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2) 스톡브리지와 에드워즈: 저술가 에드워즈
김재호
1. 『의지의 자유』와 『원죄론』
에드워즈는 쫓겨가듯 한적한 변방으로 갔지만, 오히려 그 일은 국제적인 지적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스톡브리지는 그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많이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시간 여유도 많이 가져다주었다. 그 험하고 먼 지역까지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강단이 비었을 때 이웃 지역에서 설교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1
그렇게 많은 양 무리를 돌보는 짐을 벗고 나자, 에드워즈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던 일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다(고후 10:5).
에드워즈의 시대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부패한 카톨릭 교회 대신 이성의 힘을 굳게 믿었다.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지몽매한 미신으로 취급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을 용의가 있었다. 뉴턴의 대성공은 그 신념을 더욱 강화해주었고, 사람들은 자연 과학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의 세계에서도 뉴턴처럼 절대적인 ‘보편 법칙’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여기며 그 일에 온 힘을 쏟았다.2
이러한 이성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는 자연스럽게 사람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사조(思潮)로 이어졌다. 사람에게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확언하는 사상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사람의 본성 자체가 죄로 부패하여 모든 것이 쓸모없어졌다고 가르치는 칼빈주의 교리를 비웃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성과 상식에 맞게 재해석한 가르침이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다.3
하지만 대각성의 불길이 사그라진 뉴잉글랜드에는 그러한 사상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대각성 때 주춤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소키누스주의가 다시 힘을 얻었으며, 이제는 목회자도 그런 흐름에 상당히 동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 본토와 신대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던 보스턴 지역의 상황이 심각했다. 회중 정치를 채택한 보스턴에는 잘못된 사상에 휘말린 목회자와 회중이 한마음이 되어 그 사상을 옹호할 때, 그들을 제지할 만한 마땅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때 세력을 넓힌 이성주의자들에 의해 훗날 유니테리언이라는 이단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4
그러한 시대 흐름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보고 깊이 염려했던 에드워즈는 칼빈주의가 다시 세계적으로 지적인 존중을 받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톡브리지 행을 통해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에드워즈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성과 계몽의 시대’가 윤리·도덕의 토대로 삼은 ‘자유의지’ 개념이 아무런 지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5 북미 대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100년이나 뒤로 물러가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의지의 자유』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1762년, 보스턴에서 출판한 『의지의 자유』 표지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의지가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자유의지 개념을 논박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의지가 자유롭다는 말은 의지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동인(動因)을 지닌 주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성향을 따라 행동하는 데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라는 뜻이었다.6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선택은 지극히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그 반대는 아무리 의지를 발휘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라면, 마음의 성향을 역행하는 선택도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의지는 자기 마음이 원하는 바를 기꺼이 따르고 선택할 수 있는 ‘기능적인 능력’을 뜻했다.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의지’란 실재하지 않았다.7
나아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이 정말로 마음의 성향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에 종속되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성품과 성향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그 모든 일은 세상에 은혜와 공의를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의지를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8
“사람이 누리는 모든 자유와 그에 따르는 도덕적인 책임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는 것에서 말미암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에서 말미암는다.” 에드워즈는 도덕적 선택과 성품 사이의 관계를 변증함으로써 바로 이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다음, 그는 사람의 본성 문제를 다루었다. 이성의 힘을 믿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본성이 죄로 완전히 타락하여 무능한 상태라는 칼빈주의 교리는 가장 비이성적인 가르침이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이성의 힘으로 완전한 도덕 법칙을 수립하여 이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과 소망이 완전히 헛되다는 사실을 함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칼빈주의는 인류 진보와 계몽을 위해 하루속히 폐기하고 타도해야 하는 미신과 같았다. 그들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경이 사람의 본성을 낙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지적 도전에 맞서, 저들이 성경을 얼마나 편향적으로 인용하는지부터 보여주었다. 그렇게 성경에는 그러한 사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올바른 주해를 통해 보여주고 난 뒤에, 전적 타락의 교리가 사람의 이성과 경험에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원죄의 교리만큼 경험적 증거가 많은 교리도 없다는 격언에 충실했다. 오히려 어떻게 사람의 본성이 부패하여 무능력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반문하기까지도 했다.9
사람의 본성이 부패했다고 가르치는 원죄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의문점을 이성과 상식으로 설명하고 변호하는 것은 에드워즈에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의 범죄로 인생 전체를 저주하시고, 사람이 죄짓는 일을 허용하시며, 아담의 죄를 인류 전체에 적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의로우신가?”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여 답변했다.10 즉, 그러한 원리가 실생활 속에서 아무런 무리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논증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다소 당황스러운 내용이 나오기 시작한다. 에드워즈는 거기서 갑자기 그동안 진행했던 모든 일을 뒤엎는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가 알고 이해하는 형이상학과 경험 위에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놓고 판단해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곧 비이성적인 가르침이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11 언뜻 생각하면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에드워즈의 균형 감각과 사상적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된다.
만약, 에드워즈가 쭉 진행했던 대로 성경과 이성이 늘 일치한다는 결론으로 책을 마무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책 제목은 『원죄론』인데, 실제 내용은 사람의 본성을 낙관하는 논증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람의 본성이 죄로 완전히 부패하여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무능하게 되었다면, 성경에는 ‘당연히’ 사람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꼭 나타나야만 한다. 그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따라서 정말로 원죄를 설명하는 책이라면, 그러한 부분을 불합리하게 여기지 말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자세를 취해야 함을 말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는 이성과 경험을 충분히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에는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과 경험 그 자체가 진리의 잣대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나아가 그렇게 하려는 행동이 바로 죄로 물든 교만한 본성을 보여주는 이성적, 경험적 증거라고 변증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현대 신학자에 반대하여 칼빈주의 신학을 옹호했다. 특별히, 에드워즈는 거의 모든 18세기 사상이 대단한 시금석으로 삼는 인간의 상식에 근거하여 칼빈주의에 대해 제기한 반론에 답변하기로 결심했다. 에드워즈는 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들이 이해한 바와 같이, 이성은, 심지어 상식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마음먹었다. …(중략)…
이렇게 당대의 이성의 기준으로 신앙을 변호하는 것은 반대자들로 하여금 똑같은 기준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특별히 『원죄론』에서 명확히 한 바와 같이, 이성에만 논거를 두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나약한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12
우리는 이성과 경험, 사람의 자유와 책임을 무턱대고 배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에 놓아두어 그 자체로 진리와 공의의 토대가 되지 못하게 제한해야 한다. 하나님이 없는 이성과 경험은 교만으로 사람의 눈을 가리며, 하나님이 없는 자유와 책임은 방종과 초인(超人) 사상을 조장한다.
진정한 지혜는 자기가 타락하여 어리석어졌음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며, 진정한 경험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데 주저함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며 책임을 지는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
에드워즈는 당대의 도전을 물리치는 것을 넘어,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 자체를 바꾸어 놓기 원했다. 그는 그 일을 일생일대의 작품으로 생각한 『구속사』에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지만, 우선 그 전에 자기 시대가 전제하는 바를 확인하고 성경 위에 기초를 튼튼히 세우는 일부터 해야 했다.13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은 그 모든 일의 주춧돌 역할을 하기 위해 쓰인 논문이었다.
이 논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을 알려고 할 때 당대 사람들과 같이 사람의 유익과 행복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그분의 속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피조물을 그분과 연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며, 온 천지가 그러한 의지의 표현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었다.14
에드워즈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을 사랑의 연합이라고 설명한 다음, 당대의 가장 큰 논제였던 ‘미덕의 본질’을 다루었다. 앞서 말했듯이, 에드워즈 시대 사람들은 뉴턴의 성공에 고무되어 과학적인 방식으로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을 수립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즉, 당시에는 ‘덕(virtue)’이란 무엇이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전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자연과 본성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고 확립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므로, 항상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15
▲1765년에 출판된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 표지
– 두 개의 논문(Two Dissertations)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은 샤프츠버리 백작과 프랜시스 허치슨의 윤리 의식 사상이었다. 그들은 사람 안에 있는 자비롭고 이타적인 윤리 의식이 바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보편적인 기준이자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 내면의 의식이 승인하는 행위는 미덕이고 거부하는 행위는 악덕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미덕과 악덕을 판단하기 위해 성경과 같은 외적인 권위와 기준에 의존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16
에드워즈는 그러한 불경건한 시대사조에 맞서, 하나님을 배제한 어떠한 행위도 미덕일 수 없다고 논증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 눈에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결국 사적인 유익, 곧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심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나 가족을 돌보는 사랑조차도 자기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와 가정을 짓밟는 일을 기꺼이 승인하는 이기심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각 나라와 가정을 유지하는 선함을 베풀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참된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17
즉, 에드워즈에게 참된 미덕이란 오직 하나님과 연합함에서 말미암는 행동이었다. 그분의 사랑과 영광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하며 그분께서 미워하시는 바를 미워하는 것만이 진정한 미덕이었다. 그것 외에 미덕으로 취급받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께 정죄 받고 심판받을 악한 행동이었다.18
에드워즈가 ‘하나님 없는’ 도덕적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변증한 방식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는 훗날 세대주의자들이 무지막지한 문자주의를 앞세워 자유주의에 대항했던 것처럼 하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이성과 경험의 역할을 충분하게 긍정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변증에 활용했다.
물론, 그의 변증이 이루어지는 근본 토대를 끝까지 파고들어 가보면, 그가 정말 이성과 경험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는지는 다소 불확실해진다. 에드워즈는 변증할 때 주로 의미와 개념을 명료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이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범주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정통 칼빈주의 교리가 사람의 이성과 경험에 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가 제시하는 ‘진짜 의미’의 원천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이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변증하려는 명료한 의미를 철학을 통해 깨우친 것이 아니라, 신학을 통해 깨우쳤다. 신학의 빛이 통상적인 개념과 범주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한 것이지, 에드워즈의 비상한 머리가 그 일을 해낸 게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이성과 경험의 ‘진짜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존성 앞에서 자기 미력함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이성과 경험을 논하고 있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완전해지는 법을 체득하는 자아중심적이고 ‘교만한’ 이성과 경험을 말하고 있었고, 그런 것은 ‘참된’ 이성과 경험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에드워즈가 그 사실을 변증 방식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도 전에 이미 그 폐해와 어리석음을 성경에 근거해 가장 정확하게 변증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런 부족함은 다소 너그럽게 여겨도 받아들여줘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징적으로, 에드워즈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배반했는가라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만일 하나님과 연합하면(에드워즈에게는 항상 진행형이었던),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선의와 정의도 포함된다. 또한 하나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 될 것이다. …(중략)…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에드워즈는 지배적인 서구 사상과 다음 두 세기 동안 점점 더 많은 세계의 사상이 된 세계관에 도전했다. 저 낙관적 시대의 거대한 이상은 인간의 역사를 황폐하게 만든 파괴적인 갈등을 종식시키게 될 보편적 도덕 체계를 과학적 원리 위에 수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상의 충돌이 피로 물든 시대를 만들어 버리고 인간성을 말살시킬 위협이 되었던 20세기 전반이 지나자마자, 그런 계획에 대한 신념은, 그 자리를 대신할 명확한 대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19
그리스도인은 어떤 개념과 범주든지,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사소한 개념이든 중요한 범주이든 관계없이, 항상 정통 신학에 근거하여 그것의 ‘진짜 의미’를 꿰뚫으려고 해야 한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태도가 참으로 필요하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647.
2 같은 책, pp. 672, 673.
3 같은 책, pp. 630, 632.
4 같은 책, pp. 626~631.
5 같은 책, pp. 623, 624.
6 같은 책, pp. 645, 638.
7 같은 책, p. 637.
8 같은 책, pp. 641, 643.
9 같은 책, pp. 653, 654.
10 같은 책, pp. 651, 659.
11 같은 책, p. 661.
12 같은 책, pp. 632, 660.
13 같은 책, p. 666.
14 같은 책, pp. 666~671.
15 같은 책, pp. 672, 673.
16 같은 책, pp. 673, 674.
17 같은 책, pp. 678~680.
18 같은 책, p. 681.
19 같은 책, pp. 681.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2) 스톡브리지와 에드워즈 (저술가 에드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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