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3) 에드워즈의 사임, 대각성에 대한 하나님의 결산(決算)
김재호
1. 후천년주의의 빛과 그림자
후천년주의는 복음과 진리에 헌신하는 이들을 역사 무대 위로 많이 이끌어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온 세상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하려고 했던 후천년주의자들의 순수한 열심과 헌신에 빚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한 그들의 마음과 발걸음에 우선 깊이 감사한 다음에 후천년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후천년주의는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대각성, 특히 에드워즈가 사임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잘 살펴보면, 후천년주의에 허락하신 선한 섭리만큼이나 매서운 책망과 경고도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워진다.
1734~1735년에 부흥의 불길이 일었을 때, 에드워즈는 그 불길을 다소 ‘과대평가’했다. 그 불길이 열광주의에 얼마나 취약한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고, 1741~1742년에 휫필드의 방문으로 불길이 다시 일었을 때도 그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드워즈가 그런 과대평가를 한 데에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세상이 점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진다는 후천년주의 청사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청사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수많은 사건을 통해 대각성이 천년왕국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증해주고 계셨다. 그래서 다소 낙관적인 입장에 서서, 열광주의를 곧 제압될 지엽적인 ‘부스럼’ 정도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1742년에 이르면, 대각성의 성격이 열광주의의 영향으로 상당히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이가 참 신앙의 열매를 맺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신비하고 강렬한 외적 현상과 자기 경험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하신 자기 부인에 시선을 맞추지 않고, 강렬한 현상에 근거하여 자기 권위를 높이는 데 맞추었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이 없는 위선자라는 낙인을 가차없이 찍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에드워즈는 칼을 빼 들었다. 그런 잘못과 부작용은 대각성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그런 잘못으로 치달은 이들이 얼마나 참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 주장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따르는 부차적인 ‘부스럼’에 불과하다는 것에서, 그런 일을 행하는 이들이 참 신앙을 소유했음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족하고 불확실한’ 자들이라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즉, 에드워즈는 일종의 선 긋기를 한 셈이었다.
그 선 긋기는 에드워즈가 교회 회원권 문제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했으며, 에드워즈를 결국 사임에 이르게 한 성찬 논쟁으로 이어졌다. 에드워즈에게 교회는 근본적으로 회심한 사람들이 속해 있는 영적인 기관이었으며, 교회가 시행하는 성례는 그들의 신앙을 확증하는 가시적인 표지이자 도장이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부족하고 불확실한’ 이들을 회심에 이르게 하려고 성례를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을 ‘부스럼’이 난 정도로 여겼을 때는 별 무리 없이 성례를 베풀어 줄 수 있었다. 조금 불편하고 꺼려지는 대목은 있었지만, 곧 해결될 부차적인 일로 여기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마음속에서 분명한 선 긋기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그런 일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드워즈는 교회 회원권 강화 작업이 사실상 모든 시민에게 교회 회원권을 주고, 그들 삶의 모든 면을 관리·감독하는 스토다드 체제를 명확하게 벗어나는 일임을 잘 알았다. 또한, 노샘프턴 주민에게 그 일이 얼마나 버겁고 힘들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정서』에서 그러한 입장 변화를 완곡하게 설명하고, 유명 인사와 토론하는 일 등을 통해 자기 생각이 서서히 퍼져나가게 했다. 그러면서 교회 회원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이 문제를 공식화하여 처리할 심산이었다.1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에드워즈가 진정한 회심을 판별할 수 있는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분명히 『신앙과 정서』를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강조하면서, 본질에 충실하지 못한 이들을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를 포용하고 포용하면 안 되는지를 ‘일괄적으로’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거부했다. 다시 말해, 『신앙과 정서』에서 제시한 표지를 수학 공식처럼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 표지는 오직 개인이 자기를 돌아보고 시험하는 데 활용하는 양심적이고 인격적인 도구임을 분명히 했다.2
그러나 오늘날처럼, 그 시대에도 에드워즈가 그 표지를 일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오도(誤導)하는 이가 있었다. 그들은 에드워즈가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증거를 요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3그러나 에드워즈가 가장 경계한 대목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에게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약간의’ 증거만 요구했을 따름이었다.
실제로 기다리던 청원자가 나타나자, 에드워즈는 지금껏 해오던 기본적인 일에 덧붙여 여러 신앙 고백문을 보여준 뒤 그와 비슷한 내용을 ‘자신의’ 말로 써서 제출해달라고 요구했을 뿐,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더불어 자기가 그리스도의 성찬 자리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들을 어느 정도 관용해줘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4
즉, 에드워즈는 대각성과 교회가 더 인격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절대로 표지 그 자체를 인격적인 변화보다 앞세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그렇게 열광주의로 말미암은 폐해와 혼란을 바로잡고 대각성의 불길을 다시 키워가려고 했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노샘프턴 주민들은 영적인 잠에 다시 빠져들었고, 그와 함께 고질적인 병폐인 강력한 육적 기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즈와 마을 주민은 사례비 정상화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를 놓고서도 크게 마찰을 빚고 충돌하기 시작했으며, 친밀했던 둘 사이는 급격히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진행된 에드워즈의 성찬 개혁 시도는 노샘프턴 주민에게 거의 자신들을 향한 전면전 선포처럼 다가왔다. 노샘프턴 주민들은 에드워즈가 교회를 자기 뜻대로 휘저으려고 술수를 부린다고 생각했다.5 즉, 성찬 회원권 강화는 앞으로 자기 요구를 ‘무조건’ 관철하려는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한 포석이자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며, 진정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저지해야만 한다고 ‘감정적으로’ 판단했다. 그들에게는 이번 일을 막아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에드워즈의 노예로 전락하느냐 자유민으로 남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6
그러나 변론으로 에드워즈를 이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민들은 에드워즈의 ‘궤변'(?)을 무조건 무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가 자기 생각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힘썼으며, 책을 통해 겨우 의견을 피력하자 아예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곧장 그 책을 논박해줄 만한 저명한 사람을 물색하여 책을 보내버린 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임만이 유일한 문제 해결책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녔다.7
결국, 에드워즈의 사임 문제는 특별 교회 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위원회는 노샘프턴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에드워즈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교회 장악과 같은 정치적인 음모는 전혀 없었으며, 에드워즈는 그저 정직하게 양심의 명령에 따라 개혁을 시도했던 것뿐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해주었다.8 즉, 위원회는 에드워즈가 스토다드-윌리엄스 체제를 벗어나겠다고 한 점이 문제의 핵심이며, 오직 그것이 에드워즈가 사임해야 하는 이유라고 판결해준 셈이었다.
바꿔 말하면, 에드워즈의 교회 장악 시도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한 노샘프턴 주민들이 에드워즈를 근거 없이 모함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진 셈이었다. 그 모함은,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려는 모습이 없고, 여전히 육신의 혈기를 따라 살아가는 노샘프턴 주민들의 영혼을 깊이 염려했던 근본적인 이유이자, 그들의 영적인 실제 상태가 어떠한지를 확인해주는 객관적인 증거였다. 그래서 그는 주민들의 영혼을 깊이 염려하고 경고하는 내용으로 고별 설교로, 23년의 목회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래도 에드워즈가 후천년주의자가 아닌 무천년주의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그는 대각성을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전조’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열광주의의 폐해와 위험성을 훨씬 더 빠르고 실제적으로 파악해 대처하는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고 강화하는 개혁 작업이 영적 각성이 시들해진 다음이 아닌, 영적 각성이 일어남과 함께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올바른 개혁은 항상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성질이 있으니, 각성과 함께 개혁을 진행했다고 해도 분명히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을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회중의 모함과 선동으로 교회에서 쫓겨나는 극단적인 일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각성을 필두로 전 세계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어가실 것이라는 후천년적 전망은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는 개혁 작업이 한발 늦게 시행되게 했다. 그만큼 개혁 작업은 더 고통스럽고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결국 큰 파열음을 내며 붕괴하는 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특별히 주민들은 회심의 체험에 대해 자기들이 경험한 “망상적인 느낌”을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결코 “마음 속에 지속적인 분별력과 성품을” 다지거나 회심의 진정한 증거로서 “은혜의 실천과 열매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그런 풍습의 나쁜 결과들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회심한 것이라고 추정되는 흥분된 감정을 강조하던 주민들의 태도를 수용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1734~1735년 대각성 기간에 에드워즈가 좀더 성숙했었더라면, 더 신중하게 영들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비록 “회심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하더라도 진정한 회심자는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라고 고백했다.
노샘프턴 교인들의 교만함이 자라가는 데에 에드워즈도 일조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 열매를 거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반대자들이 일반인들을 선동하여 “이 분쟁이 신앙적인 분쟁이라고” 말하는 데에 크게 유리했다. 왜냐하면 “귀중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나(에드워즈)를 반대하는 그들의 열심을 미덕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이런 명분에서 자신들의 열정과 신랄함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신랄하고 격렬한 반응들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다.」 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울 때 주의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을 불로 시험하여 진가를 드러내고 결산하는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고전 3:10~15). 어려운 시기가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하신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실 때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미리 고치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이 선 줄로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은 머지않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오류의 군대와 일대 회전(會戰)을 벌여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몰리고 말 것이다.
2. 위대한 세대의 빛과 그림자
대각성은 근본적으로 에드워즈 할아버지 세대가 마련해놓은 울타리 안에서 활짝 핀 꽃과 같았다. 솔로몬 스토다드, 매더 부자(父子), 윌리엄 윌리엄스 등은 청교도 유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심을 증진하려고 함께 수고하고 협력했던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마련해놓은 훌륭한 울타리가 없었다면, 대각성의 영향이 그렇게 크고 강력하게 북미 대륙을 휩쓸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대각성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소망하며 그토록 수고했는가를 분명하게 확인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개혁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저항하며, 육신적인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부추기는 세속적인 세력이 그들 가운데 주류(主流)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도 물으셨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는 그들이 물려준 선한 유산의 혜택을 충분히 누린 만큼, 그들이 물려준 과오에 대한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에드워즈의 할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가장 큰 과오는 역시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으로 대표되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버린 일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특허장 갱신과 로저 윌리엄스 문제로 교회가 국가·정치 영역을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선을 지우는 길로 나아간 것은 실로 엄청난 실책(失策)이었다.
왜냐하면 그 길로 가면 목회자가 유능한 정치인이자 행정관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시민의 삶을 모든 면에서 관리·감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즉, 목회자가 사람들을 영적으로 변화시켜서 정치인들이 나라와 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확립하는 데 자연스러운 도움을 주는 대신, 일선에 나가 국가·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확립해놓고 그렇게 얻은 윤리적인 모범 시민을 다시 회심에 이르게 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 체제 안에서는 정치인과 행정 장관이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전방위적인 사역을 돕는 조력자 지위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정치인과 행정관들은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협력해야 할 준(準) 성직자의 직위를 갖게 되어, 교회 안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로버트 브레크 사건 때 문제 해결을 위해 기꺼이 공권력을 동원하고, 교회 여론 형성을 이들이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중도 언약 체제’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에서 후천년주의 이상(理想)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도, 부분적으로나마 교회와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일을 직접 보고 자란 데 있었다.
‘중도 언약 체제’ 안에서는 뉴잉글랜드 주민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천국 시민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 안에는 장차 뉴잉글랜드 지역이 천년왕국과 같이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되리라는 약속과 소망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며, 아직 윤리적일 뿐인 ‘모범 시민’을 우선 하나님 나라의 권속으로 받아들이고 성례를 베풀어 준 ‘다음에’ 회심을 장려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행하는 신앙의 일, 장차 하나님께 잘했다고 칭찬받을 만한 선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 및 교회와 정부에 주어진 고유한 소명을 무시한 것인 만큼, 실제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목회자가 영적인 일과 일반 윤리·도덕적인 사역을 병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스토다드 생애 말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기력이 왕성했던 스토다드는 오랫동안 양쪽 일을 비교적 잘 감당했다. 그러나 기력이 쇠한 말년에는 청년들의 비행(非行)을 그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10스토다드조차도 주민을 계도하여 모범 시민이 되게 하는 일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했던 셈이다.
두 번째는, 모범 시민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므로, 교회의 치리 수준이 그들의 윤리·도덕적 수준에 맞추어지는 기준 저하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주민 사이를 확 벌어지게 만든 ‘젊은이 성경’ 또는 ‘나쁜 책’ 사건은 그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에드워즈는 그 사건을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을 주민은 젊을 때의 ‘일상적인 윤리·도덕적 탈선’ 정도로 바라보면서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가려고 했다.11
노샘프턴 주민은 스토다드였다면 이런 일 정도는 그냥 한 번 호되게 꾸짖고 넘어갔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일을 영적인 의미에서 다루며 마을의 경건을 크게 위협하는 중대한 공적 범죄로 취급했고, 결국 그로 인해 주민들과 사이가 크게 나빠지고 말았다. 물론 주민들도 에드워즈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윤리·도덕적인 경범죄를 처벌하는 수준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12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치리 수준이 불신자에 적합하게 낮아져 버린 것이다.
세 번째는, 세속 문화가 교인들의 심령을 파고들어 장악했다는 점이다. 문화는 에드워즈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사고방식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면, 온갖 세속 문화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도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즉, 영국 본토의 성적 타락과 이성주의가 문화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들을 계속 죄에 붙들어두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올바르게 사역해도 참되고 온전한 심령의 변화보다는, 죄성의 발현이 잠시 억눌리고 늦추어지는 정도의 ‘피상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이런 사실은 조셉 홀리 3세의 경우를 보면 분명해진다. 1734~1735년의 부흥이 사그라진 계기를 제공한 조셉 홀리 2세의 아들인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탁월하게 경건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1748년에 이르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성적인 방종을 저지른 동생을 비호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있게 된다.13
대각성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때는 죄성이 잠잠해져서 ‘정말로’ 경건하게 변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불길이 사그라지자, 죄성은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 그의 인격을 장악했다. 에드워즈의 사임 문제가 불거지자, 신랄한 말로 주민들을 선동하며 에드워즈 사임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 바로 그였다.
훗날, 그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가 간 길로 나아가게 되고 만다.14 안타깝지만 그에게서는 돈과 높은 지위를 주님보다 더 사랑했던 가롯 유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노샘프턴 주민 가운데는 세속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끝내 두 마음을 품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상당했다. 교회를 사임하고 스톡브리지에 부임한 에드워즈를 사사건건 괴롭히며 선교 사역을 훼방하는 드와이트 장군과 윌리엄스 가문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모습도 마찬가지이며, 매사 에드워즈를 미워하고 반대한 친(親)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이즈리얼 윌리엄스도 마찬가지이다.
참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세대의 후예가 세속 문화의 훼방으로 선대의 선한 유산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고, 불신앙에 자기 영역을 심각할 정도로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들 마음속에서 역사하던 세속의 영은 자기 영향력을 줄이려고 시도한 에드워즈를 교회에서 쫓아내고 말 정도로 아주 강력한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더 이상 식민지 정부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질 무렵,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있던 솔로몬 스토다드는 청교도 전통 가운데 반드시 국가적인(또는 지역적인)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던 측면을 강조했다. 정직하고 기독교 교리를 확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완전한 회원이 되어야 했다. 회심은 그 이후에 따라올 수 있었다. 회심은 복음 설교뿐 아니라 주의 성찬 같은 교회의 예식들이 장려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 정책은 회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거의 모든 자녀가–고대 유럽 교회에서와 같이–교회의 세례 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도덕적인 결함, 윤리관, 또는 단순한 무관심 때문에 교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인들이 정식 교인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목사들은 거의 사회 전체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는 고대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각종 예식을 준수하는 민족으로 서게 될 것이었다 …(중략)…
아마도 에드워즈에게 가장 큰 비극은 원칙에 충실하려다가 목회를 실패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교인들에게 지적했던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외할아버지의 전통을 뒤집으려고 하다가 많은 것을 잃었다. 에드워즈는 영원한 영혼들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안위마저 기꺼이 포기하고자 했다. 에드워즈는 회심자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논리가 이 길을 요구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재앙의 길을 택했다.
죄를 억누르는 문제 또한 포함되었다는 점도 충분히 강조되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실제로 매우 중요했다. 에드워즈는 목사가 거의 모든 윤리 문제를 감독해야 한다는 스토다드의 가부장적 견해를 따르지 않았다. ‘젊은이 성경’ 사건에서 에드워즈의 가장 깊은 염려 가운데 하나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들이 저속한 말로 거룩한 말씀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급진적인 개혁은 직접적으로 교회 회원권의 기준에 맞추어졌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목사가 오직 교인들의 성찬 문제에 대해서만 윤리적 감독권을 갖는다는 훨씬 전형적인 복음주의 입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15
사람의 심령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심지어 자신도 자기 심령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의지한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불완전함과 실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허물과 오류가 있음에도 그들을 사용하고 높여주셨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꼭 책임을 물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며 많은 부분을 포용하고 관용하되, 잘못한 부분은 잘못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바로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개혁을 멈추지 말고 계속 진행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그것이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일 것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446, 507, 508.
2 같은 책, pp. 419, 423.
3 같은 책, pp. 536.
4 같은 책, pp. 505, 506, 536.
5 같은 책, p. 808 미주.
6 같은 책, p. 544.
7 같은 책, p. 521.
8 같은 책, p. 526.
9 같은 책, p. 542.
10 같은 책, p. 194.
11 같은 책, pp. 433, 436.
12 같은 책, p. 439.
13 같은 책, pp. 522, 523.
14 같은 책, pp. 526, 537.
15 같은 책, pp. 539,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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