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아무리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종교개혁’ 하면 으레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고, 또 ‘마르틴 루터’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95개 조 반박문」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번 탐방기에서 소개해드릴 궁성 교회(Schlosskirche)는 바로 그 「95개 조 반박문」이 내걸렸던 장소입니다. 즉, 수많은 비텐베르크의 유적 중에서도 가장 대표성과 상징성을 지닌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궁성 교회(Schlosskirche)의 웅장한 모습
궁성 교회는 1509년에 작센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의 명으로 세워졌습니다. 지난 편에서 소개해드린 루카스 크라나흐가 교회 내부를 꾸미는 일을 맡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틴 루터가 어떤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이 교회 앞에 나타납니다. 그는 커다란 교회 문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문에 대고 그 위에 힘껏 못을 박았습니다. 그 종이 위에는 면죄부를 반대하는 95가지 조항이 라틴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일이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가 그 반박문을 교회 문에 내건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시발점 역할을 한 면죄부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시행하는 고해성사 제도와 관련 있는 물품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나 지금이나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신자가 먼저 자기 죄를 신실하게 자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고, 사제에게 찾아가서 지은 죄를 실제로 고백해야 하며, 그다음에는 사제가 형벌의 의미로 부과한 일(기도, 고행, 구제, 헌금, 성지순례 등)을 해야 비로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자들(특히 가난하거나 병든 자들)이 이런 속죄 행위를 통해 용서받는 일에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만든 다음, 돈을 조금만 받고 팔아서 가난하고 병든 자가 감당해야 하는 형벌을 완화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누구나 면죄부를 돈 주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면죄부가 죄의 형벌을 모두 보상해주는 완전면죄(대사면, 大赦免)의 능력을 지닌다는 사상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거짓 교리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이 세상 너머에까지 손을 뻗어 연옥1에 있는 사람들 역시 이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청산할 수 있으며, 살아서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들르지 않고 곧장 천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면죄부 판매를 통해 거두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웅장하고 호화로운 건물들(성당, 수도원 등)을 짓고, 세계 각지의 보물을 수집하며, 성대한 의례를 치르는 데 사용했습니다.
면죄부 판매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514년부터 1517년 사이입니다. 이 시기에는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가 로마에 거대한 성당(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지어 교황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모으는 데, 이 면죄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각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루터의 나라인 독일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대주교인 알브레히트가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권력욕이 대단했던 사람으로서 주변 지역인 마인츠, 마그데부르크, 할베르슈타트 대주교 자리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잘 보여야 했고, 교황에게 잘 보이는 일에 돈보다 더 확실하고 좋은 수단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 교황에게 주고 결국 원하던 자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지역에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팔아서 절반은 빌린 돈을 갚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교황에게 보내어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일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를 위해 특별히 도미니크 수도회의 원장이자 탁월한 연설가였던 요한 테첼(Johann Tetzel)을 데려왔습니다.
영적인 무지 속에 방황하던 독일 백성들은 자극적인 테첼의 선동 구호2에 넘어가서, 너도나도 면죄부를 사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루터를 움직여서 「95개 조 반박문」이 세상에 나오게 했습니다.
사실, 루터는 반박문을 작성하기 훨씬 전부터(로마 여행 이후) 면죄부에 대한 불만과 신학적인 이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1516년에도 종종 면죄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이 「95개 조 반박문」을 궁성 교회 문에 붙인 것은 다른 이들과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함이었지(당시에 통용된 전통적인 관례), 어떤 개혁을 일으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단지 면죄부의 오용(誤用)을 반대했을 뿐, 면죄부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면죄부를 손에 넣은 이들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회개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밝히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래의 논제들은 문학석사이며 신학석사인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수사 존경하는 마르틴 루터 신부의 주재 아래 비텐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주제가 될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바 있다. 그는 직접 토론에 참여하며, 이 문제를 토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루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 반박문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루터는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인 토론을 제안했으므로, 당연히 문서를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작성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라틴어를 읽지 못하는 당시 사회 환경을 고려하면, 루터에게는 이 문제를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박문을 읽어본 어떤 이가 일반 사람도 이 내용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발명된 인쇄술은 그 문서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게 도와주었습니다. 인쇄술은 책과 문서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성경과 종교개혁자들의 저서가 많은 이들 사이에서 폭넓게 읽힐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루터의 지극히 학문적이고 부분적인 개혁 제안에 온 유럽 시민들이 호응하여, 면죄부뿐만 아닌 교회 전체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기폭제가 된 「95개 조 반박문」은 크게 4개 부분(참된 회개, 교황과 교회법이 가진 권세와 연옥의 관계, 면죄부의 한계, 면죄부 오용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4
첫 번째 부분에서 루터는 참된 회개란 고해성사와 같은 의식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자신을 계속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부분에서는 죄를 사할 수 있는 교황의 권세를 다룹니다. 루터는 교황도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교황은 오직 자신의 권위로 부과한 형벌만 면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교회법도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되고 죽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교황이 연옥에 있는 이들이 받고 있는 형벌을 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연옥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 루터는 교황과 교회법의 역할과 범위가 그러한데, 어떻게 현재 판매되고 있는 면죄부가 그들의 죄를 모두 사해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면죄부 없이도, 죄와 형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얻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편이 더 선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교황에게 양들의 가죽과 살과 피로 베드로 대성당을 짓지 말고, 자기 돈으로 세우든지 아니면 아예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교황이 승인한 면죄부 판매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제들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보화는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다음, 루터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그 모든 논제를 정리해 나갑니다. 그리고 아래의 두 가지 논제를 제시함으로써 반박문을 마무리합니다.
「94.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열심을 내도록 그리스도인에게 권면해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평안에 대한 그릇된 확신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더 확고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라.」
루터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이 글이 그렇게 큰 화제를 몰고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95개 조 반박문」은 이신칭의를 다룬 글도 아니었고(그 당시 루터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아직 명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엄청난 비난을 퍼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반박문은 겨우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루터는 정말 하루아침에 일개 무명 수도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개혁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떤 책에서는 어떻게 이러한 학문적인 문서가 거대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에 관해 일반적인 요인 몇 가지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이 문서가 독일 사람들의 이탈리아(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감을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그동안 로마로 흘러들어 간 막대한 돈 때문에 자신들의 경제 상황이 주저앉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 주요 창구 구실을 하던 면죄부의 실상을 드러내는 루터의 글은 좋지 않은 그 감정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루터의 반박문에는 문예 부흥 운동의 정신(근본으로 돌아가자)이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예 부흥 운동은 중세 시대의 개념들(신 중심 사회, 봉건 제도, 개인의 창조성 억압)에서 벗어나, 문화의 절정을 이룬 고대 시대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해준 라틴어 성경 대신,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루터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마태복음 4장 17절을 라틴어 성경의 “고해성사를 하라(Do penance)”는 의미가 아닌, 그리스어의 본래 의미인 “회개하라(Repent)”로 사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루터가 면죄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진정한 종교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 자기 부인, 사랑이라고 하면서 예식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의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여 독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요인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이지, 근본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다루면서 교회 전체의 개혁으로 옮아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 사람들은 복음과 진리의 빛을 좇아 구원을 향해 나아간 것이지, 다른 것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극히 학구적인 방식으로 아주 단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문서라고 해도, 그것이 참된 복음과 진리에 기초한 것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따라가려고 할 만큼 당시의 영적인 어둠과 갈급함이 극심했던 것입니다.
▲ 「95개 조 반박문」을 새겨놓은 문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림
보시는 것처럼, 「95개 조 반박문」을 새겨놓은 청동문 위쪽으로는 아치 형태의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 그려져 있고, 양옆으로 루터와 멜란히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루터의 손에는 그가 동료들과 협력하여 번역한 독일어 성경(구약과 신약)이, 멜란히톤의 손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들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잘 해나가려면, 이 두 가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장 중요하지만, 성경의 핵심교리를 잘 정리해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신앙고백서도 참 중요합니다. ‘오직 성경’을 부르짖던 종교개혁자 대부분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핵심 교리를 잘 정리해서, 누구라도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안내자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물려준 그 선한 유산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과연 이것들이 그러한가’하는 자세로 잘 살펴보고, 성경을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데 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95개 조 반박문」을 새겨놓은 커다란 청동문 너머의 모습을 소개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오지 못했습니다. 궁성 교회는 입장료를 받지는 않았지만, 1유로(당시 1,500원 정도)의 사진 촬영 비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일이 이렇게 탐방기 형태로 쓰일 줄 미리 알았더라면, 기꺼이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빡빡한 재정 상황으로 인해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했던 저로서는 그 비용조차도 상당히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냥 추가 지출 없이 눈으로만 보고 나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렇게 탐방기를 쓰려고 하니, 그때의 결정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꼭 여러분을 문 앞에 세워둔 채 저만 들어가서 관람하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어, 참으로 죄송하고 민망합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궁성 교회 안쪽은 참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제가 참고한 여행 책자에서는 이곳에 루터 탄생 500주년(1983년)을 기념하여 유럽의 각지에서 활동하던 종교개혁자의 동상을 세워놓았다고 했는데, 들어가서 보니 정말로 동상 여럿이 창문을 따라 세워져 있었습니다(제가 모르는 인물도 꽤 많았습니다).
그 동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교개혁이 참 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께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 앞쪽의 설교단 오른편에는 루터의 무덤이, 왼편에는 멜란히톤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오지 못한 게 참 아쉽습니다.
하지만 장차 천국에서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볼 날이 올 것이니, 그날을 기대하면서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쪽을 둘러보고 나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던 중에, 교회 뒤쪽에 진열해놓았던 「95개 조 반박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그 반박문은 밖으로 나가는 저에게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하늘 위로 높이 솟은 첨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탑의 목처럼 생긴 부분에 어떤 글자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보니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글귀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글귀입니다. 이를 번역하면 루터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 제목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며, 성의 일부분을 개조하여 만든 교회의 첨탑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글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입장료를 내면 누구나 꼭대기까지 올라가볼 수 있었습니다(무려 289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 하겠지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보수공사를 하느라 부분 개장을 한다고 하니, 이곳에 가실 계획이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크트 광장(Markt)에 있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
궁성 교회의 관람을 마치고 마르크트 광장을 가로질러 지나가려던 때였습니다. 저 멀리 커다란 동상 두 개와 언뜻 봐도 꽤 많은 수의 젊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제 속에서는 ‘저 동상은 누구의 것이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 동상 주인공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가서 물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제 내성적인 성격이 어디선가 갑자기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가서 그냥 ‘조용히’ 동상만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 생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조용히’ 동상에 다가가서 보니, 동상 주인공은 다름 아닌 루터와 멜란히톤이었습니다.
동상 아래쪽에는 “복음을 믿으라.”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루터의 인생 전체가 이 ‘복음을 믿으라.’라는 짧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동상 왼쪽 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만스펠트 주민이 모금한 돈으로 루터 상을 세우다
그 옆면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1817년에 프로이센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지시로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사실은 이 동상이 부유한 귀족층이 아닌 만스펠트(루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주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 사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도, 이렇게 커다란 동상을 만드는 일에 힘을 모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옆면에는 아까 첨탑에서 본 것과 같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루터가 이 제목의 찬송가를 지은 시기는 다소 불확실합니다.
한쪽에서는 그가 보름스 회의에 소환되었을 때, 이미 그전에 지어놓았던 이 찬송을 부르면서 보름스로 입성했다고 합니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인해 일어난 많은 사건 속에서 힘겨운 내적 투쟁을 벌이며 의기소침해져 있던 1527년 여름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때 루터는 시편 46편을 묵상하며 마음에 큰 위로를 얻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이 찬송가의 가사를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찬송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많은 영혼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듯합니다.
▲ 동상 오른편: 사람의 행사는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루터
이사야 40장 8절의 말씀5을 생각나게 하는 글귀입니다. 루터 동상 옆의 멜란히톤 동상에도 루터 동상과 마찬가지로 4면에 글귀가 하나씩 쓰여 있습니다. 그 문구들은 나중에 멜란히톤 편에서 따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자, 동상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이곳 주민은 아니었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선한 유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누군가 몇 개 먹다가 그냥 버린 듯했습니다(아니면 급한 일이 생겨서 놓고 갔겠지요).
아주 탐스럽게 잘 익은 커다란 딸기 여러 개가 허기진 제 위를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쓰레기를 다 치우고 나서,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딸기 상자를 바라보았습니다. 한국인의 자존심과 배낭여행자의 배고픔 사이에서 다툼이 일었습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머뭇거리던 저는, 결국 딸기 상자를 독수리가 병아리 낚아채듯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뜸한 골목 안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슴이 얼마나 뛰던지,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고 감사히 먹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딸기 생각에 푹 빠져 있었던 제 앞에 갑자기 웬 반신상(半身像)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정말 느닷없이 나타난 것만 같은 그 반신상의 사진을 재빨리 찍어놓고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딸기 생각으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에, ‘우선 사진만 찍어두고 나중에 알아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본 딸기가 모든 생각을 잠재워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 저는 탐방기를 쓰면서 이 반신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저번 편에서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렸던 루터의 동료이자, 세인트 메리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수고했던 ‘요하네스 부겐하겐’이었습니다.
동상 주인공을 확인하자 제 머릿속에서는 ‘왜 하나님께서는 이 부겐하겐 동상을 보게 하셨을까? 그 딸기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못 보고 왔을 텐데…’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생각은 제가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께 이렇게 쓰임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일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물론 성도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다룬 전기(傳記)를 읽고 나면, 이렇게 강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마련일 것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종교개혁자들의 유적지를 살펴보고 탐방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제 마음속에서는 이런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들뜬 마음에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인물은 잘 알려진 루터나 멜란히톤이 아닌, 보이지 않게 수고한 요하네스 부겐하겐이었습니다. 그는 루터와 루터의 가족을 자기 가족처럼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종교개혁을 위해 자기 역할을 묵묵히 잘 감당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교적 잊어버리기 쉬운 부겐하겐의 수고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두라고 그 딸기 사건을 겪게 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우리를 루터처럼 사용하시든, 부겐하겐처럼 사용하시든 똑같이 감사하며 맡겨진 일에 성실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듯했습니다.
이제, 딸기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골목을 지나 비텐베르크 역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 제 머릿속에서는 루터의 참나무를 지나 처음 구시가지로 들어섰을 때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구시가지 길옆으로 흐르던 맑은 시냇물(자연 시내가 아닌 인공 시내로 기억함)에 이 딸기를 씻어 먹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딸기를 깨끗이 씻은 다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배가 고프기도 했었고, 또 참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라서 그런지 특히 더 맛있었습니다. 아마 제 배도 제가 딸기를 다 먹는다면서 참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저는 감사한 마음과 불룩해진 배와 함께 비텐베르크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많이 흘러 해가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종교개혁의 밝은 빛으로 가득했던 교회에 짙은 영적 어둠이 드리운 오늘날의 시대상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교회와 성도는 어떤 일에도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루터처럼 시대의 어둠과 맞서며 용기 있게 전진해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루터가 쓴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Alternate translation-다른 버전의 가사)를 소개해드리면서 이번 탐방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1. 든든한 성채 우리 하나님
굳센 보호 하심과 무기
지금 두들겨 맞는 회초리
말끔히 지워주시리
우리 옛 원수 여전히
후려칠 채비이군
그의 무딘 완력과 교활
무서워라 그의 갑옷
이 땅에 누가 맞서리
2. 내 힘만으론 어림없네.
당장 쑥밭이 되리
그 승리자 우리 편이시니
하나님께서 임명한 사령관
그 이름이 무엇일까
그리스도 예수
곧 만군의 주
바로 하나님
전쟁터를 손에 쥐신 분
3. 겹겹이 싸인 저 원수들
삼킬 듯이 으르렁대나
우리 흔들리지 않으리
우리를 누를 수 없어라
이 세상 왕들아 소리쳐라
멋대로 놀아나거라
어떻게 할 셈이냐
든든한 하나님의 진리
한 마디면 쓰러지리
4. 그들이 어쩌랴 그 말씀
실컷 두들겨 봐라
싸움터에 하나님 계시니
겁낼 것 하나 없어라
취하여라 우리 생명
재물, 명예, 자녀, 아내
모조리 내어주마
마음대로 될까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리
각주
1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외경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잘못된 교리.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하면, 신자는 죽은 뒤 곧바로 천국으로 가지 않고, 중간 장소인 연옥에서 남아 있는 죄의 형벌을 다 받고 나서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2 “동전이 헌금 궤에 떨어지자마자, 한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일어나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3 루터가 이곳에 반박문을 걸었을 때는 교회 문이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1892년에 이 문을 복원하면서 튼튼한 청동으로 바꾸었고,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4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95개 조 반박문」 전체를 직접 살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5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6.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8. 우즐라 코흐, 『눈 속에 피는 장미』, 이은자 옮김, 솔라피데출판사, 2009
9. 존 딜렌버거 편집, 『루터 저작선』,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10. 로버트 갓프리, 『종교개혁과 개혁신앙』, 박응규 옮김, 크리스챤출판사, 2008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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