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예배 진단3」 성도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박지훈
▲ 제임스 티소가 그린 「바리새인과 세리(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들어가면서
예배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행 17:24; 롬 16:27)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분을 예배하라는 거룩한 계명을 주셨다(출 25 이하; 요 4:23). 예배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그분과 교제하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기쁨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자기가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히 10:19). 그 길밖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십자가에서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유일한 근거가 되신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보하심 가운데,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후 13:13).
또한,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따라 드려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하고 악한 인간이 자기 주관과 생각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진노하신다(출 12:15; 레 10: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곧 말씀에 따라 드리는 예배만 온전한 의미가 있고, 다른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부를 뿐이다.
이와 같이,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과 드리는 근거와 방식에 있어 일상적인 것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배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나 요소를 뛰어넘는, 매우 거룩하고 외경스러운 것이다. 이토록 중대한 일에 참여하면서 그에 걸맞은 자세를 갖추지 않는 것은 아주 큰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예배의 자세’는 참으로 심혈을 기울여 살펴봐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교회 상황과 현실에서는 올바른 예배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일이 더 중요하다. 심리학, 경제학과 같은 세속 학문의 영향을 받아 사람의 생각과 기호에 맞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런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교인은 당연히 예배 자세도 올바르게 갖추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인이 하나님의 계명과 기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예배를 드린다. 내적 측면(영적인 상태나 마음가짐 등)과 외적 측면, 양쪽 모두에서 올바른 예배 자세를 잃어버렸다. 엄숙함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친근함과 가벼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면서 통회하는 참된 회개(사 66:2)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감정적 슬픔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악한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까? 어떤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이러한 악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본인은 주일 예배를 중심으로 ‘예배의 자세’에 대해 설명해 보려고 한다.1 그러나 주일 예배 시간만 한정해서 다루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시간, 곧 ‘예배드리기 전’, ‘예배드리는 시간’, ‘예배드린 후’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도 함께 말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창조되었고(롬 11:36),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구원받았으며(엡 1:11-12), 우리 삶의 의미가 예배에 있고, 모든 일상생활은 예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마땅하기 때문이다(고전 10:31). 우리는 삶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
1. 예배를 드리기 전
– 평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다루기 전에, 공적 예배와 평상시의 삶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근래에 ‘삶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장난과 함께, 공적 예배와 일상의 삶이 별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시간을 경건하게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한 일상 시간과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야 할 예배의 시간을 구별해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적 예배를 사모하며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평일에 공적 예배를 사모하며 사는 일은, 천국에서 드릴 영원한 예배를 사모하는 성도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된다.
또한, 한 주간 예배를 준비하며 사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누군가 공적 예배 시간에만 거룩함을 사모하는 척하고 일상생활 속에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온갖 죄악에 빠져 산다면, 그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자일 뿐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남아있는 죄성으로 인해 죄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는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성도는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탄식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도, 그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싸우라.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예배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예배 전날과 당일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특별하고 중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마귀는 주일 전날과 당일에 더더욱 많은 시험을 걸고 유혹하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수많은 경건한 성도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입증되어 있다.
마귀는 죄로 인해 마음이 냉랭해지고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예배를 드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안다. 주말과 주일에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마귀의 공격에 대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군인처럼 휴식하는 순간에도 의의 병기를 손에 쥐고 경계를 풀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원수 마귀가 틈을 타고 죄를 짓게 하지 않는지 항상 잘 경계해야 한다(벧전 5:9).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더욱더 깨끗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해주신다(요 15:2).
몸가짐에 대한 준비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주일에는 단정하고 정중한 옷을 입고, 남녀를 불문하고 조금이라도 선정적일 수 있는 복장은 피해야 한다(딤전 2:9). 또한, 예배 시간에 피곤하지 않도록 주말에는 지나친 운동이나 외부 활동을 삼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 전날 밤에는 TV나 인터넷에 빠져 늦게 자는 일이 없게 특별히 더 주의해야 한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헌금도 예배 전날에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 예배 시작 전
왕을 알현하는 사람은, 왕을 뵙기 직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기 모습을 계속 점검하며 정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예배 준비는 예배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먼저, 예배 시작 전에 여유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예배당에 도착하라. 절대로 서두르며 헐레벌떡 오거나 늦게 오지 말라.
예배당에 도착했으면, 다른 무엇보다 기도로 자신을 점검하며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해라. 미처 깨닫지 못한 죄와 허물까지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시 139:24),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예복을 깨끗하게 하라. 절대로 아무 준비 없이 예배 자리에 나아가면 안 된다.
거룩하신 왕을 뵙는 그분의 백성답게 거룩한 마음과 엄숙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모든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부어주실 것이며, 하나님을 뵙는 놀라운 일을 허락해주실 것이다(욥 42:5).
2. 예배를 드릴 때
– 항상 견지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잘 유지한 긴장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정작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느슨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 내내 우리 영혼에게 명령하여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하도록 일깨워야 한다(시 103:1).
물론, 이런 일은 절대로 우리의 의지로 되지 않는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생각은 고작 1시간 남짓밖에 안 되는 짧은 예배 시간 동안에도 수없이 딴 길로 나아간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예배 시간 내내 우리를 중보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찬송
참된 예배에는 항상 모든 회중이 신령한 노래(골 3:16)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있다. 특별히, 가장 성경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개혁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많다. 시편 찬송을 비롯한 올바른 찬송가 가사에는 성경적인 교리와 신학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이 성경과 교리에 무지하다면, 그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려면, 평소에 꾸준히 성경을 읽고 올바른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르지 말고, 의미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담아 부르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며 불러라(고전 14:15). 하나님께서는 찬송 받기에 합당한 위대한 분이시다(계 5:12).
찬송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열심히 불러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는 거룩한 천사들은 결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한다(계 7:10). 하지만, 타고난 목소리가 특별히 우렁찬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에 취하지 말고, 다른 성도들과 조화를 이루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 기도
예배 기도는 모든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먼저, 목회자의 예배 기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가 맡겨주신 양 떼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이다. 그 기도 속에는 교회를 위하는 목회자의 마음과 간구와 겸손이 깊이 배어 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의 공기도는 그분의 설교만큼이나 회중에게 감화를 주었다. 목회자가 하나님께 예배 기도를 거룩하게 올릴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더 많은 영적 유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목회자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들어달라고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
성도가 대표 기도를 하는 경우, 기도 순서를 미리 확인하고 대표로 기도할 준비를 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 기도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무렇게나 막 기도하지 않게 주의하라.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도 준비도 평소에 하나님께 꾸준하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오랜 기간 동안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한 사람의 성숙함은 대표 기도에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되어 있다.
대표 기도자는 항상 예배의 엄숙함과 대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고, 교회의 상황과 필요에 맞는 기도를 올려드려야 한다. 절대로 사적이거나 가벼운 내용으로 기도하면 안 된다.
– 말씀 봉독과 말씀 선포
회중은 성경을 봉독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으로 거룩한 두려움 속에 말씀을 읽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가 본문 말씀을 풀어 강론할 때, 성경적 신학과 교리, 하나님의 성품과 어긋나지 않는 말씀을 전한다면, 회중은 설교자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연약한 질그릇인 목회자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후 4:7). 그러므로 강단에 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움을 입은 하나님 나라의 사자(使者)이다. 때로는, 설교 말씀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포되는 말씀은 사람의 지혜와 교훈이 아니라 자녀들의 상태와 처지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회중은 말씀이 때때로 양심을 찌르고 마음에 상처를 입힐지라도, 그 말씀이 신학과 교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지혜에 기꺼이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한 영적인 양식과 음료이기도 하다. 영혼이 살아서 약동하는 참된 성도는 그 힘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밝히 안다. 마치, 보급이 끊긴 부대가 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설교를 통해 영적 보급품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참된 성도는 설교를 통해 주어지는 영적 양식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말씀을 영적으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 헌금
성경은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하며(출 23:15, 34:20), 각자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하되 아까워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헌금이 성도의 의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고후 9:7). 헌금은 크게 십일조(말 3:10 외)와 주일 헌금(고전 16:2)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특별히 감사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드릴 수 있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지상 교회의 사역과 목양에 전념하는 목회자의 생활을 부양할 목적으로 제정하신 공급 수단이다(고전 9:14). 유독, 헌금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십일조를 거부하는 교인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기 물질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생각하며 회개해야 할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다(롬 8:32).
따라서, 헌금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내라고 하신 게 아니다(행 17:25).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통해 성도들이 자기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딤전 6:10),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며 살기를 원하신다(수 24:23).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설령 자기 소득에 비해 많은 것을 드릴지라도, 우쭐해 하거나 아까워하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드리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주님께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으로 드릴 것이다. 이처럼, 헌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문제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헌금을 드려야 한다.
– 축도
예배는 보통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축도하며 마무리된다. 그때, 목회자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빌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주권적인 복을 대신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한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축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따라 앞으로도 변함없이 복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절대로 그 시간을 하나의 형식적인 의식이나 절차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과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복을 한없이 내려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분이시다.
3. 예배 이후의 삶
우리는 6일 동안 분투하고 주일에 안식하는 삶을 사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과 그 이후에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표(豫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까지 결코 영적 전투를 멈추면 안 된다.
성도는 주일에 안식하고, 다시 영적 전쟁터로 복귀한다. 예배 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이 일주일간 따르고 지켜야 할 군율(軍律)이다. 기강이 무너진 군대는 적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패퇴하듯이, 예배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성도들도 한 주간의 영적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예배 때 공급받은 영적 은혜를 헛되게 쏟아 버리지 말고, 그 은혜를 가지고 더욱더 경건에 힘쓰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예배를 드려라. 말씀 읽기, 기도, 찬송은 모두 훌륭한 개인적 예배이다. 또한, 여러분의 가정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행 10:2), 주중의 공적 예배도 힘써 참여하라.
한 주간, 마귀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죄에 찌들어 살다가 도망치듯 주일 예배 자리에 나아오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눅 17:5). 반대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삶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영적 전투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이길 힘을 얻는다. 그렇게 그들은 주중에 또 하나의 영적 고지를 점령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기쁜 마음으로 다음 주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마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예배하는 자로 구별되기 위해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공적 예배는 성도의 삶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모든 성도들이여.
만약,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라면, 속히 그곳을 떠나 그들이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계 18:4).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절대 받으시지 않으며 오히려 저주하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복은 오직 합당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합당한 예배 자세, 곧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는 만큼, 천국의 영원한 삶을 항상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드리는 예배는 장차 저 천국에서 드릴 영원한 예배의 예행연습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한 모든 이들은 천국에서도 영광의 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그러한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성경에 규정된 공적 예배는 주일 예배 뿐이기 때문이다(막 16:2; 행 20:7; 고전 16:2).
「예배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예배 진단3」 성도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 한 주간 1 명, 총 2,953이 읽었습니다.)
제가 워낙 음치이고 노래를 잘 못불러서, 찬송을 부를때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잘 안부르는데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요?….
찬송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려고 부르는 거룩한 노래입니다.
오늘날의 피아노와 같은 반주 악기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회중이 제각각 높낮이, 빠르기로 불러서 오늘날 기준으로는 들어주기 어려울 정도로 무질서하게(?) 찬송을 불렀던 역사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으니 창피해서 부르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더 낫게 보실 겁니다.
그러니 찬송 부르시기 전에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꼭 찬송을 작게라도 부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태신앙인으로서 많은 예배를 드리고 살아왔지만, 무지했네요.
이런 글을 읽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네요. 유익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점을 깨닫게 해주신 글이세요 많은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들이 보시고 하나님중심의 예배준비와 목회사역을 위해 노력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섭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온전한 의미가 있는 말씀에 따라 드리는 예배’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본문에 ‘온전한 의미가 있는 말씀에 따라 드리는 예배’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비슷한 구절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곧 말씀에 따라 드리는 예배만 온전한 의미가 있고, 다른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부를 뿐이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적혀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