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에르푸르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 탐방기에서는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시작한 도시인 에르푸르트(Erfurt)로 가보겠습니다. 에르푸르트는 튀링겐 주의 주도(州都)입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독일에는 주마다 그 주의 수도 역할을 하는 주도가 있습니다. 대략 서울의 절반만 한 크기인 이 큰 도시에서 제가 찾아간 곳은, 루터가 사제(신부) 서품을 받은 성 마리 성당(St. Mary’s Cathedral)과 수도사 생활을 한 어거스틴 수도원(Augustinerkloster)입니다.
지난 탐방기에서 언급했던 번개 사건 이후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서 에르푸르트 대학을 떠나 어거스틴 수도원(어거스틴 수도회 소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찾아간 수도원은 아주 엄격한 규율을 자랑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잦은 금식, 고행, 기도 등으로 쉬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운영되었습니다.
그래도 루터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잘 감당해냈습니다. 사실, 잘 감당한 정도가 아니라 율법적인 정죄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열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일부 수도원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다닐 정도였습니다. 특히, 그의 고해를 담당한 신부는 아주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루터’ 하면 건장하고 듬직하며 풍채 좋은 중년 남성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생활할 때의 청년 루터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빼빼 마른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하며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는 그 가혹했던 율법적인 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루터는 아내가 만들어준 맛있는 음식을 참된 감사함 속에서 많이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루터’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율법적인 두려움에 찌들어 지내던 당시 사람들에게 참된 신앙의 자유와 결혼 생활의 복됨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탐방 거점 도시로 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에르푸르트까지는 기차로 약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지난 탐방기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독일은 제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차를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고 돌아와야 할 일이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만한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독일의 기차 운송 체계는 참으로 우수합니다. 빠르고 커다란 기차에서부터 자전거와 비슷한 속도로 가는 아담한 전차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차가 독일 구석구석을 편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면서 기차를 많이 타봤지만, 독일만큼 우수한(시설, 청결, 친절 등에서) 기차 운송 체계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 앙거 광장(Der Anger) 근처에 있는 카우프만 교회(Kaufmannskirche)
역에서 나오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광장 주변으로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그중에는 교회처럼 보이는 건물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 건물 앞에 있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동상 하나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동상은 다름 아닌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동상은 1889년에 루터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동상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루터와 관련 있는 도시에서는 그를 기리는 목적으로 세워놓은 동상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 마르틴 루터의 동상
– 동상 밑 부분에는 그의 이름과 성경 말씀(“내가 죽지 않고 오히려 살아서 여호와의 행하심을 선포할 것이다”, 시 118:17)이 적혀있습니다
동상에 표현되어 있는 그의 모습은 하단에 새겨놓은 말씀처럼, 온 세상에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려는 듯했습니다. 비록 루터는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루신 일과 그의 저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오늘도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주고 계십니다. 그 생각을 하니 참으로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이 교회가 루터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인가 해서 안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정도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멋진 시청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다닌 종교개혁 여행책자에서는 이곳에서 루터와 관련된 여러 가지 그림을 감상할 수 있고, 또 여행 정보도 제공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안내하는 직원이 단호한 어투로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개방하지 않는다.”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한국이라는 곳에서 이곳까지 왔으니,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는 간절한 부탁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치 아무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는 듯이 곧장 “OK(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섰습니다. 아마도 부탁해봐야 어렵다는 사실을 그 안내원의 말과 태도를 통해 저도 모르게 직감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멀리 보이는 성당의 모습
– 왼쪽이 성 마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고, 오른쪽이 성 세베루스 성당(St. Severi Church)입니다
제가 에르푸르트를 방문한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면서 마치 장날을 맞은 장터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청년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장년과 노인의 모습이 주로 눈에 띄었습니다. 이 도시도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거리 여기저기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또 무엇을 사고파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에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눈으로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 성 마리 대성당
– 1507년 루터는 이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 걸어가자, 드디어 거대한 성당이 제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성당 안쪽으로 가면 화려하게 꾸며놓은 제단과 18m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만, 별로 그런 것들을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성당 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성당을 수없이 많이 찾아가 보았지만, 성상(聖像)과 같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물품이 없는 성당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신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저 마리아를 존경할 뿐, 숭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리아의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꽃을 바치고 그녀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외에도 천사, 사도, 순교자 등의 이름을 빌어서 기도합니다. 결국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유일한 중보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에서 제2계명을 아예 빼버렸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십계명은 개신교의 십계명과 다릅니다. 그들의 십계명에는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출 20:4-5).”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서, 다시 말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마라.”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가 각각 9계명, 10계명이 된 그들만의 십계명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사람의 전통과 교회의 권위를 더 높게 여기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어떤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제가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들은 “루터의 동상이 있는 장소에 찾아가고, 그와 관련된 여러 곳을 찾아다닐 정도니 너도 루터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루터의 동상이나 그의 저서, 또는 그가 살던 장소에 아무런 종교적 의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루터를 통해 세상에 증거하신 놀라운 복음의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필요는 털끝만큼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루터 역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건짐 받은,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가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영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적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다 보니, ‘봐라, 내가 이곳에 왔다!’ 하면서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뿌듯해 하는 자아숭배적인 생각이 간혹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계속 발전하면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섭리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사람이 위대하고 대단했던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찾아올 때마다, 저는 이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정신을 차리곤 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과 목적으로 이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있는 것인가? 나의 대단함을 느껴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면서 더욱 그분께 영광 올려드리기 위함인가? 나는 정말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고 나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루터가 법학을 공부했던 에르푸르트 대학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행 책자에 그려진 지도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제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이 건물이다.’ 싶은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추정되는 건물 사진 몇 장을 담아왔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곳은 역시 에르푸르트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과 다른 분이 찍어 올린 사진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달랐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오늘 탐방의 최종 목적지인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어거스틴 수도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들르면서 꽤 먼 거리를 걸어왔기에, 시원섭섭한 마음과 뭔가 모를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루터 시대의 에르푸르트에는 약 2,00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그 많은 수도원 가운데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그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위한 많은 일을 이 수도원에 예비해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수도원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지출 계획에는 박물관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빡빡한 재정 상황 때문에, 아쉽지만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훗날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른 분이 인터넷에 올린 수도원 안쪽 광경을 살펴보면서, 그냥 그때 좀 무리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을 계획하는 분이 계신다면, 꼭 박물관 입장료를 따로 책정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 수도원 벽에 쓰인 글귀 – AUGUSTINERKLOSTER(어거스틴 수도원)
이 수도원 안쪽에는 ‘요한 사가랴’라는 신부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난 탐방기의 주인공이었던 얀 후스를 콘스탄츠 회의에서 정죄한 장본인입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루터는 바로 이 사람의 무덤 앞에서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는 참 흥미롭습니다. 후스를 고소하고 화형을 당하게 몰아간 사람의 무덤 앞에서 사제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가 오히려 나중에는 후스의 개혁 사상을 이어받은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될 줄 과연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통해 사람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놀랍고 무한한 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루터는 이곳에서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총 7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도 수행, 기도, 고해를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죄의 문제가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루터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불안해하며 살았습니다. 루터가 남긴 글을 살펴보면, 그때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지옥 같은 두려움이 강력하게 엄습해 올 때, 어떤 말로도 그 두려움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펜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30분, 아니 10분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참았다면 나는 죽어서 벌써 재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너무나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어떤 탈출구나 위안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비난했습니다. … 그 순간에는 내 영혼이 과연 구원받았는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루터를 구원으로 인도해주시기 위해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를 그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부수도원장이자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의 학장을 맡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슈타우피츠는 수도원 순회 방문 때, 무거운 죄의 짐에 짓눌려 신음하는 루터를 보고서 큰 안타까움과 긍휼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개별적인 죄에 집중하기보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 자체를 볼 수 있도록 그의 시야를 넓혀주고, 죄인을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보다 타락한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1508년에는 이미 철학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던 루터를, 자신이 재직 중이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할 수 있게 주선해주고, 신학 공부도 계속해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루터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509년에 신학 학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1510년에는 어거스틴 수도회에서 내부 논쟁이 일어나서 쟁점 사안에 대한 교황의 답변을 듣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특사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그 일을 수행할 사람으로 루터를 지명한 인물도 바로 슈타우피츠였습니다.
루터는 거룩한 도시라고 불렸던 로마에 많은 기대감을 안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온갖 타락과 부패의 진면목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루터는 로마 카톨릭이 겉만 번드르르하지, 실상은 어둠이요, 깊은 수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확인해 갔습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곧장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찾아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1512년 10월, 29살의 나이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러자 슈타우피츠는 아예 루터에게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 학장 자리를 내어주고서, 독일 남부 지역 수도원 순회를 떠났습니다.
이러한 슈타우피츠의 섬김과 지도가 없었다면 루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주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내렸을 것입니다. 훗날 루터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슈타우피츠에 대한 감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슈타우피츠 박사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국 지옥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루터가 죄에 대해 신음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깨우쳐 갔던 수도원을 뒤로하면서, 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과연 루터가 죄로 인해 깊이 신음했던 것처럼 죄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있는가? 루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슈타우피츠처럼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생각해 볼 때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더욱 간구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이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루터 동상이 있는 카우프만 교회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이 건물 앞 명패에는 분명히 ‘교회(kirche)’라고 쓰여 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왠지 좀 성당과 비슷했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제단이나 성상 같은 것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 교회는 변질되어 로마 카톨릭으로 다시 돌아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마치, 로마 카톨릭과 화합하고 하나 되려는 영적 음행을 저지르고 있는 현대 개신교의 현실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탐방기를 쓰려고 이 교회에 관해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당시 제 생각에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11세기에 원래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1521년 무렵부터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1522년에 이곳에서 설교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칼빈처럼 모든 부분에 대해 철저하면서도 온건함과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할 때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대신,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하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판단하고 그것들을 그냥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문했던 그 교회에는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루터는 ‘급진적인 개혁운동에 대한 염려와 반감’ 때문에 그와 같은 결정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훗날, 보름스(Worms) 회의에서 종교개혁을 철회할 수 없음을 선언한 루터는 한동안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조용히 지내게 됩니다. 루터를 보호하려고 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거짓 납치극을 벌여서 루터를 실종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곳에서 신분을 감춘 채로 책을 쓰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루터의 동료이자 선배인 칼슈타트가 그가 없는 비텐베르크에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칼슈타트가 이끈 개혁 운동 가운데 하나는 성당에 있는 모든 형상을 때려 부수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많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설교를 통해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비판하면서, 무력이 아닌 말씀으로 교회를 개혁해가자고 청중을 설득했습니다.
물론, 급진적 개혁운동의 가르침과 방식에는 큰 오류와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루터가 잘못 판단한 부분도 있습니다. 루터는 급진적 개혁운동을 반대하면서 이러한 ‘형상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루지 않고 개인 양심에 맡겨야 하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판단했습니다. 그와 함께 루터파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몰아낼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개혁은 참으로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부족한 손길을 통해 거대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족함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종류의 부족함은 복음의 진리를 명쾌하게 선포하고 붙든 어거스틴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완벽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좋은 점들은 계승하고 부분적으로 잘못된 점은 계속해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 가르치는 개혁의 제1 원리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르틴 루터라는 보잘것없는 한 수도사의 입을 통해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부흥이 일어난 지 거의 5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선포한 복음의 진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회는 그가 걸어간 길을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습니다. 선행(善行) 구원을 말하는 로마 카톨릭과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믿는 개신교회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만일, 개신교회가 약 500년 뒤에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하거나 타협하면서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하나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루터가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분명히 모세가 두 돌판을 내리치면서 격노했던 것처럼, 가장 엄중한 말과 행동으로 그런 행동을 책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교회에 부흥을 허락해주셔서 모든 성도가 현재의 어두운 영적 상황을 볼 수 있게 해주시며, 참된 개혁이 곳곳에서 일어나길 소망해봅니다.
다음 편에는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게재하여 종교개혁의 출발을 알린 도시, 비텐베르크로 가보겠습니다.
각주
1 독자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에서 어째 아주 이른 아침의 분위기가 난다 싶어 확인해보니, 지난 탐방기의 슈토테른하임에서 찍은 사진이 이 사진보다 나중에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에르푸르트를 가장 먼저 살펴본 뒤에, 슈토테른하임으로 향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류를 바로 잡습니다. 죄송합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6.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에르푸르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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