 오셨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저기 과천에 있는 마귀의 하수인 하나는 자기가 재림한 예수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36절 말씀은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신자가 이단들의 거짓 주장에 다 속아 넘어갑니다. 사람은 굉장히 똑똑한 거 같지만, 의외로 매우 쉽게 속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그토록 사기꾼이 많은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세상 끝날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42, 4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즉, 영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잘못된 것에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이 세대에게는 통하지 않을 듯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 도리어 죽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17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에도 주님의 재림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아직 살아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끌어올려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일어납니다. 이단들이 아무리 거짓말로 속이며 여러 문제를 일으켜도, 재림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참된 성도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가장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타고 수많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오시면, 우리도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분을 직접 뵙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영광스런 소망 때문에 그 혹독한 핍박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 3, 6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제발 이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말씀을 농담으로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누구에게 멸망이 홀연히 이르겠습니까? 바로, 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던 사람에게입니다. “신앙생활 대충 해도 잘만 살더라. 무슨 문제가 있겠어?”라며 세상에 흠뻑 취한 채 문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지, 은사주의자들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들의 문제는 모든 좋은 것을 신비한 일을 통해 ‘지금’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질병도 고침 받고, 여러 문제도 해결되고, 모든 게 다 좋아지길 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 거기로 다 몰려가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렇게 분명히 경고하는 데도, 왜 그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겁니까? 다른 일에는 시간을 사용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기도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지 않는 겁니까? 그러니 그런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는 바른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배우려는 수고가 없으면, 누구나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빠진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우신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높아지심, 다른 말로 예수님의 존귀하심과 영광스러우심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영광스럽게 재림하셔서, 모든 택한 백성을 모아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안전하게 들이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존귀하신 예수님 앞에서 천사들과 함께 그분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럽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는 만유의 주인이시자,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앞에 합당한 성도로 서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절대로, 거짓 교리와 거짓 신앙과 이단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끝으로, 참된 위로가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위로가 아닌, 영적인 위로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성도를 위로했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서 말하는 ‘이 여러 말’이란 앞서 말한 모든 내용,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를 위로한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오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다음에 살아 있는 우리가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주님을 뵙고,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해도 인내하라. 참된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악하고 세속적인 죄를 버려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라. 그 영광의 자리에 다 함께 참여하자.」
진정한 위로란 이런 것입니다. “건강하십시오. 부자 되십시오. 자녀들이 입신양명하길 바랍니다.” 이런 건 거짓된 위로입니다. 사람이 듣기에 좋은 거짓 위로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이 땅에서 질병에 걸리고 여러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위로와 소망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몹시 무기력해져서 최후의 심판 날까지 그냥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기력한 성도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본래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며 이 땅에 오실 겁니다.
성도의 모든 소망과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소망을 마음에 품은 사람은 더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정욕과 쾌락에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참된 성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정결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심판주(審判主)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때 가장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안타깝게도, 우리 개혁주의 장로교에는 주님의 재림을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가장 많이 사모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언제나 주님의 재림을 가장 큰 소망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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