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시리즈
영국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 (2)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유적지 탐방
김재호
스펄전 목사님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은 어떻게 찾아갔나?
– 스펄전 목사님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하기 때문에, 타버나클은 다른 곳에 비해 찾아가기가 쉬운 편이다. 가는 길을 몰라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가르쳐준다. 더구나 예배당이 그리스 양식으로 건축되어서 눈에 잘 띄기까지 한다. 타버나클은 런던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우면산 정도 될 것 같다. 가는 방법은 지하철을 타고 ‘더 엘리펀드 앤드 캐슬(The Elephant & Castle)’이라는 역에서 내려서 약 1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스펄전 목사님께서 목회하실 때는 출석 인원이 만 명이 넘었기에 예배당 규모도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 사후에 출석 성도가 많이 줄었고, 예배당 건물도 화재로 불타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습으로 크게 무너지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스펄전 목사님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남아 있는 부분은 바로 그리스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예배당 앞부분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건축한 것인데, 그때 예배당 크기를 많이 줄였다. 지금은 한 800명 정도가 모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 때를 생각하고 방문하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특히, 웅장한 예배당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에게 힘차게 설교하는 스펄전 목사님 삽화를 보고 오면 더 그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타버나클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알림판
– 현재,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께서 목회하고 계신다는 사실과 함께 예배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 알림판 앞쪽에 놓여 있는 교회 명판
– 이 교회가 스펄전 목사님께서 목회하셨던 교회라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꼭 타버나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영국 교회는 예전 같은 영적 생명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디를 방문하든지 옛날 생각을 하고 간다면 분명히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타버나클을 방문했을 때 문이 잠겨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배당 안쪽은 어떻게 구경할 수 있었나?
– 타버나클을 방문한 날이 평일인 데다가 사전 약속을 하고 가지도 않아서 안쪽 구경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건물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기독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서점 직원에게 한국이라는 먼 곳에서 왔는데 예배당 안쪽을 좀 구경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더니, 다행히 들어주셔서 그곳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 타버나클 내부 모습(동영상)
– 성만 청년에게 문을 열어주셨던 친절한 직원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예배당도 인상 깊었지만, 앞서 말한 서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서점에는 스펄전 목사님과 관련 있는 책이 가장 많았지만, 그 외 다른 책도 수준 높고 깊이 있었다. 이번에는 주일 학교에서 사용하기에 좋은 어린이용 성경 인물 전집을 사 왔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곳에 있는 귀한 신앙 도서를 모두 다 사 오고 싶다.
▲ 성만 청년이 타버나클 서점에서 구입한 성경 인물 시리즈(어린이용)
– 한 번에 많은 양을 구입해 서점 직원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비록, 영국 교회가 많이 쇠락했지만 이런 부분은 다른 나라 교회보다 여전히 낫다. 하락세에 있다고 해도 신앙의 기초 토대와 뿌리는 훨씬 더 깊고 튼튼한 것이다. 교세는 훨씬 더 크지만, 기복적이고 감성적이며 신비적인 내용을 다루는 비성경적인 책이 인기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참으로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는 왜 그렇게 힘들어했나? 그때 찍은 영상을 보니 “아이고, 아이고…” 하는 탄식(?) 소리가 들려오던데?
– 아, 그건 무덤이 갖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그나마 스펄전 목사님 무덤은 큰 공동묘지 안에 있어서 좀 덜했지만, 무덤은 일반적으로 도시 외곽의 변두리 지역에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적지 탐방 중에는 무덤 탐방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4.19 국립묘지를 찾아가려면, 우이동에서부터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분명히 서울 한복판을 걷는 것인데도 서울의 다른 지역을 걷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
– 힘에 겨워하는 성만 청년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도 직접 가서 봤을 때, 가장 감명 깊고 유익이 많은 게 무덤 탐방이 아닌가?
– 아무래도 그렇다. 더구나 스펄전 목사님 무덤 뒤에는 스펄전 목사님을 기리는 기념관도 있어서 신앙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정면 상단부)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니, 주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이다(딤후 4: 7, 8).”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상단부 오른쪽)
– 스펄전 목사님의 약력과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상단부 왼쪽)
– 스펄전 목사님의 아내, 수잔나의 약력과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하단부)
– “찰스 해돈 스펄전의 몸이 여기에 누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수잔나도 함께 이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라고 적혀 있다.
▲ 스펄전 목사님의 무덤(전경)
– 무덤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스펄전 목사님 기념관이다.
스펄전 목사님께서는 생전에 무덤을 간소하게 만들라고 하셨는데, 사진을 보니 그 말이 잘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도 일반인으로 변장하고 와서 설교를 들을 정도였다고 하지 않는가? 당시에 스펄전 목사님은 말 그대로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스펄전 목사님이 생전에 받으셨던 그 큰 사랑이나 그분의 전 세계적인 명성에 비추어본다면, 그분의 무덤은 정말 간소하게 꾸며졌다고 해야 한다.
스펄전 목사님께서 운영하셨던 신학교는 아직 운영 중인가?
– 아직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스펄전 칼리지는 스펄전 목사님 무덤보다도 더 먼 외곽 지역에 있다. 스펄전 목사님 무덤은 타버나클에서 버스 타고 한 시간 정도를 가야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분당이나 용인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스펄전 칼리지는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더 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로 치면 한 동탄 정도 될 것 같다.
▲ 스펄전 칼리지로 가는 길
– 길 이름이 ‘스펄전 길’이다.
도심에서 상당히 벗어난 지역에 있으니, 상당히 넓은 부지에 여러 건물이 함께 있는 대학교 캠퍼스의 모습을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스펄전 칼리지는 규모가 정말로 작고 영세하다.
더구나 현재 스펄전 칼리지는 교파를 별로 가리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타버나클이 속한 개혁파 침례교인만 받으면 운영이 불가능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만큼 영국 교회의 침체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학사 과정도 그렇게 깊이 있게 편성할 수 없다. 기초가 전무하지 않고 이런저런 외적 어려움을 이겨낼 만한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공부할 만한 수준의 학사 일정이 운영되고 있다.
스펄전 목사님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가보니 어땠나?
– 참 좋았다. 확실히 책으로만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펄전 목사님을 알고 있는 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참으로 훌륭한 신앙의 선배셨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국 교회의 침체가 어느 정도인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활동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참 아쉽고 허전하다. 그래서 돌고 나면 힘이 좀 빠지는 측면이 있다. ‘이곳까지 와서 여전히 활동적이고 융성하는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옛 고구려의 영광(?)’을 본 것만 같은 씁쓸한 기분도 조금 들었다.
이번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관련된 장소도 찾아갔던 것으로 아는데, 그곳은 어땠나?
– 개혁주의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은 보통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을 가장 먼저 읽게 마련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부터 시작해서 스펄전, 아더 핑크 등의 순서로 책을 읽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관련된 장소는 다른 곳보다도 훨씬 더 감명 깊게 다가왔다. 삼국지 인물 중에서도 관우나 조자룡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본 정도라고 한다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많은 분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 하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다. 고향이 웨일스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포트 탈봇(Port Talbot)의 애버라본(Averabon)에 속한 샌드필즈(Sandfields)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처음 시무하셨던 베들레헴 교회의 모습(외관)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인데, 서너 정거장 정도 가면 ‘포트 탈봇 애비(Port Talbot Abbey)’라는 역이 나온다. 베들레헴 교회는 그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버스를 타면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좀 걷고 싶어서 2~30분 정도를 걸어갔다.
그렇게 교회를 찾아가보니, 마침 성탄절 행사를 막 마치고 난 오전 시간이었다. 그래서 예배당 건물만 구경하고 나오지 않고 목사님, 장로님과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교회는 우리나라의 ‘사랑의 교회’와 어느 정도 교류를 하고 있었던 터라 한국인의 교회 방문에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였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처음 시무하셨던 베들레헴 교회의 내부 모습(강대상)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처음 시무하셨던 베들레헴 교회의 내부 모습(2층)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처음 시무하셨던 베들레헴 교회의 내부 모습(동영상)
– 성만 형제의 ‘인상 깊은’ 영어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다들 먼 곳에서 왔다고 참 많이 반겨주셨다. 특히, 담임 목사님은 의사소통에 큰 무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시자 곧장 방으로 가셔서, 그동안 보관하셨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 자료(신문 기사 스크랩, 양력 등)를 모두 꺼내오셨다. 그런 다음,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시무할 때 사용하셨던 옛 건물로 나를 인도해주셨다.
2층 구조에 파이프 오르간까지 있는 지금의 베들레헴 교회 예배당은 훗날에 새로 지은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는 그냥 넓은 사무실 같은 공간 하나밖에 없었다. 그 공간에 겨우 몇십 명이 모여 예배드렸지만, 나중에 목사님께서 사임하실 때는 한 2~300명까지 교인이 늘어나 있었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 실제로 사용하셨던 공간
– 현재는 교육관처럼 사용하고 있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 실제로 사용하셨던 공간(동영상)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 실제로 사용하셨던 공간(동영상)
새로 지은 예배당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교회는 지금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추구하신 칼빈주의 메소디즘(Calvinistic Methodism)1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는 상당히 놀라시면서 참으로 기뻐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같은 개혁주의 교회가 한국에서 일반적이냐고 질문하셨다. 그래서 그렇지는 않고, 우리 목사님께서 한 10년 전쯤에 개척하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앞으로도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웨일스에서도 기독교가 부흥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자, 목사님께서는 내게 기도해달라고 말씀하셨다.
▲ 성만 청년이 베들레헴 교회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
베들레헴 교회를 둘러본 뒤에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무덤이 있는 뉴캐슬 엠린(Newcastle Emlyn)으로 갔다. 그런데 엠린은 진짜 시골 벽지여서 포트 탈봇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간 뒤에,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더 들어가야만 하는 지역이다. 더구나 그날 비도 많이 와서 찾아가기가 더 쉽지 않았다. 정말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엠린에서는 먼저 로이드 존스 목사님 장례식이 치러진 벧엘 교회를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1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 무덤을 찾아가보았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어 있어서 무덤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정말 여기도 로이드 존스, 저기도 로이드 존스였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 장례식이 치러진 벧엘 교회의 모습
▲ 로이드 존스 목사님 묘비 모습
– 목사님께서 좋아하셨던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라는 성경 말씀이 적혀 있다.
– 1991년에 돌아가신 베단 사모님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서 무덤도 크고 옆에 기념비도 좀 서 있고 주변에 꽃도 엄청 많이 놓여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헤매지 않고 곧바로 찾아갈 수 있겠다고 예상했는데, 직접 가보니까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또, 연말이라서 그런지 출입구 문도 잠겨 있는 데다가 열어줄 사람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담을 넘은 뒤에는 묘지 전체를 빙 둘러보면서 이곳 어딘가에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 무덤을 찾아내야 했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잠들어 계신 가족 묘지의 모습
그런데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숙소가 잉글랜드 엑서터(Exeter)에 있어서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돌아오는 데 거의 6시간 가까이 걸렸다. 정말 만만치 않은 탐방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돌아보면서 참 좋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특정 인물 그 자체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가? 이 모든 게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한 것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신앙 선배의 흔적을 돌아볼 때는 이런 부분을 좀 조심해야 할 필요도 있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
– 시내 건너편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하면 떠오르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어땠나?
– 웨일스 탐방을 마치고 런던 탐방을 할 때,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들렀다. 여기 찾아갈 때 주의해야 하는 점은 영국 국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찾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유명한 교회를 물어보면, 대번에 ‘빅 벤(Big Ben)’ 옆에 있는 이 사원을 알려준다.
물론, 청교도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이 사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작성되기도 했으니, 둘러봐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흔적을 기대하고 갔다가는 상당히 어리둥절하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모습
– 영국 왕의 대관식 등이 바로 이곳에서 치러진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과 한국 대사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가려면 우선 버킹엄 궁전으로 가야 한다. 그런 다음, 한국 대사관이 있는 방향으로 1분 정도를 걸어가면 된다. 이렇게만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로이드 존스를 찾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모습(전경)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교회 명판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머릿돌
– 설립자 이름과 날짜 등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 웨스트민스터 채플도 많이 쇠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영국 교회 전체가 쇠퇴하다 보니,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후임자가 은사주의를 추구해서 웨스트민스터 채플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는 말도 들리던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 현재, 영국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 자체가 거의 없다. 그러니 목회자가 어떻게든 사람들을 교회로 나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신비한 현상을 강조하는 은사주의나 세속 문화를 포용하는 신복음주의 노선을 택하기가 쉽다. 그런 쪽으로 목회를 하면, 조금이나마 젊은 층을 교회로 끌어모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은 이제 자국인만 대상으로 사역하면 교회 유지조차 어려움을 겪게 되는 형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국인 중심적인 목회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정교하고 깊이 있는 언어능력을 요구하는 청교도 개혁주의 목회는 자연스럽게 물 건너가게 된다. 결국, 교리보다는 그냥 체험, 형제애 같은 쉽고 간단한 요소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도 웨스트민스터 채플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고, 그냥 휩쓸려 가는 게 아닌가 싶다.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내부 모습(강단)
– 강단 아래쪽에 설치된 무대와 각종 악기, 성탄 트리, 공중에 매달려 있는 대형 스크린의 모습이 현재 웨스트민스터 채플이 처해 있는 현실을 대변하는 듯해서 아쉽고 안타깝다.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내부 모습(회중석)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의 내부 모습(동영상)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스펄전 목사님의 타버나클처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직접 세운 예배당이 아니라서 남아있는 흔적이 타버나클만 못하다. 웨스트민스터 채플 직원이라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가운데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런던에 머물 때 출석한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직접 뵌 적이 있는 성도 한 분을 만나기도 했다. 거의 70세(만으로는 69세) 되신 어르신이셨는데, 성함은 브라이언(Brian)이고 고향은 리버풀(Liverpool)이셨다.
내가 로이드 존스, 아더 핑크, 찰스 스펄전의 책을 읽었고 그분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니, 상당히 놀라면서 반가워하셨다. 이제는 영국 사람도 잘 찾지 않는 그분들의 책을 멀리서 온 동양인이 열심히 읽었다고 하니 정말 뜻밖이셨을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읽었다는 소리와 같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이야기가 나오자, 그분께서는 고향 리버풀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 설교를 들었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2, 30명 정도 되는 소규모 모임에 오셔서 설교를 해주셨는데, 그때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저분, 상당히 유명한 분이셔.”라고 귀띔해주기도 했다고 하셨다. 또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참으로 겸손(humble)하고 박학다식(knowledgeable)하며 상당히 똑똑한 분 같았다고 말씀해주셨다.
(다음 편인 “조지 뮬러 탐방,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로 이어집니다)
각주
1 18세기 영국에서 교리의 체험, 삶의 현장에서 엄격한 경건의 실천을 강조한 이들이 나타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자, 반대자들은 그들을 ‘메소디스트(Methodist: 방법론자)’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러나 그 용어는 그들을 대변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훗날, 메소디즘 진영은 휫필드로 대변되는 칼빈주의 메소디즘과 웨슬리로 대변되는 아르미니우스 메소디즘으로 나뉘었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영국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 (2)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유적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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