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6) 에드워즈의 삶과 신앙
김재호
1. 에드워즈와 제2차 대각성
에드워즈 생전에 일어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0년에 이르러 전세가 영국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그러다 1763년에 파리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프랑스(캐나다) 지역을 할양받았으며, 스페인과는 쿠바 지역과 플로리다를 맞바꾸었다.1
그렇게 북미 대륙의 영토가 급격하게 넓어지자, 영국은 방대해진 지역을 방어하고 그동안 전쟁에 쏟아부었던 돈을 충당할 목적으로 연달아 세금을 신설하고 북미 식민지에 부과하기 시작했다.2 그것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영국은 북미 식민지가 다른 나라(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와 교역할 때, 무조건 영국을 거쳐 가게 하면서 관세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물품 운송도 무조건 영국 배를 이용하게 해서 식민지의 돈이 계속 본국으로 유입되게 하는 정책을 폈다.3
▲ 전쟁 종료 후 북미 대륙 세력 분포도
– 분홍색으로 표기된 지역이 영국이 새로 획득한 땅이다.
<출처: (CC-BY-SA) Jon Platek (wikipedia)>
그렇게 본국을 우선하는 정책이 계속 펼쳐지자 식민지인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해달라고 몇 차례에 걸쳐 요구했지만, 영국 의회는 그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영국 의회와 식민지인들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식민지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대륙 의회를 출범시키고 말았다. 그와 함께 각 주(州)에서는 민병을 소집하기 시작했다.4
이처럼 상황은 급격하게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식민지인들은 여전히 내전을 치르고 본국에서 독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전부터 누려온 자치권(自治權)과 자유로운 무역 활동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영국에 계속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군사적 긴장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보스턴에서 시한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1775년 4월, 보스턴에서 영국군과 민병 사이에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진 것을 계기로, 각 주의 민병들은 조지 워싱턴의 지휘 아래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라는 이름으로 편성되었다.5
그렇게 사실상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식민지인들은 여전히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야 한다면서, 식민지 의회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본국 의회와 중재를 해달라는 청원을 영국 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청원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도리어 영국 왕 조지 3세는 식민지가 반란 상태에 들어갔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이처럼, 이 싸움은 굳이 독립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북미 식민지인과 그들을 반드시 진압해야만 하는 영국 본토의 싸움이었으며, 오합지졸 식민지 군대와 강력한 영국 정규 군대의 싸움이었다. 사실, 누가 봐도 이 싸움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 너무도 뻔했다.
그러나 첫 번째 반전이 북미 영국 식민지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내전이 본격화하자, 그들은 토마스 페인이라는 사람이 쓴 『상식(Common Sense)』의 내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 책의 내용은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삼아 왕에 대한 막연한 충성심과 향수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북미 식민지인들의 노선은 자치권 보장과 불합리한 규제 철폐에서 독립 쟁취로 빠르게 변화했다. 결국, 그들은 1776년 7월 4일에 필라델피아에서 대륙의회를 열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북미 대륙의 영국 식민지가 더는 영국 땅이 아님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7
▲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는 13개 주(州) 대표들
두 번째 반전은 전쟁터에서 일어났다. 최강의 영국 군대가 전면전을 피하면서 약삭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한 민병들에게 크게 고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민병들이 버텨주자 전쟁의 판이 바뀌고 말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패한 뒤, 영국에 앙갚음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프랑스가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대륙군’도 더는 오합지졸이 아닌 정규 군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뒤집힌 전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783년에 식민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조약을 파리에서 체결한 뒤 철수하고 말았다.8
이처럼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확보’였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이성주의가 북미 대륙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더불어, 계몽주의라는 잘못된 토대 위에서 사람의 이성과 경험이 사용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사회 기조 자체를 바꾸려고 했던 에드워즈의 노력이 실패했음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래서 1787년에 예일대 학장을 지낸 에즈라 스타일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마치 잠깐 스쳐간 것이 곧 잊혀지는 것 같이, 다음 세대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후손들은 도서관 한 구석에 방치된 그의 작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즐거워하는 희귀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괴상하고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9
그러나 역사는 이번에도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성주의가 약속했던 지상 낙원이 허상이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의 여파로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종착지는 참 역설적이게도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 정치였다. 사람들은 이성이 낳은 무시무시한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결과,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성(理性)은 확고 불변한 진리를 발견하고 수립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하나 둘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유럽 지역에서는 이성의 기계적 사고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거 낭만주의로 빠져드는 반향이 일어났다. 북미 대륙에서도 그러한 반향이 나타났지만, 유럽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부흥의 불길을 기억하고 그리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아주 강하게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 결과, 1800~185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는 제2차 대각성이라고 부르는 부흥의 불길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 기간에 에드워즈는 북미 대륙에서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 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런 부흥조차도 이성의 끈질긴 반역 행위를 뿌리 뽑지는 못했다. 제2차 대각성이 한창 진행 중이던 바로 그때, ‘신비평(new criticism)이라고 불린 고등비평학이 독일에서 건너와 유니테리안주의라는 이단 사상을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했다.10 또한, 찰스 피니 같은 이들은 원죄와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교리 항목을 거부하고, 작위적인 방식으로 사람의 감정적 반응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헛된 일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11
▲ 1839년에 그려진 감리교(Methodist) 집회 모습
– 사람들이 쓰러지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등의 모습이 집회의 특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도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전반적으로 건전한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으며, 미국 너머에 있는 영혼까지도 구원하려는 선한 열심으로 가득했던 운동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선교사가 들어와, 우리 민족이 드디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되는 감격스러운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청교도에 호의적인 복음주의 장로교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제2차 대각성의 신학적, 영적 토대를 제공한 장본인인 에드워즈에게 참으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수많은 선교사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고취시켜 주었고, 희생적 섬김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상은 1837년에 메리 라이언(Mary Lyon)이 설립한 여성 학교 마운트 홀리오크 신학교(Mount Holyoke Seminary)에서 제도화되었다. 마운트 홀리오크는 미국 여성들이 남자들과 함께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제공한 학교로 잘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학교는 한 역사가가 “19세기의 제루샤 에드워즈들”로 묘사한 수많은 해외 선교사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12
에드워즈의 후천년적 전망은 빗나갔지만,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부흥이 반복되며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리라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후기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에드워즈의 저서를 여전히 즐겨 읽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책은 미래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즐겨 읽힐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를 새롭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조나단 에드워즈,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사랑한 사람
에드워즈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에드워즈’ 하면 ‘대각성’이나 ‘대부흥’,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 등을 떠올린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것들이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을 대표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다소 본말(本末)이 뒤집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드워즈는 평생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아름다우심에 사로잡힌 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힘에 의지하여 고되고 힘든 주님의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해나갔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에 깊이 마음을 두는 모습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때는 바로 회심 때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회심하기 전에도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친구들에게 신앙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등의 일을 하던 모범적인 소년이었다.13 그러나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만사를 자기 뜻대로 결정하는 나쁜 독재자요, 폭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는 그런 하나님이 몹시 싫고 두려웠으며, 그의 탁월한 지성은 그에게 하나님께 등 돌리는 일이 합리적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충분하게 제공해주었다.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탁월한 지성과 이해를 초월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부르셨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보였던 그의 높고 단단한 마음이 한순간에 변화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지극히 정당하고 공정하다는 사실을 지성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그 일을 통해 죄인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깨달아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회심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고 있었다. 만세(萬世)의 왕이며 썩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부분이 그의 심령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며 무한히 영광스러우신지를 깊이 인식하는 일에 완전히 사로잡혔다.15
그날 이후, 에드워즈는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들판을 거닐며 하늘을 우러러보면,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위엄에 대한 인식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자연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유하심, 거룩하심, 장엄하심을 보면서 그의 심령은 고양되곤 했다. 모든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로우심과 순결하심과 사랑은 그의 심령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즐겁게 했다. 심지어 그를 몹시 두렵게 했던 천둥 번개조차도 하나님의 위엄을 상기시켜주면서 그의 심령을 기쁨으로 가득하게 할 정도였다.16
이처럼, 거듭난 에드워즈는 언뜻 보기에 두렵고 어두운 일, 나아가 불합리하고 가혹하게 보이는 일에서조차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지 항상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대각성의 불길이 사그라지는 일을 보면서도 꺾이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둘째 딸 제루샤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는 개인적인 불행을 교회 안의 청년들을 일깨워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삼았다. 갑작스러운 사위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처럼,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정말로 전부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만 있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별로 상관없었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자녀가 세상을 떠나며, 평생 질병과 싸우고 갑자기 생애가 마무리되어도 괜찮았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다스려 선을 만들어내는 주권자이심을 진실로 믿었기에,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 죄를 허용하신 목적은 그 사랑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하시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최고의, 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위한 희생적 사랑이다. 그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부여받은 사람들-궁극적으로 인간 대다수-은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들은 감상적이지 않은 사랑이 현실의 악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냉담하게 바라볼 수 없고, 오히려 가장 깊은 감정으로 반응할 것이다. 그런 선을 진심으로 바라보면서, 그 선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바라보면서, 가장 직접적인 감각의 만족에 몰두해 있던 것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실재의 진정한 중심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랑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할 것이다.」17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은 지극히 낮고 천한 십자가에서 가장 밝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이들은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모욕과 치욕을 받는 길로 가려고 할 것이다(히 13:13). 모든 일에 항상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고후 1:20).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은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이해하게 하는 데 유익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겪었던 그 많은 환란과 어려움은 그가 믿고 의뢰했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아래 합력하여 오늘도 선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 그의 믿음과 소망은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당한 그 모든 슬픔과 수고는 영원한 천국에서 그를 누구보다도 더 존귀하고 영화롭게 해줄 것이다.
※ 지금까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더 좋은 연재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https://ko.wikipedia.org/wiki/프렌치_인디언_전쟁
2 김성남,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영국의 식민지 억압」, 네이버캐스트, 2012.10.26.
3 김성남, 「13 식민지의 불만」, 네이버캐스트, 2012.10.26.
4 김성남,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영국의 식민지 억압」, 네이버캐스트, 2012.10.26.
5 김성남, 「미합중국의 탄생」, 네이버캐스트, 2012.10.26.
6 같은 글.
7 같은 글.
8 김성남,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 네이버캐스트, 2012.10.26.
김성남, 「요크 타운의 승리」, 네이버캐스트, 2012.10.26.
9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718.
10 https://en.wikipedia.org/wiki/Unitarianism, History 항목
11 같은 책, p. 719.
12 같은 책, p. 720.
13 같은 책, p. 54.
14 같은 책, pp. 74, 75.
15 같은 책, p. 76.
16 같은 책, pp. 77~79.
17 같은 책, p. 727.
(※ 한 주간 1 명, 총 1,002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