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4)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하이델베르크)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95개 조 반박문」은 네 개의 크고 굵직한 논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이델베르크(1518년 4월), 아우크스부르크(1518년 10월), 라이프치히(1519년), 그리고 보름스(1521년)에서 진리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서, 거짓이 난무하는 적진 한복판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 치열한 싸움은 루터가 자기 신학을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다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네 가지 논쟁 중, 첫 번째 논쟁이 일어난 하이델베르크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한국 사람에게 좋은 대학과 관광지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찾았을 때(2012년) 이미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한식당이 한두 군데 영업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어떤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약 네댓 군데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하이델베르크는 좋은 대학이나 관광지보다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태어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발표된 이 교리문답은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수많은 교회와 가정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루터가 논쟁하며 신앙의 초석을 닦은 하이델베르크 대학뿐만 아니라, 개혁신앙의 정수가 담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태어난 성령 교회도 함께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하이델베르크를 찾은 날은 유난히 화창했습니다. 4월의 완연한 봄 날씨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차역에서 오늘 방문할 대학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습니다. 트램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편하게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 테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늘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튼튼한 두 다리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는 구(舊)시가지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던 중, 저만치 ’JESUS siegt! JESUS lebt!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다!)’라고 적혀 있는 파란색 파라솔이 나타나 제 눈과 발걸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책상 위에 여러 가지 책을 펼쳐놓고, 지나가던 사람이 관심을 보이면 진열해놓은 책의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며 전도를 하는 듯했습니다. 저는 ‘아, 독일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전도하는구나!’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에 예배를 드리러 방문한 개혁교회에서, 그 생각이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몇몇 사람이 주 중에 하루 정도를 거리에 나가 전도하는데, 한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설교하고, 다른 사람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과 대화하며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은사를 사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도합니다. 그래서 전도 방식을 하나의 잣대로 획일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방식보다는, 직접 찾아가서 전하는 적극적인 방식이 더 성경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합니다.
전도는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지극히 귀중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소방관이 불 끄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을 다해 불을 끄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조금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사망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복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항상 열심을 내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시가지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반대로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관광 도시라서 그런지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특히 더 많았습니다.
중국 사람의 특징은 다른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에도 잘 정착하고, 상업에 종사하여 성공을 거두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심지어 아주 작은 도시나 마을에도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잡화점이 한 개 이상 꼭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제가 다녔던 지역에는(비록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예외 없이 중식당이나 ‘아시안 마트’로 불리는 잡화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이델베르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향하던 그 길에도 ‘아시안 마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의 짜장 라면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하이델베르크를 많이 찾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쨌거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고향의 음식(??)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꼭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15~20분 정도 걸어가자, 오른편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과 인접한 곳에는 책에서 보았던 대학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국립 종합대학입니다. 건물은 새 단장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왠지 모를 중후함이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이 건물 오른편이 대학 광장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 자리에 어거스틴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수도원에서 루터는 많은 사람을 상대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시(市)는 루터 탄생 500주년인 1983년에, 루터가 이곳에 머물며 중요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명판을 만들어 수도원이 있었던 자리에 설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명판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명판에 사용한 글자 색의 채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그런 색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며 색이 바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그 눈에 잘 띄지 않는 명판을 찾느라 한동안 광장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95개 조 반박문」은 루터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그러한 상황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가 반박문을 내건 다음 해인 1518년이 되자, 레오는 어거스틴 수도회장에게 루터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마침 1518년 4월에 어거스틴 수도회 독일 총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루터에게도 비텐베르크 관구장 대리 자격으로 총회에 보고해야 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총회에서는 루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함께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스승인 슈타우피츠는 이번에도 루터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논쟁적인 주제보다 죄, 자유의지, 은혜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결과, 루터는 총회에 ‘십자가 신학’으로 일컬어지는 논제를 제시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제’라고 불리는 이 논제는 모두 40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28개는 신학적인 주제를, 나머지 12개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제에서도 사람이 자기 노력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중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어거스틴 신학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논제를 “로마 카톨릭의 정곡을 찔러 공격하고 있지도 않고, 교회에 관한 다른 인식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개념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은 루터가 슈타우피츠의 조언에 따라 논쟁적인 주제보다는 신앙의 핵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이 논제를 몇 번씩 읽어보고 숙고해보니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칼끝은 분명히 로마 카톨릭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며 논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장 건전한 지침이지만, 인간을 의의 길로 나가게 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으려고 하는 로마 카톨릭의 행위 구원을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출발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 다음, 사람의 어떤 선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악하다고 하면서 사람이 행하는 일의 근본적인 한계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영원불변함을 대조합니다. 즉,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노력과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행위(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선한 행위조차도 그들 자신의 공로가 아니므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두려움으로 행하며 자기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이 대목에서 로마 카톨릭 교인이 의지하는 ‘성인(聖人, 마리아와 12사도 등)의 공로’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율법은 자기 노력과 행위로 공로를 쌓으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 다음, 12번째 논제부터는 율법의 올바른 기능을 설명하는 논제들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이 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렵게 여길 때,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부터 루터는 율법의 역할이 타락한 사람의 실존과 그 결말, 그리고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노예의지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루터는 타락한 사람의 의지가 자유롭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오직 악만 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그 의지를 사용해 의에 이르려고 해도 죄에 죄를 더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율법은 최선을 다해 지키면 지킬수록 그 법을 지킬 만한 능력과 의지가 사람에게 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우쳐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뢰하는 헛된 노력과 소망을 포기하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루터는 노예의지 개념을 통해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는 것이며, 그 법을 지켜 천국에 이르는 헛된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신학자의 자격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루터는 그들을 ‘영광의 신학자’라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광의 신학’이 사람이 보기에 선한 것에 취하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고 교만하게 행하는 악을 조장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 루터는 ‘십자가 신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보여주신 것들을 따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게 하는 신학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 행위에 의지하는 자는 점점 더 길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율법의 정죄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받아 그분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루터는 논제의 핵심인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 뒤, 율법(행위)과 은혜,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동과 인간의 수동적인 행동,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대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사역의 위대함을 나타내며 논제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통해 로마 교회의 주춧돌과 같은 자기 행위와 공로를 강력하게 공격했습니다. 또한, 자기 공로로 사람을 얽어매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를 눈이 먼 영적 소경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기본적인 사실도 제시했습니다. 그 진리를 붙들고 가르치는 사역자가 하나님 앞에 사람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선한 목자라는 사실도 아주 극명한 대조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논제가 로마 카톨릭의 정곡을 찌르지 않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로마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귀에는 분명히 이 논제가 어림도 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젊은 신학자 사이에서는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인 마르틴 부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교회 개혁을 위해 힘썼으며,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복음의 정수(精水)를 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무능력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은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복음의 정수가 담긴 ‘십자가 신학’보다는 사람이 보고 듣기에 좋은 ‘영광의 신학’을 따릅니다.
더구나 ‘현대판 영광의 신학’은 루터 시대의 영광의 신학보다 한층 더 저급합니다. ‘현대판 영광의 신학’은 자기 노력과 공로를 통해 현세적이고 외적인 축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 신학을 좇는 교인은 새벽 기도, 봉사, 헌금 등을 통해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런 교인을 가르치는 목사도 자기 목회의 외적 성장과 동료의 인정 등을 바라며, 듣기 좋은 말로 그들을 달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것처럼,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영광의 신학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은 잠시 동안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하나,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기념하는 명판 앞에서 ‘십자가 신학’을 선포하며 코앞에 다가온 온갖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았던 루터의 모습을 생각하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음을 믿고 따르는 길이 얼마나 좁고 험한 것인지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저는 과연 얼마나 복음으로 말미암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표된 성령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 들어온 성령 교회의 실제 모습은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 예배당 바깥쪽 벽을 따라 기념품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성령 교회의 모습
물론 이런 상황을 아주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회 벽을 따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그분처럼 상인들을 다 내쫓으며,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교회 입구에 이르자, 예배당 안쪽에서도 기념품 판매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 자체를 싹 사라져버리게 했습니다. 더구나 입장료도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에, 저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1563년, 이곳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표되었을 때의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경건한 세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한자리에 모여, 진리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산파 역할을 한 그 세 사람은 팔츠 영방(領邦)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3세, 설교자 올레비아누스, 신학자 우르시누스입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Ⅲ, 1515-1576)는 팔츠 영방에 속한 짐머리 성주(城主) 요한 2세와 그의 아내 베아트릭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요한 2세는 로마 카톨릭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므로, 프리드리히는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 신자로 자라났습니다. 또한, 요한 2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가까운 사이여서, 프리드리히는 궁정에서 교육받으며 자랄 정도로 최상류층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궁정에서 로마 카톨릭의 온갖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몰래 궁궐 밖으로 나가, 폴란드 출신의 종교개혁자인 요한 라스코에게 찾아가 개신교(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요한 라스코가 훗날 영국에서 사역할 때 작성한 요리문답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프리드리히는 22살이 되던 해에 삼촌인 오토 하인리히(팔츠 영방의 선제후가 될 인물)의 소개로 브란덴부르크 제후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와는 달리 루터의 소교리문답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결혼할 때도 프리드리히에게 성경과 루터의 글을 읽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신실한 개신교도였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녀와 결혼했으며, 실제로 루터의 글을 읽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와 마리아는 베르켄펠트의 고성(古城)에 정착해 살았고, 요한 2세는 그들이 로마 카톨릭에서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단 한 푼의 경제적인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부부는 그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잘 헤쳐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들 사이에서 많은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프리드리히 부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으로 아이들을 경건하게 잘 키웠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인내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던 중, 아버지 요한 2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다스리던 성을 물려받아 짐머리 성주(城主)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짐머리 성을 다스린 지 채 2년이 못 되어, 그는 팔츠 영방의 선제후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선제후로서 팔츠 영방 안에 루터교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낸 그의 삼촌, 오토 하인리히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갑자기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조카였던 프리드리히가 그 지위를 계승하여, 팔츠 영방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설교자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트리에르(또는 트리어)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이 지역도 오랫동안 로마 카톨릭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올레비아누스는 14살에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많은 박해와 핍박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올레비아누스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프랑스 부르주에서 법학을 공부 중이던 프리드리히의 둘째 아들인 헤르만 루트비히와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트비히가 술 취한 불경건한 친구의 달콤한 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유흥을 즐기려고 하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광경을 목격한 올레비아누스는 그를 구하려고 강에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자기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루트비히를 구하려 물에 뛰어든 사람은 올레비아누스뿐이 아니었습니다. 루트비히의 하인도 물에 뛰어들어 자기 주인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물에서 건져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루트비히가 아닌 올레비아누스였습니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사랑하는 아들 한 명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동안 깊은 슬픔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자기 아들을 구하려고 용감하게 물에 뛰어들었던 올레비아누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잘 간직해 두었습니다.
그 뒤,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로 가서 칼빈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칼빈의 제자이자, 후계자가 될 테오도르 베자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취리히로 가서 피터 마터 베르미글리와 불링거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뒤,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올레비아누스는 어디에서 사역할지를 놓고 고민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거의 반협박(?)에 가까운 강권으로 칼빈을 목회자의 길로 인도한 것으로 유명한 그 기욤 파렐이 올레비아누스에게 고향인 트리에르로 돌아가서 사역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그 말을 듣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멜란히톤의 저서를 교재로 삼아 라틴어를 가르치며 개혁 사상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역 방식을 대중 집회로 바꾸어,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의 대중 집회는 지역 주민 사이에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모임이 잦아지고,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로마 카톨릭의 주교이자 선제후3인 요한을 움직여서 올레비아누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올레비아누스를 비롯한 몇 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이 수면 위로 나타나 모든 일을 선하게 바꾸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3세가 예전 일을 기억하고, 보석금을 치르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에게 지혜의 대학(지금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일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올레비아누스는 하이델베르크에 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학 교수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독일이 아닌 폴란드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 지역은 로마 카톨릭이 아닌 루터교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그가 섬기던 교회의 목회자도 칼빈과 멜란히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회자가 만들어 사용한 교리문답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우르시누스는 교회와 브레슬라우 시의회의 지원을 받아 종교개혁의 진원지(震源地)인 비텐베르크에 유학하게 됩니다. 그때는 루터가 이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다음이었으므로, 우르시누스는 멜란히톤의 지도를 받으며 약 7년 동안 개혁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끝날 즈음 우르시누스는 멜란히톤과 함께 독일 여러 지역을 돌아보면서, 종교개혁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특권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그가 걸어간 길은 올레비아누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는 먼저 취리히로 가서 베르미글리와 불링거를 만난 뒤, 제네바로 가서 칼빈과 베자와 교제했습니다. 그런 다음, 프랑스 파리에 4달 정도 머물며 히브리어를 더 깊이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르시누스는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준 시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엘리자베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도 올레비아누스처럼 멜란히톤의 책(교리문답)을 사용해서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큰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브레슬라우에는 루터파 중에서도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가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강경 루터파 신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르시누스는 멜란히톤이나 스위스 개혁자처럼,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는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주제를 놓고 조심스럽게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난 반발과 논쟁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찾아오자, 다소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우르시누스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독일에서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필립 멜란히톤이 소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우르시누스는 그 소식을 듣고서 고향인 브레슬라우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비텐베르크를 찾아본 다음, 브레슬라우에 돌아오지 않고 베르미글리가 있는 취리히에 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베르미글리는 멜란히톤의 죽음과 고향에서 겪은 어려움으로 슬픔에 잠긴 우르시누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와 함께 한동안 평안한 날을 보내던 우르시누스는 정말 갑작스럽게 하이델베르크로 떠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평소 흠모하던 베르미글리에게 지혜의 대학 학장을 맡아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미글리는 자신은 나이가 많아서 학장을 맡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신 우르시누스를 소개하며, 그가 그 일에 적임자라고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주역인 프리드리히 3세,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 세 사람이 같은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찬 논쟁(루터파와 츠빙글리파)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어 다투는 일이 잦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무지한 백성의 타락이 상당히 심각했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프리드리히는 결국 팔츠 영방 안에서 사역하는 목사와 신학자로 구성한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원회에 영방 안에서 사용할 새 교리문답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물론, 그 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였습니다.
1562년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작성한 지 채 1년도 안 된 1563년 1월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여러 설교자와 신학 교수를 지혜의 대학으로 초청하여, 새로운 교리문답이 어떠한지 토론하게 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어떤 논쟁이나 부정적인 반응도 나오지 않고, 만장일치로 건전성을 확인해주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려 드렸습니다. 다음날 그가 서문을 씀으로써, 새로운 교리문답은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그는 서문에서 교리문답을 새롭게 만든 목적을 크게 3가지로 진술합니다.
첫 번째는 역시 교리 교육입니다. 종교개혁자는 예외 없이, 거의 모두 교리문답을 작성해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부모가 자기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게 하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리문답입니다.
두 번째는 이 교리문답으로 설교하기 위함입니다. 교리문답을 만드는 일을 주도하고 해설서를 집필한 우르시누스는 주일 오후 예배 때 이 교리문답으로 설교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가 작성한 『팔츠의 교회법』에도 교리문답을 강해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 나옵니다. 주일 오후 예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설교하는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전통은 네덜란드(화란) 개혁 교회에 이어져, 오늘날에도 그 전통 그대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교리문답은 신앙고백의 건전한 일치를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성찬 논쟁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자서 며칠 동안 성경과 씨름하며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많은 토론과 논쟁을 거치며 점점 칼빈의 성찬론이 가장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명백하게 루터파보다는 개혁파에 가까운 내용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복음의 본질과 핵심에 집중했으므로, 모든 개신교인을 같은 진리 안에서 폭넓게 아우를 만한 건전한 포용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 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교리문답을 평가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독일과 프랑스 (및 스위스 – 역자 주) 종교개혁의 모든 꽃과 열매라고 말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루터의 열정, 멜란히톤의 명료함, 츠빙글리의 단순함, 칼빈의 섬광이 잘 용해되어서 하나를 이룬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표되자, 세상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출판한 해에 4판까지 발행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특히, 팔츠 영방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유럽 곳곳에서는 자기 나라말로 옮긴 번역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이 교리문답으로 인한 교리적 충돌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개신교를 최종적으로 정죄하려고 하던 시기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점점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4판에서는 미사를 “저주받을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여 로마 카톨릭 교도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분노했던 이들은 팔츠 안에 있는 강경 루터파였습니다. 그들은 성찬 자리에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가 실재(實在)하지 않는다고 함축하는 교리문답의 진술 때문에 폭발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이 교리문답이 ‘귀신에 씐 사람 셋’이 만들어낸 악독한 문서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강경 루터파 제후 중 한 명이었던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프리드리히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를 초청해서 이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심해졌습니다. 이 회의를 신호탄으로 뷔르템베르크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 사이에서는 지필전쟁(紙筆戰爭)으로 불리는 문서를 통한 논쟁이 2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일으킨 이러한 사회적 파장은 1566년 5월 14일에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일단락되었습니다. 논쟁을 주고받던 독일의 강경 루터파 제후들은 결국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에게 1555년의 평화 협정4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5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혐의로 프리드리히를 고소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막시밀리안 2세는 이번 기회에 종교 논쟁으로 독일 전역이 시끄럽고 혼란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그 회의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프리드리히에게 지금껏 진행한 개혁 작업을 모두 철회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 체계로 회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폐기, 팔츠 영방 안에 있는 칼빈주의자 전원 추방, 불법으로 점유한 로마 카톨릭 수도원의 반환(물론 사실이 아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의 신실한 준수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 명령 이행하기를 거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평화 협정 위반이라는 중대한 범죄 혐의가 인정될 것이며, 황제와 다른 선제후는 그가 팔츠 선제후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루터가 보름스에서 했던 것처럼 신앙 양심에 따라 진실하고 겸손하며 용감하게 행동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격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양심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만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그분만을 주님으로 인정한다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백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영혼과 그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오직 나의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구원을 주시고, 저는 선물로 받은 구원을 신성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따라서 황제 폐하라도 저의 하나님의 구주의 자리에는 설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중략)…
나움부르크에서 다른 군주들과 함께 그 신앙고백서에 서명하였는데 함께 서명한 군주들이 태반이나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은 그 고백서가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신앙고백서에 반대하고 있거나 반대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교리문답은 글자 하나하나가 성경에서 나왔고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리문답의 여백에 기록된 성구가 그 사실을 잘 나타냅니다. 따라서 신학자라고 하는 어떤 사람들이 그 교리문답을 비판하지만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들의 반대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가는 성경이 밝히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기에 좌정하고 계신 군주나 동료들 가운데서 누구든지 성경을 들어서 가르치려고 하면 저는 듣겠습니다. 여기에 성경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면 저에게는 가장 큰 호의가 되겠고 깊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중략)…
저의 기대와 다르게, 저의 변호와 기독교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고려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나의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그리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잃는 사람은 장차 올 세상에서 백배나 (돌려)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개혁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프리드리히의 변론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심령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이름 앞에는 꼭 “경건한 선제후”라는 말이 따라다니게 됩니다. 2주 뒤, 다시 열린 제국 의회는 프리드리히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고소를 기각(棄却)하고, 새로운 교리문답도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능력은 백 마디 말보다는 진정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의지와 행동에서 더욱 분명하고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누군가 아무리 올바른 내용을 말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해도, 그 가르침이 자신을 사자 굴 속으로 인도할 때 기꺼이 가르친 대로 행할 수 없다면 그의 신앙과 경건은 헛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임한 주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 교회를 둘러보지 않은 관계로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길’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교회에서 ‘철학자의 길’로 가려면,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다리로 유명한 ‘카를 테오도어 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살펴보니, 아름다운 다리와 그 아래로 조용히 흐르는 네카어 강이 듣던 대로 참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으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왠지 저도 사진을 찍어야 할 것만 같아서, 슬그머니 사진기를 꺼내 주변 풍경 몇 장을 찍었습니다.
‘철학자의 길’은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와 괴테 같은 대문호가 이 길을 자주 걸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길이 상당히 완만하고 걷기 편한 길일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습니다. 정말로 ‘아, 괜히 왔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고생길(?)이 산 중턱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자들이 이 길을 산책용이 아닌 체력단련용으로 찾은 듯했습니다.
터져 나오는 불평을 꾹꾹 눌러가며 계속 걸어가자, 제 앞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전경이 활짝 펼쳐졌습니다. 그와 함께 ‘잘 올라왔다.’라는 생각이 나타나, 그동안의 모든 후회와 불평을 마음속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쫓겨난 자리에는 왠지 모를 평안함과 즐거움이 깃들었습니다.
▲ 아름다운 자연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한데 조화를 이룬 하이델베르크의 모습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특히,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이 왜 이 길을 즐겨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향한 갈증에 항상 시달리는 철학자의 영혼에 이곳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오아시스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쉼터를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피곤하게 하는 철학을 내려놓고, 성경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길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영혼의 갈증이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또 찾았던 그 궁극적인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음을 명백하게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 만물이 주는 작은 위로 안에서 잠시 쉬어가기만 원했을 따름입니다. 잠시 쉼을 얻은 다음에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자기 영혼을 더욱 괴롭게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수많은 지혜로운 말과 가르침에는 사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 말들은 자신의 곤고함과 어리석음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철학자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자로 불리는 그들의 정체는 우학자(愚學者)입니다. 하나님 대신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난 뒤,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이델베르크 역(驛)으로 향하는 길은 참 멀고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체력을 많이 소진해서인지, 의욕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낮에 본 짜장 라면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솟아나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잠시 뒤, 고향의 음식(??)을 팔고 있는 그 잡화점이 다시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가게 문을 지나, 진열대에 고이 모셔둔 라면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5봉지 묶음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가방 안에 라면을 넣으려는데, 갑자기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만 같은 큰 기쁨이 마음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라면이 엄청나게 먹고 싶어졌던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저에게 참으로 많은 선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종일 유적지를 돌아보며 누린 영적인 선물만으로도 참 감사한데, 특별히 육적인 선물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날은 우리의 모든 필요와 상황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참으로 좋은 날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루터가 다시 한 번 큰 논쟁을 벌여야 했던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대학에서는 현재 이 건물 1층을 대학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명판에는 대략 “마르틴 루터(1483-1548)가 1518년 4월 26일에 어거스틴 수도원에 머문 것과 하이델베르크 논쟁에 선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명판을 세웁니다. 1983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3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는 총 7명으로서, 그중 3명은 세속 군주가 아닌 대주교였습니다. 즉, 트리에르, 마인츠, 쾰른 대주교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4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라고 불리는 이 평화 협정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영주에게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 가운데 하나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공식적으로 허용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종교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화의에서 개혁파(칼빈파) 신앙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5 1530년의 초판본에는 황제의 간섭으로 로마 카톨릭에 가까운 성찬론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1540년 판에는 멜란히톤의 영향으로 좀 더 개혁파 성찬론에 가까운 내용이 나타납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6. 존 딜렌버거 편집, 『루터 저작선』,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7.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익투스, 2012
8. 테아 반 할세마,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옮김, 성약, 2006
9. 유해무 ·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 성약, 2006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4)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하이델베르크)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 한 주간 1 명, 총 2,610이 읽었습니다.)
저도 성령교회를 처음 봤을때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유럽교회들의 몰락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두번째 방문때 현지 가이드로 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독일 공교회에서는 빠져 나와 있으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앙을 견지하며 정직하고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가이드분이 참석하고 있는 독일교회도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작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도 간적이 있는데 그곳도 종교개혁의 성지인줄 처음 알았네요. 좋은 글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