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1)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선교사 에드워즈
김재호
1. 스톡브리지로 향한 에드워즈
1750년 7월 1일, 에드워즈는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A Farewell Sermon)』이라는 고별 설교를 통해 23년간의 노샘프턴 사역을 마무리했다.1노샘프턴 주민들은 에드워즈가 사임했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으로 에드워즈를 내쫓는 데만 열을 올리다보니, 정작 누구를 후임으로 초청할지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대책을 내놓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노샘프턴에는 뜻하지 않았던 강단 공백 사태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 거의 일 년 넘게 머무르게 되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노샘프턴 교인들은 마지못해 에드워즈에게 찾아가 설교를 부탁하곤 했고, 그런 상황은 그해 11월까지 이어졌다.2또한, 소수의 사람들은 뜻을 같이하는 주변 지역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지역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로 에드워즈를 청빙하려고 했다.3그렇게 거센 후폭풍이 노샘프턴에 몰아치고 있었을 때, 에드워즈의 마음은 스톡브리지라는 국경 지대의 작은 인디언 선교 마을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스톡브리지는 첫 번째 대각성이 한창이었을 때, 존 스토다드가 주도하여 설립한 인디언 선교 마을이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이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스토다드-윌리엄스 가문은, 1734년에 후사토닉 강 주변에 살던 인디언이 복음에 호의를 보이며 선교사의 정착을 허용하자 곧장 선교회를 조직했다. 예일 대학 교수였던 존 서전트가 선교사로 선임되어 선교회를 대표했으며, 티모시 우드브리지가 인디언 학교장으로 발탁되었다.
대각성에 대한 인디언의 관심과 서전트의 설교가 호응하면서 많은 인디언이 후사토닉 강 주변으로 모여들자, 매사추세츠 주(州) 정부는 스톡브리지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도록 토지를 양도해주었다. 그러자 인디언들은 자기 마을을 보호해줄 후견인으로 존 스토다드를 지목했고, 이에 스토다드는 윌리엄 윌리엄스의 동생인 에브라임 윌리엄스를 스톡브리지로 보내어 마을의 문명화 작업을 이끌도록 했다. 그때, 에드워즈도 초기 네덜란드 정착민이 소유했던 변두리 지역 일부를 구입하여 마을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4
▲ 존 서전트가 인디언 선교를 위해 지은 선교회 건물(The Mission House).
훗날, 노샘프턴 교회를 사임한 에드워즈 가정이 이 집에 머물며 사역하게 된다.
스토다드-윌리엄스 가문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선교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 소식은 바다 건너 영국 본토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아이작 홀리스는 서전트가 제안한, 기숙 학교를 통해 인디언 복음화와 문명화를 동시에 진행하는 선교 방식에 크게 감명받아, 12명 규모의 기숙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돈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우드브리지가 운영하던 기존의 인디언 학교 외에도, 마르틴 켈로그가 운영하는 기숙 학교도 새로 문을 열게 되었다. 서전트의 선교 사역은 계속 번창하여 1744년 여름 무렵에는 모두 218명의 인디언이 스톡브리지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중에 125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다시 그 가운데 42명이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이 되었다.5
순풍에 돛 단 듯했던 인디언 선교 사역은 그해 여름, 서전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암초에 걸려 삐걱대기 시작했다. 대지주로 활동하며 마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브라임 윌리엄스는 서전트의 뒤를 이을 선교사로 에즈라 스타일즈를 점찍어두었다.
그러나 당시에 한창 세력을 넓히던 이신론(理神論)과 아르미니우스주의에 휘둘려 정통 신앙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던 스타일즈는 막상 때가 되자 뒤로 물러나 버렸다. 선교 위원회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자기 평판만 나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선교사로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다.6
그러는 사이에 에드워즈가 유력한 선교사 후보로 떠올랐고, 결국 스톡브리지는 1751년 2월에 에드워즈를 청빙하는 편지를 띄웠다. 에드워즈의 마음은 그 청빙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노샘프턴에 남아달라는 소수의 지지자를 생각하여 관례대로 자기 거취 문제를 목회자 협의회의 결정에 맡겼다.
그러자 노샘프턴 주민들은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 계속 남아 자기 세력을 확장해가기 위한 술책을 부린다며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샘프턴에 남아 소수의 지지자를 이끌기보다는 스톡브리지에 가기를 훨씬 더 원한다고 진술했다. 협의회는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본 다음, 에드워즈에게 스톡브리지의 청빙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7
다시 말해,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에 남기 위한 술책을 부린 게 아니라, 소수의 지지자가 그들의 생각과 계획을 깨끗하게 단념하게 하기 위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1751년 초여름, 에드워즈가 인디언 선교사이자 영국 정착민 목회자 신분으로 스톡브리지로 떠남으로써, 성찬 논쟁에서부터 면직에 이르는 일에 최종 마침표가 찍혔다.
이 일을 겉모습만 놓고 살펴보면, 에드워즈가 ‘어쩔 수 없이’ 벽촌 지역으로 쫓겨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중년에 대가족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에드워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친한 친구들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 사역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버지니아 지역에서도 에드워즈를 모셔가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8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모든 지역보다도 국경 지대의 조그만 마을인 스톡브리지를 선택했다. 즉, 자기에게는 그곳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생각과 결정은 젊은 시절에 그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다소 낯선 것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그 일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대도시에서 목회하기를 추구했었다. 그래서 볼턴의 괄괄한 시골 농부를 목양하는 일을 큰 불행과 역경처럼 여겼었다.9 그러나 노샘프턴에서 면직된 중년의 에드워즈는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한적한 변방이 자기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자의로’ 그곳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의 생각과 태도를 그렇게 정반대가 되게 한 것일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23년의 목회 기간을 통해 목회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된 부분이 가장 컸다. 에드워즈에게는 솔로몬 스토다드처럼 불경건한 사람을 마음껏 꾸짖으면서도 그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친화력이 ‘거의’ 없었다. 대신,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정도의 철두철미함, 치밀함, 정직함이 있었다.
그의 성품과 기질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죄인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선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특징은 목회 기간 내내,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특히, 대각성이 잦아들고 거의 무조건적인 미움과 반대를 받으면서, 에드워즈는 자기가 글을 쓰고 공부하는 것, 즉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논리를 철저하게 파고드는 일 외에는 잘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점점 굳혔다.10
즉, 에드워즈는 복음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면서 사람들을 그리 많이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스톡브리지의 한적한 환경을 보고, 그곳에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서 그리로 부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자기를 겸손하게 하시고, 목사로서 개인적인 자질이 있는지 점검해보도록 하시기 위해 이 고통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이제 모든 사례비가 끊기고 가족이 “망망대해와 같은 세상에 내동댕이쳐지면” “부양해야 하는 그 많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했다. 에드워즈는 그에게 가장 힘이 되던 스코틀랜드 친구 존 어스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공부하는 것 외에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라고 기록했다.」11
우리의 경험이 잘 알려주듯이, 정말로 애매한 고난을 겪는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는 고난이라고 해도, 부족한 점을 고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채찍질이 함께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큰 환란과 어려움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모난 부분을 다듬고 고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또한, 어려움에 못 이겨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말고, 자기를 더욱 낮추는 가운데 오히려 전보다 더 자기 소명에 충실하려고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계속 찾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 곧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에드워즈의 면직과 스톡브리지 행(行)이 그의 명저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선한 계기가 된 것처럼 말이다.
2. 스톡브리지, 후천년주의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 선교 마을
당시, 복음주의자에게 스톡브리지는 인디언 선교를 향한 희망의 상징이자 불씨였다. 필립 왕 전쟁 이후, 인디언 대부분이 프랑스와 연합하자, 영국의 인디언 선교는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복음 전파와 함께 도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만큼, 인디언 선교를 향한 소망은 여전히 가슴속에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정말 극적으로 설립된 스톡브리지는 모든 이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매사추세츠 주 정부와 영국 본토에서도 이 조그마한 선교 마을을 전진 기지로 삼아, 내륙의 인디언 부족 연합체까지 나아가 선교하게 되기를 고대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람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과 맞물리면서 현실이 되지 못했다. 정치, 문화, 사회, 교육 등의 각종 영역이 복음 안에서 점점 온전해지면서 모든 것이 완전한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후천년주의 이상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왜냐하면 후천년주의는 복음의 일과 일반적인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한데 엮어서 처리하는 일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 영국이 선교 목표로 삼은 모호크 인디언 연합체를 지배하던 4명의 왕
그 결과, 영국인들은 대개 복음화를 이뤄가면서 자국이나 자기 집안이 정치, 경제, 군사, 외교상의 유익을 얻는 일을 정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에게서도 나타난다. 에드워즈는 장차 온 세상이 복음과 진리의 빛으로 가득할 것을 내다보면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를 대적하는 개신교 국가 영국의 싸움을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간단히 말해, 에드워즈는 복음과 진리가 흥왕하면 영국은 프랑스를 무찌르고 승리하여 더 많은 영혼을 빛으로 인도할 것이며, 반대로 죄를 지으면 프랑스가 승리하여 더 많은 영혼이 흑암에 사로잡힐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사상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일반적인 유익이 영국에 돌아가는 일을 합당하게 여기게 했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 선교 활동으로 복음화가 이뤄질수록 인디언은 친(親)영국 성향을 갖게 되어, 영국이 프랑스를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보고를 주 정부 대변인에게 올리기도 했다.12 즉, 영국 정부에 복음 전파를 통해 얻게 될 군사·외교상의 유익을 거론하면서, 선교 사역에 전폭적으로 협조하고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에드워즈는 그 유익이 복음 그 자체가 주는 영적인 유익과 비교하면, 지극히 하찮고 유치한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13 즉, 그는 ‘정말로’ 복음이 약속한 영원한 천국만 바라보면서 이 땅의 문제에 접근했으며, 그랬기에 이 땅의 것으로 인해 마음이 둘로 갈라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스 가문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윌리엄스 가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곧 자기 가문의 지위가 더욱 굳건해짐을 뜻했다. 즉, 복음 전파와 사익(私益) 추구가 사실상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주 정부가 장차 인디언 기숙 학교를 인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자기 사유지를 학교 부지로 선택했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물품도 자기 가게에서 납품했으며, 개인 재정과 학교 재정을 통합하여 사적인 일에도 학교 재정을 지출하게 하는 등의 일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행했다.14
그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스톡브리지와 같은 변경 지역으로 과감하게 이주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서양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인디언을 상대로 이득을 편취해 가문을 든든하게 하는 일도 과감하게 벌여서 인디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15 그들은 그러한 행동이 복음의 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 윌리엄스 가문은 선교 사역이 짭짤한 수익을 안겨주는 사업처럼 변해가며 파선해가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정도로 후천년주의의 오류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윌리엄스 가문이 주도하는 선교 사업은 번창하면 할수록 인디언을 계속 불공정한 경쟁과 수탈로 내모는 아주 부조리하고 기형적인 것이었다.
▲ 끝까지 영국의 우방이자 윌리엄스 가문의 협력자로 활동했으나,
영국인들의 사익 추구에 분노를 표출하곤 했던 헨드릭 데야노긴 추장
문제는 이러한 윌리엄스 가문의 오류가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진정으로 전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이 퍼져나가기를 바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 제국인 영국이 융성하면 할수록 원주민의 불평등과 빈곤은 더 심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는 영국이 복음과 자기 패권 확립이라는 두 개의 깃발을 동시에 들었기에 나타나는 일이었다.
에드워즈는 그런 상황 속에서 윌리엄스 가문과는 싸우고, 영국 정부에는 협력하는 다소 모순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윌리엄스 가문이 복음을 팔아먹는 행위를 ‘진짜로’ 많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잘 밝혀냈다. 그 결과, 윌리엄스 가문은 결국 스톡브리지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16
그러나 윌리엄스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에드워즈의 교묘한 책략에 말려들어 정말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에드워즈나 자신이나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할 만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스톡브리지를 되찾으려고 시도했고, 매번 인디언의 소명과 반대를 통해 저지되곤 했다.17
인디언들은 에드워즈와 윌리엄스 가문의 차이를 실제 삶을 통해 이미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또한, 영국 정부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복음을 사용하는 에드워즈 진영의 오류 역시 유감스러워했다.18 인디언들은 실제 삶을 통해, 복음으로 말미암는 ‘부수적인’ 유익을 영국인과 원주민이 함께 누리는 기독교 제국의 이상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에드워즈의 인디언 학교 교사였던 기드온 홀리가 선교 대상으로 삼기도 했었던 이러쿼이족의 모습(1914년 촬영)
에드워즈의 선교 활동은 그 오류에 가로막혀 결국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윌리엄스 가문과 다투는 과정에서 부족 연합체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할 인디언 부족이 스톡브리지를 떠났고, 곧이어 발발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그들이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장벽 역할을 했다.19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에 머무는 동안 후천년적 이상을 바라보며, 그들이 돌아올 날을 대비해 학교를 정비해놓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에드워즈와 함께하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인디언 교사 기드온 홀리는 복음과 정치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를 깨닫고, 정치 활동과 무관하게 선교할 수 있는 지역을 자기 사역지로 삼았다.20
「이제 홀리는 전쟁 기간에 선교사로 사역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싫증이 나고 환멸을 느꼈다. 에드워즈는 선교사가 복음 사역자로서와 인디언 동맹을 얻는 대리인으로서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다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중략)… 홀리는 개인적인 일기에서 씁쓸하게 기록했다.
“정치적인 문제임이 틀림없는 상황에서 내가 왜 기독교의 열정을 이야기해야 한단 말인가?” “인디언 가운데 기독교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 가운데 누가 천국에 가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중략)…
군대에서 겪은 실제적인 아픈 경험은 홀리가 인디언 선교에 대한 영국계 미국인들의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해 주었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영국계 미국인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인디언 가운데 사는 거의 모든 영국인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디언을 쫓아내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덜 신앙적인 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은 이것을 명백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에드워즈와 같이 정치적이면서도 신앙적인 사람들이 만일 복음이 군사를 모으는 데 사용되더라도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홀리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순박한 것이었다.」21
복음으로 말미암는 ‘일반적인 유익’이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분명하게 증거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유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사용하는 일을 분명하게 금지한다(요 6:27; 행 3:6; 빌 4:12). 복음은 오직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
일반적인 유익은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계명에 순종하며 ‘고난과 핍박’을 감수할 때,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알맞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즉, 복음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그런 유익을 얻거나 더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성도는 이 경계선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복음의 일이 훼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527.
2 같은 책, p. 530.
3 같은 책, p. 531.
4 같은 책, pp. 262~264, 546.
5 같은 책, pp. 548, 549.
6 같은 책, pp. 550, 551.
7 같은 책, pp. 551, 552, 531, 532.
8 같은 책, pp. 529, 미주, pp. 810, 814, 815.
9 같은 책, pp. 100, 151.
10 같은 책, pp. 509.
11 같은 책, pp. 529.
12 같은 책, pp. 560~562.
13 같은 책, p. 560.
14 같은 책, pp. 579, 581, 미주, p. 817.
15 같은 책, pp. 549, 550, 553, 554.
16 같은 책, p. 586.
17 같은 책, p. 596.
18 같은 책, p. 591.
19 같은 책, pp. 586, 587, 598.
20 같은 책, p. 616.
21 같은 책, pp. 614, 615.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1)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선교사 에드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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