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8)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아이제나흐)
설형철
이번에는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도중 ‘납치’(?)당해 머무른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아이제나흐(Eisenach)’로 떠나보겠습니다. 아이제나흐는 작지만 유명한 도시인데,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가 태어난 곳이자 루터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그렇습니다.
이번 탐방에서는 먼저 바흐와 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오르크 교회를 둘러보고, 루터 하우스와 바흐 하우스를 거쳐 바르트부르크 성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제나흐 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고 있을 때, 저만치 우뚝 솟아 있는 게오르크 교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학창 시절에 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신앙 생활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여느 학생처럼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고, 예배 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절에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영혼에 더 유익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또한, 루터는 이곳에서 설교도 했습니다. 1521년, 제국 의회 참석차 보름스로 가던 루터는 잠시 이곳에 들러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도 필요했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영적인 힘과 용기를 얻는 루터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예배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흐의 동상이 곧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는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평생 철저한 루터교 신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바흐의 동상에서는 루터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담대함과 기개가 흘러나오는 듯했습니다 .
▲ 게오르크 교회의 예배당 모습
–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로 사진을 찍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하면서 들어갔던 예배당 안에는, 역시나 많은 성상(聖像)과 화려한 장식이 그 자태(姿態)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닌 성당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배당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히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예배당의 모습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참으로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 루터 광장(Lutherplatz)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
– 루터의 약력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게오르크 교회를 서둘러 빠져나오자, 반가운 글자가 새겨진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루터 광장’이라는 표지판 밑에는 루터가 누구인지 간단하게 설명도 해놓았습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종교개혁자. 1498년에서 1501년까지 학생으로 아이제나흐에 있었음. 1521년부터 1522년까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
▲ 루터 하우스(Lutherhaus)의 모습
– 오른쪽 건물이 루터 하우스, 왼쪽은 카페입니다.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니, 루터 하우스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독일에 ‘루터 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가 약 세 곳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세 곳 모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이라도 활짝 열려있으면 먼발치에서 잠깐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루터 하우스에 찾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을 방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찾아간 날이 토요일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자, 그들이 모두 루터를 가볍게 알고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 일을 계기로 루터가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섬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 루터 하우스 옆에 있는 카페의 모습
– 가게 이름은 Bibel-Café im Lutherhaus(Bible Café in Lutherhouse)입니다.
루터 하우스 바로 옆에는 마치 한 건물처럼 보이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건물은 루터 하우스의 부속 건물과 같습니다. 카페 이름부터 ‘루터 하우스에 있는 성경 카페’입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혼하면 아이제나흐로 신혼여행을 와서 루터 하우스를 함께 둘러보고 이 카페에 앉아 차를 들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루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참 좋겠다.」
… 잠시 뒤, 왠지 모를 민망함이 밀려와 저를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루터 하우스를 관람하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낭만 어린 소망을 뒤로 한 채, 다음 장소인 바흐 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바흐 하우스는 루터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 주머니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바흐 하우스의 입장료는 루터 하우스보다 두 배나 비쌌습니다. 만약, 제가 더 어렸을 때 바흐의 음악에 심취한 상태로 이곳을 찾아왔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관람했을 것입니다.
바흐 하우스 왼쪽에는 바흐의 동상과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동상과 화단을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 먼저, 아름답게 꾸며놓은 화단에서는 바흐를 사랑하는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많이 부식된 바흐의 동상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흐 하우스 주변을 맴돌다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행 정보 책자에는 ‘성으로 가는 버스가 20분마다 운행한다’고 나와 있었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재정 형편을 고려하면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힘든 길이 예상되었기에, 길을 떠나기에 앞서 긴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옆 의자에 통조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음식이 담긴 통조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행하면서 먹는 게 변변찮았던 제게는 참으로 좋은 저녁 식사 거리로 보였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누가 깜박하고 놓고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그대로 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만약 바르트부르크 성을 둘러보고 왔을 때도 이 통조림이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알고 가져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습니다. 또, 의외로 많은 관광객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올라갔다면 외롭고 힘들었겠지만, 함께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갔지만, 조금 올라가자 루터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납치되는 줄도 몰랐던 그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름스 의회는 파문당한 루터에게 벌을 내릴 장치를 마련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조차 더는 루터를 보호해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프리드리히는 지혜공(智慧公)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꾀를 하나 내었습니다. 그는 자기 부하를 시켜 루터가 안전한 곳에 은밀하게 숨어 지내게 했습니다. 또한, 루터가 어디에 머무르게 될지를 자신에게 말하지 않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으면, 더없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모른다’고 답하려고 말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연출한 이 멋진 연극은,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올 때 막이 올랐습니다. 갑자기 석궁 등으로 무장한 무리가 나타나 루터 일행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루터를 죽일 듯이 저주를 퍼부으며, 루터를 마차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준비된 말 위에 앉힌 다음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루터가 괴한(怪漢)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를 습격한 사람들은 루터를 죽이지 않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데려가 그곳에서 안전하게 살게 해주었습니다(루터의 일행 중 몇몇은 이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연극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1521년 5월 4일 밤에 도착한 루터는 그곳에서 약 10개월간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수도사 복장 대신 기사 복장을 하고 기사인 양 생활했습니다. ‘융커 외르크(Junker Jörg)’라는 이름을 쓰고 머리와 수염도 길게 기르자, 아무도 그 사람이 루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루터의 친구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루터에게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낸 날들이 너무도 힘겨웠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심했지만, 그것보다는 영적인 고통이 극심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그에게 변비, 불면증, 우울증을 안겨주었고, 사탄은 매일 졸개를 보내 루터를 괴롭혔습니다. 사탄은 루터가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그의 귀에 ‘네가 잘못해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멸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속삭였다고 합니다.
루터는 훗날 그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땀이 나기 시작했으며, 심장은 떨리고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악마는 자신의 주장을 잘 전개하고 변명할 줄도 알며 매우 강력한 언어를 사용한다. 심사숙고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논쟁을 행한다. 오히려 순간적으로 번갈아 대답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때 침상에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는 육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 그것이 첫 번째 일이다. 그는 논쟁으로 영혼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때 영혼은 한순간에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루터는 낙심하지 않고 펜을 들어 글을 썼습니다.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무는 동안 책을 무려 12권이나 썼습니다. 그 책 중에 하나가 바로 ‘루터 성경’이라고 불리는 독일어 신약 성경입니다. 그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하자 단 몇 주 만에 동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로 15년 동안 무려 20만 부가 팔려 나갔으니, 루터 성경은 당대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이 성경의 가격은 1.5굴덴(약 150만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반 시민이 몇 주 동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나마 인쇄술의 발명으로 가격이 많이 내려간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루터의 비상하고 예민한 언어 감각은 그가 번역한 성경에서 밝은 빛을 발했습니다. 루터가 이 성경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는 다음의 말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순수하고도 분명하게 독일어로 옮길 수 있도록 열심을 다했다. 그리고 간혹 한 단어를 찾고 조회하기 위해 14일, 또는 3주에서 4주까지 걸렸다. 그럼에도 가끔 그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어느 누구라도 읽을 수 있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해 놓았다. 이제 세 장이나 네 장을 눈으로 훑어보면, 그 안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기분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성경은 독일에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선물 하나를 안겨주었습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으로 인해 독일 민족 전체가 사용하는 표준 독일어가 나타났습니다. 루터 성경이 나오기 전에는 같은 독일 민족이어도 사용하는 말이 무척 달랐습니다. 한 지역 안에서조차 여러 방언이 존재해서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언어도 마구 섞여서 사용되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독일 민족의 언어를 하나로 엮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종교개혁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르트부르크 성의 작은 골방에서 힘겨워하던 루터를 사용하셔서 우리가(심지어 루터 자신조차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약 30분 정도 올라가자 바르트부르크 성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힘이 들기는 했지만, 산 정상에 올라왔을 때 느낄 수 있는 상쾌함도 찾아왔습니다. 막 도착했을 때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는데, 산 정상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서서 추운 겨울바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황금빛 십자가와 독일 국기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독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을 보러 온 관광객은 꽤 많았습니다. 이 성에는 루터 외에도 성을 만든 사람과 관련된 유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유물을 전시해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성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루터의 흔적을 살펴보려고 오겠지만 말입니다.
힘들게 올라왔지만, 풍족하지 못한 재정 형편 때문에 바르트부르크 성 곳곳을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관람료를 내지 않은 사람은 성의 일부 모습만 제한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 감사하게도, 지난번에도 도움을 주었던 종현 형제가 바르트부르크 성의 내부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종현 형제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바르트부르크 성 내부 모습
– 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바르트부르크 성 내부 모습
– 예배당으로 보이는데, 확연하게 로마 카톨릭 느낌이 납니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루터가 사용했던 방
– 루터가 바로 이곳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고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방에는 그를 괴롭히던 마귀를 향해 던진 잉크 병 자국이 남아있다고 전해집니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루터가 잉크(글)로 마귀(마귀의 걸작품인 로마 카톨릭)를 물리쳤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저는 이런 성 안쪽 광경을 구경하지 못하고, 성 근처를 서성이며 주변 경치만 살펴보다가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마저 구경할 수 없었다면, 지친 몸과 마음으로 인해 툴툴거리며 내려왔을 것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누구나 마음껏 구경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의 탐방 일정을 마칠 때가 되자 점점 배가 고파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아까 긴 의자에 두고 온 통조림이 떠올랐습니다. 빨리 내려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산 아래로 옮겼습니다.
제가 바르트부르크 성을 떠나 아래로 내려온 것처럼, 루터에게도 그 성을 떠나 내려와야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르푸르트 편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루터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도시는 큰 혼란에 빠졌고, 이를 수습할 사람은 루터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혜롭다는 프리드리히도, 똑똑한 학자 멜란히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비텐베르크 의회는 루터에게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띄웠고, 루터는 망설이지 않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감옥에서 지내는 것만 같았던 루터의 은신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상황에서 오직 말씀과 기도와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루터에게는, 종교개혁이 하나의 허상이 아닌 참된 실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제를 풀어내야만 했습니다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든든한 방어막이라고 생각할 만했던 지킹겐과 후텐의 기사 세력도 사라졌습니다. 말 그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만 의지하면서 종교개혁을 계속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을 만드셔서, 루터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롤라드 베인톤의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중요하고 복잡한 시기를 부족한 제 능력으로 소개해드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듯합니다.
한달음에 그 긴 의자가 있는 곳까지 내려온 저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통조림이 그대로 있는지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참 감사하고 기쁘게도, 통조림은 의자 위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꽤 큰 데다가 유통기한까지 넉넉했던 통조림은, 경제적인 이유로 루터 하우스와 바르트부르크 성 안을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을 잘 달래주었습니다.
통조림을 집어 들고 하나님께 감사 드린 뒤, 아이제나흐 기차역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루터 동상이 하나 보였습니다. 이 동상은 제가 갖고 있었던 여행 책자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보름스의 루터 동상처럼, 이 동상도 루터의 생애에서 한 장면씩 네 면에 걸쳐 표현해놓고 있었습니다.
▲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는 루터를 표현한 동상 정면의 모습
▲ ‘융커 외르크’ 시절의 루터를 표현한 동상 오른쪽 면의 모습
▲ 동상 뒷면의 모습
–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우리 주님은 강한 성이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흐의 동상처럼 많이 부식된 이 동상을 보면서, 종교개혁의 참 의미도 이 동상처럼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상을 뒤로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루터가 왜 그렇게 종교개혁에 온 힘을 쏟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저와 성도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것인지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루터가 태어나고 소천한 ‘아이슬레벤’을 둘러보고, 루터 편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 통조림 후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통조림은 그 다음날에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날은 제가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간 날이었습니다. 제가 머무른 한인 민박집에서는 원래 저녁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주인 아주머니께서 볶음밥이 남았다면서 배고프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독일에서 가져온 통조림을 먹어야 할 순간이 드디어 왔다고 생각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콩, 여러 종류의 채소, 넉넉한 양의 ‘고기’가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반 정도 밥에 뿌려서 비벼 먹었는데, 제가 유럽을 탐방하면서 먹었던 밥 중에 가장 맛있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비록 홀로 식사를 했지만, 참으로 감사하고 풍족한 저녁 식사였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6.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익투스, 2012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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