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8) 그리스도밖에 모르던 위대한 어린아이, 조지 휫필드 <하>
김재호
1. 능력 있는 설교
휫필드는 회심한 뒤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새 생명을 추구하는 동안 건강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와 『일지(Journals)』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대목을 살펴보면, 과연 건강을 회복하려고 고향에 내려간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휫필드의 귀향(歸鄕) 생활은 홀리 클럽 친구들과 함께 경건하게 생활하던 그때의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시간 계획을 촘촘히 짠 뒤 그대로 실행했고, 저녁마다 일기를 쓰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허물이 발견되면 자기를 꾸짖으면서 그 허물에서 돌이켰다. 그러나 이때의 기록에는 회심하기 이전의 음울함과 두려움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다. 오히려 주님의 율법이 얼마나 달콤하고 즐거운지를 노래하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1
휫필드는 고향에 머무는 동안 매튜 헨리의 주석을 통해 성경을 연구했고, 성경에 기록된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소년 시절에 저지른 사소한 도둑질에 대해서까지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하고 그에 대한 피해를 배상해 주었다. 또한, 평일 저녁에는 신앙 모임을 인도하고 교도소의 죄수를 심방했다.2
물론, 회심한 지 얼마 안 된 휫필드가 잘못된 옛 신앙의 잔재를 한꺼번에 다 걷어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심과 함께 그의 심령에 깊이 뿌리내린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오류들(신비적, 행위 중심적 신앙)을 아주 빠른 속도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의 아이 같고 투명한 기질은, 그런 교정 작업이 한결 더 수월하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회심한 지 약 4년 정도 흐른 뒤에, 휫필드는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그 이전부터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사람의 영혼 안에 두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믿었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것도 구원받는 데에 효력을 끼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거절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휫필드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그 사실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오류에서 완전히 건져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3
휫필드의 회심 소식은 주변 사람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떤 이는 휫필드를 무시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심령에서 자연스럽고 품격 있게 배어 나오는 새 생명의 활기와 아름다움을 보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탄복하는 이가 더 많았다. 그렇게 휫필드에 탄복했던 이들은, 휫필드가 자신들의 목회자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에게 끊임없이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채근했고, 결국 휫필드는 1736년 6월 20일에 벤슨 주교의 집례로 영국 국교회 부제 안수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다. 안수를 받은 휫필드는 돌아오는 주일에 세인트 메리 드 크립드 교회에서 첫 공식 설교를 했다.4
그 뒤, 휫필드는 옥스퍼드에 2~3년 더 머무르면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목회 직을 맡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꼈으므로, 하나님께 아직 자기를 사역지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조지아(북아메리카의 조지아 주(州)) 선교사로 나가 있었던 존 웨슬리가 홀리 클럽 단원들에게 보낸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 나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완전히 사로잡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열악한 환경 가운데 복음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어떠했겠는가? 그런 가련한 이들을 향한 한없는 그리스도의 긍휼이 그를 강권하는 일을 거부하고 떨쳐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조지아 지역으로 가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면서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역이 시작될 줄 과연 누가 알았을까? 휫필드가 조지아로 떠나기 전에 고향인 글로스터에 들러서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자,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설교해달라고 졸랐다.
휫필드는 떠나는 마당에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없어서 그들에게 설교해주면서 2주간 고향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는 휫필드가 친척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들른 브리스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휫필드는 작별인사차 들른 그곳에서 한 번 설교했다가, 무려 4주 동안이나 평일에 한 번, 주일에는 두 번씩 설교해야만 했다.5
그렇게 휫필드는 지인들에게 겨우 작별을 고하고 난 뒤 조지아로 가기 위해 부랴부랴 런던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그 뒤로도 거의 1년 가까이 계속 영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는 마침 런던에 머물고 있었던 조지아 총독이, 휫필드가 자신과 같이 가야 한다고 하면서 출국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휫필드는 설교해달라는 요청에 못 이겨 약 3개월 동안 스톤하우스, 브리스틀, 바스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옥스퍼드로 돌아가서 8주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 정도면 총독의 준비가 충분히 끝났으리라 예상한 휫필드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총독은 여전히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휫필드를 계속 기다리게 했고, 이번에도 사람들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번에도 약 4개월가량 런던의 교회 이곳저곳을 순회하면서 일주일에 9~10차례 정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6
참 신기한 사실은, 똑같은 내용을 전하는데도 어떤 이가 하면 잘 듣고 어떤 이가 하면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없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도 휫필드의 설교에 대해 “툭하면 당신들은 날 때부터 짐승이고 반은 마귀였다고 단언하면서 모욕을 주는데도, 청중이 그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존경을 표하는지를 보고 있으면,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7
▲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려고 케닝턴 공유지로 몰려드는 사람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노력의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이목을 끌고 결과를 산출해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여 하나 둘씩 복음 전도 현장에 도입했다. 찰스 피니, 빌리 그레이엄 등으로 대표되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부흥주의자, 또는 신복음주의자라고 한다.
반면, 전도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일 뿐,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은 성령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교리 설교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면서 기도를 많이 했다. 휫필드는 이 유형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그가 진리를 선포할 때 그의 맑고 투명한 기질을 타고 참으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물이 샘솟듯 솟구치는 그러한 생명의 능력은 사람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서 선포되는 진리에 한껏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휫필드에게는 오늘날의 엉터리 부흥사가 벌이는 우스운 광대극이나 교묘한 최면적 심리전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입을 열어,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면 전하는 이의 심령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의 능력이 듣는 이의 심령에 날 선 비수처럼, 하지만 참으로 달콤하고도 웅장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를 대적하려고 굳게 마음먹고 왔던 이들이 되려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모두 헌금하고 가는 일이 허다했다. 이처럼 휫필드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강력하게 나타났고, 이는 휫필드가 일평생 강력하고 광범위한 복음 전도 사역을 지탱하는 근본 토대가 되었다.
「…… C.H. 스펄전도 윗필드가 보여준 모범에 개인적으로 신세를 졌음을 밝혔다.
조지 윗필드 같은 이름에 뒤따르는 관심에는 끝이 없다. 그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노라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뭔가 활발히 살아 움직이는 것을 자주 의식하게 된다. 그는 생(生)을 살았다. 다른 이들은 그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윗필드는 생명, 불길, 날개, 힘 그 자체였다. 주님께 순종하는 삶과 관련하여 내가 모범으로 삼고 싶은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조지 윗필드다. 그러나 내 걸음걸이로 그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도저히 감당 못 할 일일 것이다.」8
참으로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고 싶은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휫필드처럼 확실하게 위로부터 난 사람이 되라. 그리하면 당신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는 휫필드처럼 온갖 비난과 반대와 고생도 겸하여 받게 될 것이다.
헛되고 무익한 광대놀음과 최면술로 일하는 거짓된 애굽의 술사들이여! 그 어리석고 망령된 일을 속히 그만두고 돌이켜라. 하나님의 권능이 그 거짓됨을 산산조각내고, 당신을 영원한 불 못에 던져버리기 전에 빨리 그리하라.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기억하라.
2. 휫필드와 에드워즈
1737년 12월 30일에 신대륙을 향해 떠난 휫필드는 약 4개월 만에 조지아 해안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그 지역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는지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제적 궁핍은 신앙적 원리 위에 세워지고 운영되는 학교와 고아원에 대한 소망을 자연스럽게 품게 했다.
그렇게 찰스 웨슬리가 조지아에서 생활할 때 밑그림을 그려둔 고아원 건립이, 이제 휫필드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된 것이다. 또한 식민지 신탁 위원회도, 그가 고아원 건립과 운영을 맡아주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휫필드는 아메리카 대륙에 머문 지 고작 4달 만에 고아원 기금 마련을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9
8월 24일에 조지아를 떠난 휫필드는 11월 30일에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에서 사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휫필드를 시기한 당시 성직자들, 특히 중생(重生) 교리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이 휫필드를 본격적으로 배척하고 교회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한편, 휫필드는 모임 장소가 너무 좁아서 수백 명이 그냥 발길을 돌리는 일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향후 그의 사역을 대표할 야외 설교는 그런 이유로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 일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휫필드는 먼저 하웰 해리스와 교제를 나누면서, 그 일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 뒤에 그는 단계적으로 조심스럽게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휫필드는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첫 야외 설교를 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휫필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들판에는 어김없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휫필드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고아원 설립을 위해 아메리카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양 떼들을 얼마 전에 회심한 웨슬리 형제와 존 세닉에게 맡겨두고서 다시 영국을 떠났다.10 아메리카를 향해 가는 휫필드는 이미 참된 부흥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두가 초빙하고 싶어하는 그런 인물이 되어 있었다.
▲휫필드가 조지아 주에 세운 베데스다 고아원의 설계 도면
휫필드는 1739년 10월 30일에 다시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가 배에서 내린 곳은 델라웨어 주(州)의 루이스타운이었다. 루이스타운 시의 시장(市長)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휫필드에게 설교해달라고 부탁했다. 휫필드는 그 요청을 들어준 뒤에, 곧장 필라델피아와 뉴욕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수많은 이가 휫필드가 선포하는 진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들판으로 모여들었다. 휫필드가 한창 뉴욕 지방에서 진리를 증거하고 있을 무렵, 조나단 에드워즈가 편지를 보내 그와 교제하기를 청해왔다. 휫필드는 몇 달 안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가서 에드워즈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11 이는 휫필드가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지리적 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를 기점으로 삼아, 고아원이 세워질 남부 지역을 먼저 돌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바뀌어 1740년이 되자, 휫필드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사방팔방으로 가로지르면서 복음을 증거했다. 고아원 건축 준비가 끝나고 실제 건축에 들어가자, 휫필드는 다시 필라델피아와 뉴욕 지방으로 올라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고아원으로 돌아와 건축이 잘 이뤄지는가 살펴본 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지역으로 나아가 진리를 증거했다. 그런 다음, 다시 고아원 건축 진행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전에 에드워즈에게 말했던 대로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올라갔다.12
휫필드는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를 시작으로 뉴잉글랜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로드 아일랜드를 거쳐 보스턴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설교한 다음, 아메리카 식민지의 북쪽 끝에 있는 메인 주의 요크까지 나아가며 말씀을 전했다. 그러고는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 주 동안 교회와 들판을 누비며 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보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뉴잉글랜드 사역이 마무리되자, 휫필드는 해들리를 거쳐 노샘프턴으로 나아가 에드워즈를 만났다. 에드워즈가 이미 그해 2월에 휫필드에게 초청의 편지를 보냈으므로, 둘의 만남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13
그러나 에드워즈와 휫필드의 이 첫 만남은 그리 길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740년 10월 17일 금요일 오후에 노샘프턴에 도착한 휫필드는 다가오는 주일에 마지막으로 강단에 오른 뒤, 곧바로 노샘프턴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드워즈가 휫필드를 이스트 윈저까지 배웅한 시간을 더한다고 해도, 그 날 수는 5일이 채 넘지 않는다.14 그러나 에드워즈와 휫필드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서로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먼저 휫필드는 단 4차례의 설교를 통해, 에드워즈가 그토록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썼던 부흥의 불길을 완전히 되살려 놓았다. 휫필드는 10월 19일(주일) 일기에 선한 에드워즈 목사가 설교 시간 내내 울었고, 교인들도 똑같이 감동을 받았다고 적었다. 휫필드가 되살린 부흥의 불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12월에 휫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불길이 수많은 이에게 번져나가고 있다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3년 뒤인 1743년에는 이때 휫필드가 되살려놓은 부흥의 열기가 첫 번째 대각성을 능가했으며, 적어도 2년 이상 지속되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가정 예배 시간에 에드워즈의 어린 자녀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은 휫필드는, 그 자녀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내용의 말씀을 증거했다. 훗날, 에드워즈는 자기 딸들이 휫필드와 만난 뒤로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회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에드워즈는 다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을 더 멀리까지 퍼뜨리기 위해 휫필드처럼 순회 설교를 나서기까지 했다.15
휫필드가 에드워즈에게 끼친 영향이 그러했다면, 에드워즈가 휫필드에게 끼친 영향은 어떻게 될까? 에드워즈는 휫필드에게 경건한 가정생활의 모범을 보여주고, 강렬한 영적 고양을 곧이곧대로 좇는 일을 주의하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이 대목을 균형 있고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휫필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투명한 기질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둘째, 이때 그의 나이가 겨우 25살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청년 휫필드는 그의 기질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오로지 주님께만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기를 진실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까 심히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이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휫필드는 자신에게 아내를 더 사랑할 만한 한없이 자상한 성향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상숭배로 여기면서 극도로 경계하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휫필드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만한 인물인 엘리자베스 델라모트가 나타났다. 그러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려는 휫필드의 일편단심은 그녀를 강력한 연적(戀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든지 짓뭉개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휫필드는 천성적으로 긍휼이 많고, 다른 이의 심정과 상황에 자신을 동화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한 기질은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수한 연모의 마음을 짓뭉개며 외면하는 일을 말로 다할 수 없이 괴로운 일로 만들었다.
휫필드가 아메리카 식민지 남부를 횡단하면서 열심히 설교한 뒤에 고아원이 들어설 사반나에 도착하자, 델라모트에게서 날아온 편지가 그를 맞이했다. 휫필드는 다른 이에게서 온 편지에는 즉시 답장을 써서 보냈다. 하지만 유독 그녀의 편지에는 답장을 바로 쓰지 못했고, 답장을 써서 보내는 데 무려 3주가 걸렸다.
휫필드는 고심하면서 써 보낸 그 편지에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 우상숭배와 같으며,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다고 적었다. 물론, 휫필드는 그 편지를 델라모트가 받고서 얼마나 상심할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받았던 호의에 진실하게 감사하면서 그녀를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그녀와 함께한 참으로 즐거웠던 시간을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 보이고 말았다. 청년 휫필드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아내면서, 단 1, 2초 만이라도 델라모트가 있는 곳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편지에 살짝 드러냈다. 그러나 휫필드는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하니, 그러한 모든 것들은 잠잠해야만 한다는 말로써 편지를 끝맺었다.16
그러나 그런 편지를 보냈음에도 휫필드는 아주 치열한 내적 갈등을 자주 겪어야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병이 나서 앓아누울 정도였다. 그러자 휫필드는 차라리 그녀와 결혼하는 편이 낫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다는 자기 원칙을 꺾은 것은 아니었다. 휫필드에게는 고아원 관리 등을 비롯하여 자기 사역을 보조해 줄 사람이 늘 필요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심한 고통으로 인해 주님의 일에까지 지장이 가게 하느니, 결혼을 통해 양쪽 일에 모두 유익을 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휫필드는 그녀에게 청혼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휫필드의 입장에서는 이 결혼에 남녀 사이의 연정(戀情)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온갖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수많은 어려움을 기쁜 마음으로 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 뒤에, 그런 일이 참으로 가능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결혼해달라고 했다.17
휫필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그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제안이 델라모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는 사실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휫필드에 따르면, 델라모트는 휫필드를 우상숭배로 이끌어 넘어뜨릴 수 있는 소지가 가장 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휫필드는 결혼한 뒤에도 그런 일을 항상 경계하면서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외감과 거리감은, 그녀가 평생 신앙으로 잘 이겨내면서 살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요, 짐처럼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휫필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애정을 담아 “우리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같이 잘 이겨나갑시다.”라는 말로 청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신은 이러저러한 어려움(그것도 감당하기 상당히 어려운)을 평생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청혼한 것이었다.
마음이 있는 이로부터 그런 청혼을 받은 델라모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덜컥 결혼했다가 그를 올무에 몰아넣는 사람이 되면 어찌하겠는가? 또 그런 짐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히 그런 종류의 두려움과 염려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휫필드는 점점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져갔다. 그리고 그런 심적 상태로 그는 조나단, 사라 에드워즈의 가정에 머물렀다. 휫필드는 그 가정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휫필드도 에드워즈의 가정과 같은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다는 것이다.18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오로지 주님께만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바꾸거나 버릴 사람도 아니었다. 그 결과, 휫필드는 훗날 아내로 맞아들인 엘리자베스 제임스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결혼 전처럼 복음을 전해달라는 곳이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가서 마음껏 말씀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을 끝내 내켜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았다.19 어쨌거나 주님 안에서만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던 휫필드에게 에드워즈는 분명히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끼쳤던 것만은 분명하다. 마치 마르틴 부서가 존 칼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에드워즈는 강렬한 영적 고양을 보다 주의 깊게 헤아리지 못하는 25살짜리 청년에게 그런 행동의 위험성을 깨우쳐주고자 했다. 이 시기의 휫필드는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정서에 깊이 빠져 있었다(안 그런 시기가 없기는 하지만…).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그는 그러한 가르침과 정서를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휫필드는 참된 성령의 역사와 단순한 인간적인 열정을 다소 혼동하곤 했다. 이 시기의 그는 마치 자신이 사도들처럼 성령의 영감을 받아 말하는 듯한 표현과 암시를 종종 사용하곤 했다. 또한,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느낌을 성령의 인도 하심으로 여겨, 그 느낌을 따라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20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아주 비상하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일이 참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실은 그가 사라에게 일어난 아주 특별한 일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때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를 했던 에드워즈는, 그러한 강렬한 영적 경험과 고양에 인간적인 불순물이 얼마나 섞여 들어가기 쉬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런 일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위험한 영적 재난을 가져오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드워즈는 그런 인간적인 불순물에 의해 꺼져가는 부흥의 불길을 살리려고 온 힘을 다하던 차였다. 그래서 그는 휫필드의 그러한 성급함이 일을 크게 그르칠 수 있음을 깨우쳐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델라모트에게 휫필드의 청혼이 받아들이기 극히 어려운 제안이었던 것처럼, 그 당시의 휫필드가 에드워즈의 이 조언을 잘 소화해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휫필드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새 생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뜨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런 그의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면서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의 짐을 치워주셨다. 그때 휫필드는 누구보다도 그 은혜를 또렷하게 기억하여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고, 그 뒤로 일평생 오직 그 은혜만 의뢰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특유의 맑고 깨끗한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정 있는 힘껏 붙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휫필드의 사역에는 새 생명, 즉 중생 교리를 강력하게 선포하고 변호하는 일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는 그 진리를 전함으로 인해 온갖 비난과 반대가 몰려와도, 조금의 굽힘도 없이 열정적으로 그 진리를 선포했다. 심지어 자꾸만 한 여인에게로 향하는 순수한 마음까지도 기꺼이 짓밟아버릴 정도였다. 휫필드에게 살아있는 새 생명은 그처럼 참으로 절대적인 것이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극히 귀한 보배였다.
그런데 같은 생명을 소유한 존경하는 대선배가 자신을 조용히 불러서 인간적인 상상의 산물을 따르지 말라고 충고했으니,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뜻밖이었겠는가?21 그것도 그리스도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끝없이 불타오르던 아이처럼 맑고 투명한 심성의 소유자에게 말이다.
물론 사리에 밝고 예의 바른 청년 휫필드는 에드워즈의 충고에 정중한 반응을 보였다. 더불어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난 뒤에는, 에드워즈의 충고가 무엇인지 깨닫고 해당 내용을 상당히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휫필드가 에드워즈의 조언을 대체로 무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22
그 결과, 휫필드는 이 문제도 앞서 살펴본 결혼 문제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성령님의 역사에 인간적 상상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드는 일을 지극히 염려하고 경계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의 심령에 면밀하고도 생생하게 스며들게 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았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휫필드에게 결혼생활에 이어 그의 사역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향이었다. 처음 회심할 때부터 이미 휫필드의 삶과 신앙은 자리가 거의 다 잡혀있는 상태였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어떤 부분이 세부적으로 바뀐다고 해서, 그날 그를 인치신 성령님의 권능의 손길까지 바뀔 수는 없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는 같은 복음 안에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았고, 또 끝까지 서로 존경하며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은 타고난 기질과 행동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므로, 절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워지지 않았다.23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같은 은혜 안에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선한 역할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 감당했다는 점이다. 마치, 바울과 바나바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호비의 소책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대부분의 측면에서 그는 높이 칭찬할 만하다.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더 많고,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는 지극히 용납할 만하다. 내가 거의 모든 면(almost all)이라고 하는 것은, 윗필드 씨에게도 나름의 불완전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태양에도 흑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을 내치겠는가? …… 아니면 태양 빛이 싫다 하며 눈을 감겠는가? 그건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윗필드 씨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그의 약점에 대해서만 눈을 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겠다!」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철로써 철을 날카롭고 단단하게 하신다(잠 27:1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거듭났다면, 그가 받은 은혜가 많든지 적든지 그 사람을 정말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그의 빈틈(분명히 있다. 없을 수는 없다)을 온유와 긍휼로써 잘 메워주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성도에게 그렇게 하는 일은 참으로 마땅하고 선한 것이다.
3. 휫필드와 대각성
휫필드는 당시 복음주의적 부흥이 일어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활력을 불어넣었던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비롯하여 북아메리카를 횡단하면서 각계각층의 사람에게 폭넓게 복음을 전했다. 또한, 근본 교리에 동의하고 복음의 일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휫필드는 국교도, 비국교도, 회중교도, 장로교도, 침례교도를 비롯하여 모라비아교도와 온건한 퀘이커교도와도 교류하면서 협력했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복음과 구령의 열정을 토대로 같은 터전 위에 서 있는 모든 교파의 근본 터전을 넓혀주고 세워주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다.
만약 휫필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에드워즈가 이끌던 부흥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뉴잉글랜드 지역을 넘어서는 일조차도 그리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 부흥은, 그의 할아버지가 주도했던 부흥처럼 해당 지역 사람의 기억 속에만 아름답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휫필드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대각성 운동은 그 모든 장애물을 단숨에 뛰어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또, 휫필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발걸음으로 그 불길을 북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퍼뜨리는 일도 친히 감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으로 북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엮어서, 미국이라는 나라와 문화 정서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예일과 하버드가 새롭게 되고, 영국 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 분파가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한 것도 그가 열심히 사역한 결실이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명백한 회심의 증거를 보이지 못하는 이에게도 안수를 주는 관행이 개혁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도 역시 그였다.25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기억하는 대각성과 19세기의 복음주의적 선교 운동을 말하고 평가할 때면, 조지 휫필드의 이름은 항상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그는 사역 초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사람들의 광신을 부추길 수 있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누구보다도 싫어하고 반대하던 그가 광신을 조장하는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휫필드가 다시 북아메리카 전역을 누비면서 침착함, 솔직한 잘못 인정과 사과, 사려 깊음, 진솔함, 인내와 더불어 여전히 복음적 순수함과 명료함을 꾸준히 보여주자, 그러한 그에 대한 오해는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물론 그의 대적들은 끊임없이 그런 약점을 물고 늘어졌지만, 복음에 목마른 일반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비방들을 대체로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연약함에 대처할 때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 휫필드가 마귀의 훼방 및 다른 이의 오류와 성급함에 대처하던 전형적인 자세였다.26
그래서 휫필드는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중생을 무척 좋아했다. 휫필드는 에드워즈처럼 지적인 수고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포괄적으로 가려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참으로 거듭난 사람의 행실과 성령의 능력으로써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이고도 장엄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논쟁이나 변론은 단순한 복음과 중생 교리가 공격을 받을 때만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가려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그의 대응은 연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세상의 심장부를 복음으로 융단 폭격하는 일에는 참으로 적합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경계선에 가만히 걸쳐 앉은 채, 사람의 교훈을 교묘하게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이를 밝혀내고 걸러내는 일에는 다소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노선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휫필드의 삶에는 그가 일으켜 세운 연약한 사람이 많은 만큼, 사람들에게 어이없이 이용당하는 경우도 참 많았다.
무엇보다 휫필드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단순하고 분명한 복음과 중생 교리를 자유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가 어떻게 위협하고 파괴해 들어갈지를 다소 길게 내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존 웨슬리와 같은 이와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낼 뿐, 그의 결점을 제대로 경계하고 개선하는 일을 비교적 잘 감당하지 못했다.
현대 교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오순절주의가, 웨슬리가 내던 빛과 함께 일던 그을음이 결국 빛까지 잠식해버린 결과임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 세기 뒤에 국교회 역시도 옥스퍼드 운동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과 급격하게 친밀해진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윗필드는 신앙의 기본 원칙에 대한 믿음을 널리 강화시켰다. 그는 성경의 무오(無誤)함,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문자 그대로의 부활, 승천, 재림을 주장했으며, 이는 부흥운동의 모든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입장이었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윗필드는 이 교리들을 설파했을 뿐만 아니라 이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 누구하고도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사실 그의 이런 입장은 사람들이 이 진리 체계에 확고한 믿음을 갖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 체계는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대다수 영어권 세계 기독교를 규정짓는 큰 특징이었다.」27
한편으로는 바나바를 보는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을 보는 것만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휫필드는 수많은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고귀한 일을 잘 감당했다. 이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단 12:3).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구름 같은 양 떼가 천국을 빼앗으려고 앞을 다투어 몰려가는 진귀한 광경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그와 같이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위대한 어린아이가 다시 한 번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에 충만하게 되는 일이 있기를 참으로 소망하고 기도한다.
각주
1 아놀드 델리모어,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오현미 옮김, 복 있는 사람, pp. 93, 96.
2 위의 책, pp. 94, 97~99.
3 위의 책, p. 100.
4 위의 책, pp. 101, 112~116.
5 위의 책, pp. 121, 124~127.
6 위의 책, pp. 126~132.
7 위의 책, p. 470.
8 위의 책, p. 1196.
9 위의 책, pp. 227~230
10 위의 책, pp. 246~250, 271, 281, 282.
11 위의 책, pp. 441, 461~468.
12 위의 책, pp. 473~476, 498, 499.
13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p. 567, 571~574,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p. 303~305, 309.
14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 581,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p. 307, 312.
15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09, 310, 325, 326.
16 아놀드 델리모어,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오현미 옮김, 복 있는 사람, pp. 501~503.
17 위의 책, pp. 503~507.
18 위의 책, pp. 509, 510, 58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10.
19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p. 746, 747,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 311.
20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p. 357, 358,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 316.
21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 808,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 316.
22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pp. 581, 808, 809,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p. 317.
23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17.
24 아놀드 델리모어,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오현미 옮김, 복 있는 사람, p. 841.
25 위의 책, pp. 842, 843, 1194, 604, 605, 966.
26 위의 책, pp. 835~841, 854.
27 위의 책, p. 1195.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8) 그리스도밖에 모르던 위대한 어린아이, 조지 휫필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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