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5)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김재호
1. 프린스턴 학장과 갑작스러운 죽음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분명히 그곳에서 저술에 전념하다 생을 마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한적한 변방 지역에서 생을 마칠 것만 같았던 그를 프린스턴 대학교로 불러내셨다.
프린스턴 대학은 원래 뉴어크에서 뉴저지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으며, 에드워즈의 사위인 아론 버가 학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1756년 11월에 학교를 프린스턴으로 옮기면서 학교 이름도 프린스턴 대학으로 바꾸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듬해인 1757년에는 마치 이 새로운 대학의 출범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큰 부흥이 찾아왔다. 그 부흥은 이 대학이 이성주의로 쇠락해가는 북미 지역의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1
▲ 프린스턴 대학 본관, 나소 홀(Nassau Hall)
그러나 그해 9월, 대학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대학이 새롭게 출발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조나단 벨처 주지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고령이었던 주지사는 아무런 사전 징후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얼마 뒤에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벨처의 장례식에서 설교했던 아론 버 학장이 3주 동안 열병과 고열에 시달리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 것이었다.2
하루아침에 든든한 기둥 둘을 잃어버린 대학교는 급히 평의회를 열어 후임 학장으로 에드워즈를 선임하기로 뜻을 모았다. 평의회는 에드워즈에게 6주 안에 학장으로 부임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초청의 편지를 띄웠지만, 에드워즈는 재정과 성품상의 결점 및 저술할 시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를 고사(固辭)했다.3
그러나 평의회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즈가 제시한 이유는 얼마든지 절충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재정 문제는 스톡브리지에서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조금 더 주면 되는 것이었고, 성품상의 결점은 학장을 못 맡을 만큼 심각한 이유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가장 문제가 되는 저술 시간 부족은 에드워즈가 적게 강의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절충할 수 있었다.
결국, 에드워즈는 신학만 직접 가르치고, 4학년 학생에게 문학과 과학을 가끔 강의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에드워즈 학장 부임 문제는 목회자 협의회로 넘어갔다. 그리고 1758년 1월 4일, 협의회가 에드워즈에게 대학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함으로써 약 7년 동안 이어진 에드워즈의 스톡브리지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4
그렇게 학장 부임이 최종 확정되자, 에드워즈는 프린스턴으로 먼저 건너가 맡겨진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에 가족을 그곳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면서 근처에 사는 가족과 함께 천연두 예방접종을 했다. 이는 당시 프린스턴 지역에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5
그런데 그때만 해도, 소량의 균을 몸에 집어넣어 병을 예방한다는 예방접종 개념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안전성을 의심하면서 예방접종을 꺼리며 기피했다. 그 거부감과 공포감이 얼마나 컸는지, 약 50년 뒤에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을 병원균으로 사용한 종두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예방접종을 받으면 소가 된다는 괴소문이 돌 정도였다.6
▲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우두(牛痘, The Cow Pock)>
– 당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잘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예방 접종은 이미 수많은 임상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입증되어, 영국 왕실에서도 솔선수범하며 모두가 접종하기를 권하고 있었다. 과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에드워즈는 예방접종의 효과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막연한 공포감과 거부감을 갖고 있는 시민들에게 대학 학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7
그러나 엄청난 연구와 저술에 골몰하던 에드워즈의 몸은 그렇게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말년의 그를 직접 본 어떤 사람은 너무도 창백하고 기력 없는 그의 모습에 산 송장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의 몸은 예방접종으로 침투한 소량의 병원균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약해져 있었다.
접종 뒤, 약 3주 동안 심한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면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던 그는, 결국 1758년 3월 22일에 하나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8 인생 3막이 오르는 듯했던 에드워즈의 생애는 그렇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마지막이 에드워즈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남편이자 전임 학장인 아론 버를 떠나 보내고 한층 더 신앙이 성숙해진 에스더 에드워즈에게도 찾아왔다. 그리고 아직 스톡브리지에 머물고 있었던 에드워즈의 아내인 사라 에드워즈에게도 찾아왔다.
에스더는 아버지와 함께 예방접종을 받고 난 뒤 간단하게 앓고 회복하였으나, 곧장 급성 열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사라는 그렇게 갑자기 고아가 되고 만 손자, 손녀(에스더의 자녀)를 거두어 키우려고 필라델피아를 다녀왔다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9
이러한 에드워즈 가문에 들이닥친 연이은 죽음은 우리에게 참으로 낯설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는 사람의 기본적인 정서가 ‘해피 엔딩(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에드워즈 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복지·의료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부분도 있다.
에드워즈가 살아간 시대는 질병과 재앙과 죽음이 일상생활 가운데 늘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그 시대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죽음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다. 항상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만 믿고 섬기는 신앙, 곧 약속하신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매사에 감사하며 살았다.
▲ 아버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하늘나라로 부름 받은 에드워즈의 셋째 딸, 에스더 에드워즈 버의 모습.
갑자기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뒤, 신앙이 급성숙하던 중에 부름 받았다.
에드워즈도 그 신앙으로 가장 아끼던 둘째 딸(제루샤 에드워즈)의 이른 죽음, 노샘프턴의 사임, 스톡브리지에서 당한 고초 등을 묵묵히 감내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높이는 탁월한 저술을 후대에 많이 남겨주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학장 직무를 잘 수행한 뒤, 뭇사람의 존경과 애도 가운데 인생 무대를 내려오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나님께 “이럴 거면 그냥 변방에 두시지 왜 굳이 불러내셨느냐?”라고 항의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선한 섭리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을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았을 때, 에드워즈는 곁에 앉아 있던 루시를 불러(루시가 거의 곧바로 받아 적은 대로)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루시, 이제 곧 떠나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구나. 그러니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전해주렴.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토록 오래 지속되어 온 남다른 연합이 내가 믿기로는 영적인 것이었기에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말해 주렴. 또한 그렇게 큰 시련 가운데서 아내가 기운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너희가 이제 아버지 없는 아이들로 남게 되었지만, 이것이 너희 모두가 한 분 아버지를 찾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분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내 장례식은 버(아론 버를 말함 – 인용자 주)와 같이 치러주길 바라고, 장례식에 사용하는 추가 비용은 선한 용도로 사용해주기를 바란다.”」10
이런 에드워즈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슬픔, 고통,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 모든 것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그의 마지막은 그런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 그분의 주권과 완전하심을 바라봐야 하는지도 잘 가르쳐준다.
에드워즈의 저술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값지고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은, 그가 그 사실을 단순히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생애 전체에 걸쳐 실천하고 확증해 보여주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2. 완성하지 못한 두 대작
에드워즈는 빛과 계몽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이성의 가치와 역할을 잘 이해했으며, 타고난 지적 역량도 웬만한 철학자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러나 그렇게 명석한 에드워즈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혜와 지식이었다.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이성과 계몽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대적하게 하는 큰 걸림돌이자 교만의 공장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미 청년 때부터 모든 지식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을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인식했을 정도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젊었을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의 원대한 계획과 이상은 노샘프턴 교회 면직과 스톡브리지 선교사 부임과 맞물려 조금씩 현실이 되었다.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에서 집필하거나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의지의 자유』, 『원죄론』,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은 모두 하나님을 배제한 채 스스로 작동하려고 하는 이성의 도전을 꺾으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이성과 계몽의 토대를 놓으려는 목적으로 쓴 책이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그 작품들을 토대로 자기 사역의 결정판이 될 두 작품 집필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프린스턴 대학의 편지가 그에게 도착했다. 그가 프린스턴 대학 평의회에 보낸 편지와 남겨놓은 연구 노트를 살펴보면,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작품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마음에 품은 두 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은 『신구약의 조화』였다. 이 작품은 이성이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 당시 이성주의자들은 비평 기법을 통해 성경의 표면적인 난점과 불일치를 지적하면서, 성경이 비이성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했다.11
에드워즈는 그 주장에 대해, 그들이 무언가 ‘이성적’이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기준과 정의가 모호하다고 답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무언가 이성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대상이 증거와 논증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뜻했다. 즉, 어떤 대상에 내재하는 증거와 그 증거가 가리키는 논리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이성적인 방식으로 뜻을 파악하고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 대상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성적’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대상이 그들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를 의미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대상이 증거와 논증의 성격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판명되어야 했다. 이는 눈으로 보는 세상이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므로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보는 세상, 곧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세상은 가상의 세계라고 단정 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12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경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을 근거로 성경이 비이성적인 책이라고 주장하는 행동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성경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참으로 이치에 맞으며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에드워즈는 사람의 유한한 생각 안에 완전히 갇히는 존재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행태야말로 가장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긴 것이다.13 에드워즈에게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내용을 말하는 성경의 증거를 믿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성적인’ 근거와 이유가 너무나 많고 분명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신구약의 조화』를 통해 그 사실을 보여주려고 마음먹었다. 마치 과학자가 상식을 역행하는 듯한 자연 현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일련의 증거를 통해 입증해 보이는 것처럼, 그는 서로 충돌하며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증거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를 증거와 논증을 통해 모두에게 보여주려고 했다.14 즉, 성경은 지극히 이성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경이 참으로 신뢰할 만하며 모순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게 하는 궁극적인 역할을 그러한 ‘외적인 증거’에 두지 않았다. 그는 외적인 증거가 분명히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고, 의심과 회의라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돕는 선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부분이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증거’라고 말했다.15
그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따라 그 사실을 깨닫고 이해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증거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성경이 오류가 없고 신뢰할 만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비평 기법이 성경의 표면적인 난점과 불일치를 파고들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비평 기법 자체를 비평하면서 효용 범위를 제한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외적인 증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목소리를 내게 하도록 ‘지성’을 사용한다. 즉, 에드워즈는 이 책을 통해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따라 성경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외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에드워즈가 완성하지 못한 또 하나의 작품인 『구속사』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즈가 평생 저술하기를 소망했던 이 작품은 이성주의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 당시 이성주의자들은 점점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펼쳐지는 현장이나 무대로 보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자기를 결정하거나 우연의 산물로 보았다.16
에드워즈는 그 관점이 하나님을 역사의 무대로부터 추방하고,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일부 교훈만 얻어내게 하는 반성경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언어와 방식으로 진술한 새로운 조직 신학 체계를 구상했으며, 죽기 전에 그 작품을 꼭 완성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보통 조직 신학 서적은 성경론부터 시작해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을 거쳐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각 세부 주제를 망라하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구상한 『구속사』는 성경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나열하며, 그것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귀납 논증의 형태로 진술하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신학 저술이었다.17
성경의 외적 증거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조화롭게 드러내는가에 관한 책이 『신구약의 조화』라면, 『구속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훼방하는 마귀를 무찌르고 승리하시는지를 보여주는가에 관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확증해주는 ‘외적인 증거’였다.18
「에드워즈는 창조의 위대한 목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명확하게 계시하기 위해 복잡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에 심어 놓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광대한 주제 안에서 모두 풀릴 수 있는 정교한 조화들을 성경에 심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 “신구약의 조화”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구약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문자적 연구가 있었다. 모든 실재는 하나의 기독론적 작품이었다. 에드워즈는 “예표에 대한 노트(Type Notebook)”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마치 언어가 말들로 가득한 것처럼, 온 우주, 하늘과 땅, 공기와 바다, 그리고 성경의 신묘한 구성과 역사가 거룩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믿고, 내가 언급한 모든 것 가운데 대다수가 실제로 이것들이 의미하고 상징하려 했던 것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고 믿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역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속을 전달하는 본질에 속했다. 구속사는 창조의 목적이었다. 창조된 자연이 그 자체로는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그 자체로는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모든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의 의미를 결정했다. 인류의 사건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그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활동과 관련될 때나, 그 사건들이 모든 선한 것에 대한 사탄의 전쟁에 참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줄 때에야 비로소 중요성을 가졌다.」19
하나님께서 왜 에드워즈를 스톡브리지에서 불러내시자마자 천국으로 데려가셨는지 이해하기 어렵듯이, 왜 에드워즈가 평생 저술하기 원했던 이 작품을 그냥 구상하는 선에서 그치게 하셨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기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바라보며 참으로 평안하게 받아들였듯이, 이 두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지 못한 일도 그분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분명히 선을 이룰 것이다. 어쩌면 에드워즈의 미완성 작품과 그의 삶 전체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끝없이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616, 617.
2 같은 책, p. 618.
3 같은 책, p. 620.
4 같은 책, pp. 620~622.
5 같은 책, pp. 710, 711.
6 박중서, 「에드워즈 제너」, 네이버캐스트, 2010. 5. 17.
7 에드나 거스너,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랑한 사람들 (Jonathan and Sarah: an uncommon union)』, 조계광 옮김, 생명의말씀사, p. 243.
8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708, 711.
9 같은 책, pp. 713, 717.
10 같은 책, pp. 711, 712.
11 같은 책, pp. 687~688.
12 같은 책, p. 688.
13 같은 책, pp. 690~692.
14 같은 책, pp. 689, 693~695.
15 같은 책, pp. 695, 696.
16 같은 책, pp. 702, 703.
17 같은 책, pp. 697, 704.
18 같은 책, p. 705.
19 같은 책, pp. 693, 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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