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슈토테른하임)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여러분은 ‘종교개혁’하면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나십니까? 분명히 마르틴 루터의 이름을 떠올리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번 글부터는 바로 그 루터의 생애와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독일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 아주 많은 데다 관리도 매우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의 흔적을 찾아서 이 도시 저 도시(총 8곳)를 돌아다니다 보니, 전체 탐방 기간 가운데 가장 긴, 약 10일 정도를 독일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방문했던 도시마다 한 편씩 글을 쓴다면, 아마도 내년 말이나 내후년 즈음이 되어야 루터의 탐방기를 마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루터의 탐방기를 준비하면서 국내에 출간된 루터 관련 책이나 전기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난 탐방기의 주인공인 얀 후스에 관한 책은 많이 없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은 유명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기억하고, 좀 덜 유명한 사람은 적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루터에 대한 자료들이 시중에 풍성하게 나와 있어서 참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책을 참고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은 만큼, 세부적인 대목에서 진술이 엇갈리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터와 마가렛 지글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어떤 책에서는 그가 둘째였다고 진술합니다). 루터의 부모는 그 다음 날인 11월 11일에 아이를 성당으로 데려가서 세례(영세)를 받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마르틴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아이가 세례를 받은 그 날이 바로 ‘성자 마르틴(Saint Martin)’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이 사실에 관해 검색하던 도중, 천주교 누리집(웹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현재, 로마 카톨릭이 성인(聖人, 로마 카톨릭에서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하도록 공식 선언된 사람)으로 추대한 사람이 무려 6,300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누리집에서 11월 11일을 검색해보니, 그날에 해당하는 10명의 성인 이름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루터의 부모는 그중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아이 이름을 지어야 좋을지 한동안 고심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루터가 태어난 다음 해, 루터 가족은 만스펠트(Mansfeld)라는 곳으로 이사를 합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원래 농부였지만, 이사한 곳인 만스펠트가 광산 마을이었으므로 그는 직업을 광부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광업으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루터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좋은 교육’이란, 아버지의 세속적인 염원을 따라 법률가로 성공하기 위한 교육이었지만 말입니다.
만스펠트에서 유년기를 보낸 루터는,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501년에 에르푸르트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사와 철학석사 과정을 짧은 시간에 수료하였습니다. 1505년이 되자 루터는 마침내 아버지의 원대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훌륭한 법률가가 되어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루터가 계속 그 길을 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루터가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한 지 6개월이 지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준 어떤 사건 하나를 일으키셨습니다. 루터는 그 일로 인해 삶의 방향을 자신이나 타인, 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게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날 루터는 만스펠트에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 뵙고 에르푸르트(Erfurt)로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던 도중 갑자기 심한 폭우를 만났습니다. 세찬 장대비가 몰아치다가 돌연 그의 옆으로 큰 벼락이 떨어졌습니다(어떤 책에서는 이때 루터와 함께 가고 있던 친구가 그 벼락에 맞아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루터는 그 벼락에 너무 놀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도와주소서. 성 안나여,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그 뒤로 루터는 법학도가 되기를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루터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그 일을 반대하며 루터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세상의 말처럼,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의 굳은 뜻을 결국 꺾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제가 된 루터가 첫 미사를 집전할 때가 되자, 루터의 아버지는 친히 찾아와서 그 일을 축하해주었습니다(그러나 2003년에 개봉한 영화 <루터>에서는, 그때 루터의 아버지가 루터에게 화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곳은, 루터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했던 바로 그 슈토테른하임입니다. 슈토테른하임에서는 벼락이 내리쳤다는 자리에 루터의 돌을 세워 그 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탐방에서는, 루터가 유년 시절을 보낸 만스펠트는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계획을 짰는데도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탐방 일정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다시 독일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곳을 꼭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독일은 선진국답게 교통이 잘 발달해 있는 편이어서, 한 지역을 거점 삼아 그 주변의 여러 곳을 둘러보기 참 편합니다. 그 도시에서 한동안(3~4일 정도) 머물면서, 아침에는 그곳에서 나와 주변 여러 곳을 둘러본 뒤에 저녁에는 다시 돌아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이동하면서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등에 멘 무거운 짐이라는 고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탐방의 거점 도시로, 소시지 하면 생각나는 독일 중부의 유명한 상업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선택했습니다(그러나 프랑크 소시지는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아주 가까운 호스텔 한 곳을 숙소 겸 탐방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 호스텔은 제가 머물렀던 곳 중에 가장 좋은 호스텔이었습니다. 역에서 가깝고, 시설도 깨끗하며, 비용도 저렴한 데다가, 아주 맛있는 아침 식사까지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빵과 신선한 채소, 햄과 치즈, 다양한 맛의 시리얼과 담백한 우유… 그곳에서 먹은 아침 식사는 지금까지도 가끔 기억날 정도로 참 풍성하고 좋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일찍 일어나 호스텔에서 준비해 준 식사를 맛있게 먹고 난 뒤 부랴부랴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여러 도시를 둘러 보려고 했으므로, 가능한 한 빨리 움직여야 했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였던 슈토테른하임은 에르푸르트 시(市)에 속한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그러다 보니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번에 그곳으로 가는 차편이 없어서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도착해보니 슈토테른하임 역은 마치 우리나라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간이역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작고 오래된 역이었습니다. 독일로 넘어온 뒤로 줄곧 최신식 건물만 보다가, 이런 건물을 보니 참 운치 있고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곳 사람들은 다른 곳의 사람들보다 왠지 더 친절할 것만 같았습니다.
기차역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긴 도로가 나왔습니다. 이 도로의 이름은 “루터슈타인베크(Luthersteinweg)”로서, 해석하면 ‘루터의 돌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독일에는 루터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많습니다. 또한, 프랑스와 스위스에는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인 칼빈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아주 많습니다.
비록 우리는 그분들을 이 세상에서 직접 만나 뵐 수는 없지만, 그분들이 힘써 진리를 증거하셨던 지역의 길과 거리에서 그분들을 간접적으로 만나 뵐 수 있습니다. 거리에 남아있는 그분들의 이름과 만날 때면, 당시 영적인 잠에 깊이 빠져든 당시 세상을 진리로 흔들어 깨운 그분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런 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위 사진의 오른편에는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 한 채 나옵니다. 저는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또 산다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마을이 한적한 시골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그런 것이었을까요? 저는 루터슈타인베크를 걷는 동안, 차나 사람을 전혀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날씨가 좀 우중충했다면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었겠다 싶을 정도로 마을은 한적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아주 맑고 화창해서, 그런 한적함이 즐거움과 상쾌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길을 걸어가면서 좋은 날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꽤 먼 거리(약 1.5km)를 걸어갔습니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공기도 아주 깨끗하고, 주변 경치도 참 좋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여행을 가면, 주로 대도시를 돌면서 관람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시골 마을도 대도시 못지않게 아주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서인지 이런 시골 마을의 정취가 너무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그 먼 길을 걷는 동안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걸을수록 상쾌하고 마음이 가벼워져만 갔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드디어 저만치 루터의 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은, 무언가를 책을 통해 보는 것과 실제로 찾아가서 보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두고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본 뒤에 계획을 세워서 해당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면,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울 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여행 준비를 하듯 성경 본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연구도 하면서 성경을 보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의미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실제적으로 대해야지, 의무적으로 읽어 넘겨 버릇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그 긴 거리를 걸어오면서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심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루터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길을 걸었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했던가요?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유명한 유적지에서는 사람 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에 오니 그래도 사람이 몇 명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금세 생각이 바뀌니 말입니다. 저만치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터의 돌을 바라보면서, 저도 참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루터의 기념비는 높이가 약 2m 정도 되는 큰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 기념비는 1917년에 세워졌고, 에르푸르트 주민이 기부한 화강암(스웨덴산)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 주민들이 종교개혁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념비 정면에 새겨 넣은 글귀는 이렇습니다.
「Geweihte Erde(거룩한 땅)
Wendepunkte der Reformation(종교개혁으로의 전환점)
In einem Blitz vom Himmel wurde dem jungen Luther hier der Weg gewiesen(하늘로부터 오는 번개 속에, 이곳에 있던 젊은 루터를 향한 그의 길이 제시되어 있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을 향한 여정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번개 사건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뜻입니다. 또, 기념비의 다른 면에도 각각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기념비의 다른 면에 쓰인 글귀 – 1505년 7월 2일
아마도 루터에게 이날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일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느닷없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건을 계기로 그 길로 나아갈 것을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향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면서 그 첫걸음이 수도사라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루터가 태어나고 자란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그 시대는 로마 카톨릭이 거의 천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의 권력 강화와 지배 체계 유지를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에 자생하던 토속신앙과 미신을 근절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에 기독교적인 색채를 조금 더하여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천 년에 걸친 중세 기간 동안 사람들의 삶에는 온갖 미신과 더러운 관습들이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은 구원 문제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자신을 따르게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각자의 선행(善行)에 달려있다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에 넘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에는 부족할 뿐인 자기 공로에 대해 항상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모자란 자기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두려워하면서, 온갖 고행(苦行)과 선행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사제가 시키는 일이면 무조건 따랐습니다. 심판이 두려워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은 자비하신(?) 하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인들의 중보를 찾았습니다.
그런 일에 재미 들린 로마 카톨릭은 결국 기가 막힌 돈벌이 수단 하나를 고안해내는 데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을 자기 공로에 몰두하게 한 카톨릭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이를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람은 천국에 가기 전에 우선 연옥에 들러 못다 씻은 죄를 씻어내야 한다는 지극히 겸손한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고통스러운 정화의 기간을 거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공로의 수단인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런 수지맞는 장사로 거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계속 피폐하고 가난해져만 갔습니다.
또, 루터가 그런 결정을 한 데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의 위협과 요설(饒舌)에 심각하게 속아 넘어가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또 다른 요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루터는 일반 사람보다 마음의 요동이 심한 편에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 즐거워하다가도 돌연 침울해지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멸망하느니 차라리 수도사의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점점 마음 안에 깊이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다룬 어떤 책에서는, 루터가 세 가지 사건을 거쳐서 수도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로는,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일입니다. 그는 그때 고대 인문주의자들과 중세 철학자들의 글을 읽게 되었고, 또한 그때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때부터 성직자의 길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는, 번개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실수로 칼에 의해 동맥이 끊어진 일입니다. 그때, 루터는 어지러울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의사가 일찍 도착하여, 다행히 제때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런 일을 겪은 뒤에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하나는 바로 이 번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루터를 번개를 통해 크게 두렵게 하심으로써, 그의 입에서 수도사가 되겠다는 고백을 끌어내셨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짓된 권세 아래 태어나고 자라나지 않은 우리에게는 이런 걸음들이 다소 더디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참 자유를 선물로 주시기 위한 선한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라는 사람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써 조금씩 밝은 빛으로 인도해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념비의 또 다른 면에 쓰인 글귀 – 성 안나여,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하면서 ‘성 안나’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 바로 안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어릴 때부터 늘 해오던 대로 안나의 이름으로 서원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 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 기념비의 마지막 면에 쓰인 글귀 – 튀링겐 지방에서 빛이 나오다
저는 이 글귀를 처음 보았을 때, ‘튀링겐’ 지방이 루터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이 속해 있는 주(州)인 줄 알았습니다. 루터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는 줄로 이해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튀링겐 주(州)는, 이 기념비가 있는 슈토테른하임 마을과 그 마을이 속해 있는 에르푸르트 시(市)를 포함하는 주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귀는 루터라는 사람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귀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번개 사건을 기점으로 삼아,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다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루터의 돌 사면(四面)을 둘러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 뒤, 슈토테른하임 역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면서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저에게도 루터와 조금 비슷한(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의 저는 참된 지식 없는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고, 회사(기독교 관련 단체)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A형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발견하고 치료했다면 아마도 별일 없이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괜찮겠지 하면서 그냥 방치해서, 치료가 좀 쉽지 않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간염을 치료하면서 병원에서 보낸 2주 동안, 저는 마치 중세시대와 같은 어두움에 짓눌렸었습니다. 간이 좋지 않으면 위에도 나쁜 영향이 갑니다. 그래서 간 질환이 심해지면 아무 음식도 먹을 수 없고, 억지로 먹어도 금방 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몇 주 생활하니, 몸은 점점 말라가고 거의 뼈만 남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겨우 병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와 몸을 추스르던 중에, 저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개혁신앙이 참된 기독교요, 참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개혁신앙의 뿌리인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저는 큰 다짐과 함께 그동안 다니던 교회와 직장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렴한 유럽행 비행기 표를 발견했고, 이렇게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병을 저에게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제가 개혁신앙을 알 수 있었을까요? 또 제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렇게 참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발자취를 직접 발로 좇아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신자들을 미리 계획하신 선한 길로 한 걸음씩 인도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번개 사건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비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라는 밝은 빛을 향한 위대한 섭리의 출발점입니다. 그 번개가 단번에 어두운 하늘을 가르듯이,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통해 카톨릭의 짙은 어둠을 일거에 걷어내려고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음 탐방기에서는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시작한 에르푸르트로 가보겠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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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 한 주간 1 명, 총 1,883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