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 편에서도 지난 편처럼 보름스의 루터 흔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21년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불려 나갔습니다. 보름스 의회는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지만, 루터의 심문은 현재 하일스호프 공원(Heylshof garten)이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공원에는 루터가 심문을 받을 때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일을 기념하는 돌판이 있습니다.
루터 광장(Luther Platz)을 뒤로 하고 찾아간 그 공원은 그리 멀지도 않고 찾아가기도 쉬웠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황제 앞에서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이라고 말한 자리에 놓아두었다는 그 돌판은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기념 돌판은 바닥과 색이 거의 똑같습니다. 오랜 시간 공원 바닥만 보면서 한참 헤맨 끝에야 겨우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돌판을 찾고 나자, ‘좀 더 진한 색으로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래도 너무 쉽게 찾는 것보다는 고생해서 찾는 편이 더 보람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내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섰습니다. 마르틴 루터, 1521년’이라고 쓰여 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돌판 이곳저곳에는 발자국이 많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르틴 루터의 신앙을 기념하는 돌판인데 이렇게 마구 밟고 다녀도 되나?’ 싶어서, 입으로 불고 손으로 흙을 털어내며 돌판 청소를 간단하게 했습니다(별로 표시는 안 났습니다).
그런 다음, 황제와 제후 앞에 서 있었던 루터의 모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얼마나 긴장이 되고 떨렸을까요? 제가 루터였다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곧장 도망쳤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자기 믿음과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라이프치히 논쟁(1519년)이 끝난 뒤, 로마 교황청에서는 눈엣가시인 루터를 손보려고 했지만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로마 카톨릭 편이었던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새로 선출된 황제가 스페인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때에 맞추어 루터를 고소할 준비를 했습니다. 추기경, 교회법 학자, 신학자 등 약 40명 가량을 로마로 불러들였습니다. 때마침, 라이프치히에서 루터와 논쟁했던 에크도 로마로 와서 문제가 될 만한 루터의 발언을 보고했습니다.
여러 번 회의를 한 끝에, 그들은 루터가 주장한 발언 41개를 정죄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1.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가 머리말과 맺음말을 쓴 루터 출교 교서인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일어나소서! 주여!)」가 발행되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 주여, 일어나셔서 주님의 목적을 이루소서!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저들이 주님의 질책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만이 거니시는, 포도즙 틀이 있는 포도원을 전멸시키려고 꾀하는 여우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서 승리의 형상인 포도원에 대한 보호와 규율과 관리의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는 이제 머리이며, 당신의 대리자며, 후계자입니다. 숲속에서 나온 난폭한 수퇘지는 포도원을 전멸시키려고 합니다. 온갖 짐승들이 주님의 포도원을 삼키려고 합니다.
(중략)
이 교회(로마 카톨릭)의 성경 해석이 공격을 받고 있도다. 그 옛날의 여러 가지 이단이 오늘 독일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니 슬픔을 감출 길이 없구나. 짐이 더욱더 상심하는 것은 독일이 언제나 이단 박멸에 앞장을 서왔기 때문이다. 짐의 목회 직분에 비추어 볼 때 다음 41개 오류의 지독한 바이러스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도다(이어서 41개 조항이 열거된다).
(중략)
그러므로 이제 짐은 이 교서가 그의 지역에서 선포되는 날부터 계산해서 60일간의 굴복 기간을 허락하노라. 누구든 주제넘게 우리의 파문과 금지 사항을 어기면 전능하신 하나님과 베드로와 바울 사도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1520년 6월 15일」
▲ 루터를 파문한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초판본 표지
특이하게도, 이 교서에는 루터가 60일 안에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용서해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회의에 참여했던 추기경과 신학자 중에 몇 명이 루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자고 했고, 심지어는 루터를 옹호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루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주장을 철회할 기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내놓은 타협안은 일방적인 항복 권고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루터가 성경과 맞지 않는 주장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어떤 부분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밝혀내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전통과 맞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루터를 정죄했을 따름입니다.
이 교서가 발행되기 전까지 루터는 조용히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그와 논쟁했던 에크가 파문을 선고하는 교서 작성을 주도하여 완성했고, 심지어 독일 지역에 이 문서를 배포하는 임무까지 맡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면서, 자기주장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교서가 작성된 지 8일 후인 6월23일에 루터는 결국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약 2달 뒤인 8월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을 완성했습니다.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De Captiviate Babylonica Ecclesiae)」, 11월에는 「크리스천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를 차례로 출간했습니다. 이 세 편의 글이 바로 그 유명한 「종교개혁 3대 논문」 입니다. 파문당한 루터는 이전과는 달리 저술을 통해 종교개혁을 계속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 세 논문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은 직접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3대 논문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제목 그대로 세속 권력자, 곧 황제와 독일 영주들에게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글입니다.
▲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의 표지
– 이 논문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4,000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한 독일 사람들의 반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줍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루터가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세속 권력자에게 호소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낯설게 다가옵니다. ‘대체 그들에게 왜 이런 호소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루터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당시 세속 군주에게는 교회를 보호하고 백성의 경건을 증진하며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루터가 세속 권력자들에게 종교개혁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만들어놓은 세 가지 담(장벽)에 대해 말합니다.
「낭만주의자들(로마 카톨릭)은 매우 기묘하게 생긴 세 개의 장벽을 가지고 있다. 이 장벽들로 지금까지 자신들을 보호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개혁할 수 없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전체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붕괴되었다.
첫째, 세상 권력으로 그들을 위협하면 그들은 앉아서 말한다. “세상 권력이란 그러한 권리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영적 권력이 세상 권력 위에 있다.”
둘째, 그들을 성경으로 처벌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대항한다. “교황 이외의 어느 누구도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셋째, 공의회로 그들을 위협한다면 그들은 꾸며서 이렇게 둘러댄다. “교황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
루터는 이 견고한 세 가지 장벽을 ‘만인제사장 교리’로(벧전 2:5, 9)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듯,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성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영적인 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게 하려고 세워진 하나님의 일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직자와 일반 신자는 교회의 질서와 유익을 위해 각자 감당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 신분상의 차이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이 ‘만인제사장 교리’를 근거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속 권력자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성도가 정말로 동일하다면, 농부, 상인, 노동자 같은 일반 신자가 세상 권력에 복종하듯이 성직자도 세상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고, 다 한 신앙과 한 복음과 한 성례를 가지고 있다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질 수 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면서 두 번째 장벽을 공격했습니다. 루터는 “불신적인 교황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무엇이 신앙에 적합하고 무엇이 적합하지 않은가를 파악해서는 안 되는가?”라며 그 장벽에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면서 발람의 나귀2와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3를 책망했던 일(갈 2:11)을 언급했습니다. 그 일들을 공성퇴로 삼아, “교황 이외의 어느 누구도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라는 장벽을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벽은, 앞선 두 장벽이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무너졌습니다. 루터는 성경과 교회사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 모든 일에 마침표를 확실하게 찍었습니다. 성경에는, 첫 번째 공의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베드로가 홀로 소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도가 함께 소집했다고 나옵니다. 또한, 사도 시대 이후의 첫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년)도 로마의 주교가 아닌 황제를 통해서 소집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교회 내부 문제와 독일 사회의 문제점(경제, 정치, 사회, 교육 등)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면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독일 귀족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당부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올바른 심령과 영적인 용기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의 독특한 점은, 루터가 스스로 다음에 쓸 책에 대해 예고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 3대 논문을 하나의 연속 출판물로 구상했던 것 같습니다.
「아! 나는 로마(카톨릭)와 저들에게 대한 또 다른 작은 노래를 알고 있다. 만일 저들의 귀가 듣고 싶어 근질근질하다면 나는 그 노래도 역시 부르겠다.」
루터가 예고했던 논문은 그해 10월에 출판되었는데, 그 논문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고생했던 것처럼, 교회의 성도들도 로마 카톨릭이 고안해낸 잘못된 성례전의 포로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번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잘못된 장벽 세 개를 세웠다고 하면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첫째는 성찬 때 회중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 둘째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 셋째는 예수님의 희생이 반복되는 미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회중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을까요? 로마 카톨릭 측에서는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회중이 포도주를 마시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훼손하는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라는 속담이 떠오르는 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만인제사장 교리를 다시 앞세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 직분을 받았는데, 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사제가 영적으로 더 뛰어난 것인 양 행세를 하느냐?”라고 하면서 회중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고 복종만 요구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서, 루터는 화체설을 비판했습니다. 사제가 축성할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이 교리 때문에 사제와 평신도라는 장벽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터는 참 안타깝게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찬론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있게 하려고 빵과 포도주가 변질될 필요는 없으며, 두 가지가 다 있는 그대로 동시에 거기에 존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빵은 내 몸이며, 이 포도주는 내 피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성찬론은 빵과 포도주, 그리고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공재설(共在說)이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성찬론은 훗날 츠빙글리의 성찬론인 기념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을 제사의 의미로 거행합니다. 즉, 그들은 미사를 시행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매번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게 하는 셈입니다. 루터는 성찬이 희생 제사가 아니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므로,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 「교회의 바벨론 포로(De Captiviate Babylonica Ecclesiae)」의 표지
이 책이 출간된 지 며칠 뒤에, 드디어 교황의 교서가 루터에게 도착했습니다.4 그는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죄한 41개 조항을 철회할지 말지를 60일 안에 결정해야 했습니다. 여러 도시에서 루터의 책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세 번째 논문인 「크리스천의 자유」를 썼습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루터가 이 책을 자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교황의 사절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여러 차례 루터를 만나 교황과 루터가 화해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스승인 슈타우피츠까지 만나서 루터를 설득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 때문에, 루터는 ‘화해의 편지’와 함께 이 논문을 교황에게 헌정했던 것입니다.
밀티츠는 루터에게, 교서를 받기 전인 9월 6일에 세 번째 논문을 쓴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편지와 책이 교서와는 상관없이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교황이 과연 루터의 편지와 논문을 읽어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편지가 교황과 화해를 이끌어내기에는 정말로 부적합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교황이었다면, 당장 루터를 잡아들이라고 하면서 논문은 아예 한쪽으로 치워버렸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의 자유」는 루터의 글 중에서 가장 세련되고 감미롭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루터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두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主)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從)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그렇게 말한 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서로 잘 조화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목적에 훌륭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내적인 신앙과 외적인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이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에게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사랑 가운데 머문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요 1:51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제 자유에 대한 설명은 충분할 줄로 안다.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이고 참된 자유이며, 모든 죄와 율법과 계명에서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켜주는 자유이다. 이것은 바울이 딤전 1:9에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늘이 땅보다 더 뛰어난 것과 같이 이 자유는 외적인 다른 모든 자유보다 더 뛰어나다. 그리스도시여! 우리로 이 자유를 이해하고 보존하게 하시옵소서. 아멘.」
▲ 「크리스천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의 표지
출처: (CC BY-SA) Wolfgang Sauber (wikipedia)
이 책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제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이 세 논문을 펴낸 뒤, 주장 철회가 가능한 마지막 날인 12월 10일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비텐베르크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내린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습니다. 이에 화가 난 교황은, 1521년 1월 3일에 「로마 교황이 하는 일은 옳다(Decet Romannum Pontificem)」라는 교서를 발행하여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파문’은 이생은 물론이거니와 내세에서도 영원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저주이자 사형 선고였습니다. 이 파문을 끝으로,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영원히 결별하게 됩니다.
이제, 루터 문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파문당한 루터가 이생에서 받을 벌을 내려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편에 섰던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도 그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루터 문제를 보름스 의회에서 해결하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습니다.
「첫째, 루터의 개혁 사상이 영주와 신학자들 앞에서 공정한 심문을 받아야 함.
둘째, 그 심문은 로마가 아닌 독일 지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
셋째, 만일 루터가 보름스에서 심문을 받는다면, 그곳으로 오는 동안 그의 신변을 보호해줘야 함.」
비록, 황제는 로마 카톨릭을 옹호했지만,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작센 영주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루터의 초청을 철회했다가 다시 초청하여 보름스로 오게 하는 등, 이랬다저랬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황제가 대관식에서 서명한 신성로마제국 헌법에는 마치 루터를 보호하려는 듯한 조항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독일인은 누구나 그 지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독일 밖에서 심문을 받을 수 없다.’라는 조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고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지 않고 시민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황제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르틴 루터는 결국 보름스에 도착했습니다. 보름스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됩니다. 보름스에 도착한 다음 날, 루터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황제,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 대표 앞에 섰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책들을 썼는지, 그 책의 내용을 철회할지 말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는 본인이 그 책을 썼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다가,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루터는 생각할 시간 하루를 얻었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생각을 정리한 루터는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자기 입장을 밝혔습니다.
「가장 평온하신 황제, 가장 저명한 군주님들, 가장 온정이 많은 영주님들이시여!
용서를 바라고 이렇게 당신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따리꾼이 아니고 수도사입니다. 어제 당신들께서는 제가 집필한 책의 내용을 부인할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그 작품들을 썼습니다. 제 작품은 여러 주제를 다룹니다. 어떤 것은 믿음과 삶을 다루기 때문에 단순하고 복음적이어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저를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작품을 읽어야 합니다. 교서 자체도 저의 모든 작품들이 한 주제를 다룬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이 작품들을 포기하면 저는, 친구들과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고백했던 진리를 매도하는 유일무이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저의 작품들은 기독교계를 황폐하게 만드는 교황의 가르침과 사악한 생활방식에 반대하여 쓴 글입니다. 대체로 불만 있는 사람들이 교황이 정한 법으로 인해 그들의 양심이 고문을 당하고 있음을 증명할 때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직설적인 행동과 태도보다도 저의 본질적인 것에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저는 제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제가 쓴 내용이 독단적이거나 불경건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안나스 앞에 서셨을 때 “증거하라!(요 18: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류가 전혀 없는 우리 주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면 벌레와 같은 제가 선지서들과 복음서들에서 드러난 오류를 찾아 바로 잡아 줄 수는 없겠습니까? 저는 자기 작품이 불에 던져진 최초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대답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43)”.
…(중략)…
황제 폐하와 군주들께서 간단한 대답을 원하신다면 솔직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저의 견해가 성경과 소박한 이성에 비추어 볼 때 잘못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저의 양심은 모순된 교황법과 종교회의의 권위로 인해 어떤 것이라도 철회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 결코 바르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아멘.」5
루터의 놀랍고 감동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루터에게 사형 선고와 같은 보름스 칙령 최종안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더럽히고, 고백을 헐뜯었으며,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부정했다. 그는 성례의 효력을 받는 사람의 믿음에 종속시키고 있다. 그는 이교도처럼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있다. 이 마귀는 수도사의 탈을 쓰고 케케묵은 오류들을 구역질 나는 한 웅덩이로 모아 놓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오류들을 고안해 놓고 있다.
그는 열쇠의 권세를 부인하며 평신도들에게 성직자들의 피로 손을 씻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의 방향은 반역, 분열, 전쟁, 살인, 강도질, 방화 그리고 그리스도 교권의 붕괴다. 그는 짐승처럼 살고 있다. 그는 교서를 불사른 자다. 그는 금지령과 짐(朕, 카를 5세를 말함-편집자 주)을 다같이 무시한다. 교직 제도의 권세보다 세속계의 권세에 그가 끼치는 해독이 더 크다.
우리는 그를 달래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는 성경의 권위만 인정하며 그 성경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4월 15일부터 21일간의 여유를 주었다. 이제 대의원들이 모여 루터를 확정된 이단으로 취급하려는 바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그를 따스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책들은 인간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이렇게 루터는,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말끔하게 지워져야 할 저주받은 존재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종교개혁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습니다.
▲ 하일스호프 공원 입구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
– 약간 부식된 흔적도 엿보입니다.
공원을 들어갈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못 봤던 안내판을 나오는 길에 발견했습니다. 그 명판에 기록되어 있는 말을 저번에 도움을 주셨던 사촌 누나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곳은 서양의 가장 기념할 만한 장소 중의 하나이다. 로마인의 거룩한 사원 지대, 니벨룽겐의 성벽, 카를(Karl) 대제의 황궁, 후작 지위를 가진 보름스 주교의 법정이었으며, 1689년과 1794년에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수의 의회와 영주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마르틴 루터가 황제와 제국(영역) 앞에 서기도 했다.」
이제, 보름스 의회가 열린 보름스 대성당(Wormser Dom)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어, 하일스호프 공원이 세워진 자리에서 루터가 심문을 받았다고 해놓고 다른 곳에서 보름스 의회가 열렸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 보름스 의회는 루터 문제만 다루려고 열린 의회는 아니었습니다. 보름스 의회에서는 루터 문제와 함께 다른 현안들도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한 곳에서만 열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열렸습니다. 그 많은 장소 중에서 루터를 심문했던 장소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름스 의회가 개최되었음을 알렸던 장소인 보름스 대성당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만약, 루터가 심문을 받았던 장소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해도, 로마 카톨릭 소유지인 그곳에 루터를 기념할 만한 무엇을 설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원 바닥의 그 작은 기념 돌판도 분명히 설치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이 성당은 공사 중이었지만, 다행히 건물 출입을 막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늘 걱정했던 입장료도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성당이 그렇게 커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진기로 한 번에 모습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건물 규모가 정말 엄청나기는 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독일은 문화 유적을 보존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소중한 유산들을 후대에 잘 물려주려는 이유가 더 클 것입니다. 저는 대성당을 돌아보면서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건물들이 보존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한데, 나중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들이 물려준 귀한 영적 유산을 잘 보전해서 다음 세대에게 잘 전해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루터도 그 일을 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과 그들의 뒤를 이은 속사도와 교부가 피땀을 흘려 정리한 정통 교리를 다시 찾아내어 후대에 잘 전해주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갉아먹고 암흑 속에 파묻어버린 바로 그 진리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성경의 가르침은, 루터의 뒤를 이은 수많은 종교개혁자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 잘 보전되어 우리에게까지 잘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진리를 보전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이 진리를 지키고 후대에 잘 넘겨주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당 안쪽은 아주 화려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해도 속은 아주 더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함께, 과연 제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한 속마음이 아닌, 화려한 겉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에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당을 빨리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문 장소였던 마그누스 교회로 향했습니다.
보름스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그누스 교회는, 보름스에서 가장 먼저 루터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보름스 대성당에 비하면 규모는 매우 작았지만,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늠름하고 용감하게 보였습니다.
평일 아침에 교회를 찾아갔는데, 몇 명의 학생과 선생님이 어떤 수업(?)을 하는 듯했습니다. 선생님 몇 분이 저를 힐끗 쳐다보시기는 했지만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학생과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국인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자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습니다.
보름스 대성당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다가, 마그누스 교회의 단조로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곳곳에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잔재가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육체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보름스 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 출석했다가 비텐베르크로 향하던 중에 ‘괴한(?)‘에게 ‘납치’당해 머무르게 되었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각주
1 어떤 이는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 중에서 41개 조항을 정죄하였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예언자를 반대하게 하셨다면, 한 의인을 통해서 교황에게 반대하실 수는 없겠는가?”
3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라고 주장합니다.
4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10월 6일에 출간되었고, 교황의 교서는 10월 10일에 도착하였습니다.
5 이 유명한 루터의 발언은 많은 책에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의 글은 라은성 교수의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에서 인용했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6.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익투스, 2012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8.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지원용 옮김, 컨콜디아사, 1993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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