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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김재호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천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려가시고, 왜 그렇게 하시는가를 밝히 알려주는 진리의 견고한 두 기둥과 같다. 그러나 참 안타깝게도 본인은 근 30여 년 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그렇게 중요한 진리의 내용은 고사하고 이름조차도 들어볼 수 없었다.
그러니 신앙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밀려오는 영적인 방황과 고통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강단에서도 이러한 진리에 기초한 교훈보다는 죄의 본질이 간과된 윤리·도덕적인 수준의 교훈과 처방이 나오는 일이 잦아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죄를 깨닫고 참된 자유로 나아갈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가 길을 잃은 채 양극단으로 치우치며 방황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자기 의지를 동원하여 죄와 싸우다가 그만 잘못된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했고, 반대로 어떤 이는 사랑을 남용하면서 무한 긍정으로 향하기도 했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애처로운 현대 교회의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더욱 귀하게 여기면서, 각자 심령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 행위 언약
행위 언약이란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첫 언약을 가리킨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언약에서 아담과 그의 후손이 장차 어떤 상태가 될지 결정하는 요인이 바로 ‘행위’였기 때문이다. 아담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거할 상태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 언약의 의미를 조금만 더 곱씹어보면, 전체적으로는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언약은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인 자유’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위 언약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유 행위자이신 것처럼 완전한 인격적 자유 속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아담에게 내려주시는 대목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의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땅에서 나게 하셨는데,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령하시기를 “그 동산의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네가 먹을 수는 있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창 2:8~9, 15~17, 바른 성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경작하며 지키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이미(already)’ 충분하게 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직(but not yet)’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에게 주신 충분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용하여 땅을 잘 ‘가꾸어서’, 완전히 아름답고 선한 ‘결실’을 맺어야 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 주어진 행위 언약의 이러한 적극적인 측면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분이시다. 무엇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이 정말 모든 것이 영원 전부터 완전하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저 가만히 계신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충만함과 자유로움 속에서, 세 위격이 서로를 ‘계속’ 지극히 영화롭고 존귀하게 하신다. 그러한 지고(至高)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면서 조금의 변함도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특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도 그와 같이 행해야 했다. 참된 자유로움 가운데 온 세상 만물을 지극히 선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과 모형 역할을 ‘계속’ 훌륭하게 감당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아담이 그러한 자기 사명을 온전하게 잘 감당했을 때, 그 결실로써 이 세상은 하나님 영광의 정수를 영원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아담에게 분명하게 확증해주심으로써, 사람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스러운 그의 분깃을 가리켜주셨다. 그러므로 행위 언약은, 당신 영광의 지극한 풍요로움에 영원히 참여하게 하시려고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고귀한 천지창조 목적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행위 언약에는 이러한 적극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지켜내는 방어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물론, 이 역시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에서 비롯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약,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위격이 ‘서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서로’를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본래의 영광스러움은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자유로움을 ‘오직’ 서로를 위하는 일에만 사용하시고, 다른 일에는 ‘일절’ 거부하신다. 그리함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영원히 지켜가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당신의 본성을 부인하거나 거스르는 일이 전혀 없으신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다(딤후 2:13; 약 1:17).
그러므로 아담은, 자연 만물에 ‘이미’ 충분하게 계시되어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역행하는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앞세우며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었다. 아담은 그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이 땅을 잘 가꾸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했던 만큼이나, 땅을 망치는 일을 거부하는 일에도 똑같이 적극적이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담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만다. 더하여, 본래 예비된 영원한 생명의 정반대 편에 있는 영원한 사망이 그의 분깃이 되고 만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 생각만 해도 섬뜩한 사망의 길 역시도 실제로 만들고 허용해 두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사망의 길로 가기를 전혀 원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사람이 그 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기를 원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를 참으로 원하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을 통해 충분하게 보여주신 뒤에, 정말로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사망의 길을 허용하심으로써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자기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자유와 책임’으로 대표되는 ‘공의’의 토대가 완벽하게 성립한다. 선택지가 단 하나밖에 없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은 사실 유명무실하다. 진정 자유롭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선택지가 둘 이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선택지가 둘 이상이라고 해서 다 자유로운 선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지가 최소한 둘 이상이면서, 동시에 양쪽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의 정보를 미리 충분하게 제공받아야 한다. 절대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거나 부족하게 제공받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해야 비로소 어떤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해주신 행위 언약은 이러한 자유와 책임의 기초 전제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행위 언약의 속성으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와 책임의 전제조건이 파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행위 언약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영광이 어떠한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에 따른 결실이 무엇인지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이 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은 온전히 사람에게 귀속(歸屬)된다. 몰랐다는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지적인 수준과는 별개로, 우리 인격과 온 세상 만물을 통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증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롬 1:20; 요 5:17). 단지 타락한 사람이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그 사실에 순종하기를 싫어하고 무시하며 반대할 따름이다.
이처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공의로우시며 완전한 자유와 선함 가운데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거스르는 이 시대의 악한 말들을 최대한 멀리하고 주의해야 한다.
운명론과 숙명론, 권위주의(교황 제도), 율법주의를 비롯하여 특별히 반정립(anti-thesis) 개념 자체를 거부하면서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소유하고 병립하게 하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지키는 일에 영원히 적극적이신 만큼, 이러한 악행의 책임을 사람에게 분명하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을 살며 그러한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2. 아담의 타락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담은 실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성경은 아담이 어떻게 그러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간결한 필치지만 꽤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굳이 성경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지 않고서도, 우리는 아담이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선 죽음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과 부인하는 일의 어려운 정도를 나란히 비교해보면, 부인하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가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을 뜻하겠는가? 언약의 대표자인 아담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찾아내기가 심히 어렵다. 사실, 다른 답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또한, 우리 마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도 그러한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증언해준다. 그러한 것들은 누가 억지로 주입하고 세뇌해서 생겨난 것들이 아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한다. 마치, 철이 자석에 끌려가듯이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자기 형제를 질투하면서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하는 말 못하는 어린 아기를 예로 들어서, 사람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는 일을 논증하려고 했겠는가?
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원죄 교리만큼 경험적으로 증명된 교리도 없다’는 말을 기꺼이 수긍하겠는가? 이처럼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어려울 만큼 부패해있다. 그러한 사실은 온 인류의 조상이자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행위 언약을 받았던 바로 그 당사자, 즉 아담이 죄의 권세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그 사건의 실제 상황을 기록해놓은 창세기 3장으로 다 함께 가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라고 물었다. 그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기를 “동산 나무 열매를 우리가 먹어도 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죽지 않도록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라.’고 말씀하셨다.” 하니, 그 뱀이 그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고 말하였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는 먹음직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열리고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을 위하여 치마를 만들었다. 날이 서늘할 무렵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 3:1~8, 바른 성경)」
아담의 범죄는 아내 하와가 마귀의 꾐에 넘어간 것에서 말미암았다. 누군가는 여기서 이 마귀의 존재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곤 한다. ‘언제 어떻게 마귀가 죄의 기원이 되었고, 마귀가 어떻게 뱀을 통해 말한 것이냐?’와 같이 알기 어려운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집착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일어난 것이겠느냐’는 것이다(요 3:12). 성경은 근본적으로 모든 진리를 상세하게 제시하며 입증하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했다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모든 문제의 근본이 되는 죄와 사망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숙고해보게 한다. 죄와 사망의 문제, 즉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조차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는 이에게, 하늘에서 일어난 알기 어려운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말해봐야 과연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들은 내용을 쓸데없이 과장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런 엄청난 진리를 알게 된 자기를 자랑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구원의 문제를 그보다 못한 문제처럼 여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고후 12:6)?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유로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 상세하게 계시해주지 않으신 것이다. 물론, 마귀론이라는 분야에서 마귀의 존재적 특성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더 심층적으로 다뤄볼 수는 있다. 그러나 참된 신자들은 그런 일을 하는 중에도,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게 늘 주의하면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범죄가 그의 마음속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마음에서 발생한 거짓 교훈이 하와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야 한다. 나머지는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가 알아서 감당하게 하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마귀는 하와에게 다가와서, 마치 있을 수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건넸다(창 3:1). 그리고 그 말은 하나님 공의의 경륜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이미(already)’ 모든 것이 충분히 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므로 하와는 그때 뱀이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챘어야 했다. 그러한 명백한 진리에 담대하게 맞설 정도로 하나님을 우습고 초라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마귀에게서 얻을 것이 사망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하와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귀가 교묘한 뉘앙스와 이미지를 통해 마음속에 불어넣은 강렬한 불안감을 ‘스스로’ 떨쳐내려고 열심을 내다가 그만, 하나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 넘어서고 만 것이다(창 3:3).
물론 마귀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하와의 불안정한 마음 상태를 눈치챈 마귀의 발언은 한층 더 담대하고 강렬해진다. 그때부터 하나님에 관한 왜곡된 개념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영원 전부터 더함도 덜 함도 없는 유일하고 자존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와 같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말한 사망에 관한 말은 순전히 사람을 영원히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꾸며낸 협박이자 거짓말에 불과했다(창 3:4, 5). 그에게 하나님의 자유로움이란 곧 방종을 뜻했고, 하나님의 자존적 충분성은 피조물을 억압하기 위해 씌워놓은 실체 없는 멍에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마귀는 스스로 매여있는 그 억압에서 속히 벗어나,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라고 하와를 부추겼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로써 말이다.
“괜한 겁먹지 말고 네 마음의 중심과 성향이 하나님이 아닌 자아가 되기를 선택해라. 잘 봐라, 하나님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도 순전히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만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더냐? 그러니 그 형상대로 지어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일이 어떻게 너희를 사망으로 몰고 가겠느냐?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두신 범주와 경계선을 자아 중심적으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길이야말로 진정 창조적이고도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가 되는 길이라고 사람을 꾀었던 것이다. 그것이 행위 언약이 가리키고 있는 완전함에 이르는 ‘진짜’ 길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반드시 죽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와는 어리석게도 마귀의 거짓 교훈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귀의 자기중심적인 ‘새로운’ 지혜와 성향이 하와의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마음 안에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탐심’이 강력하게 일어났고, 그 탐심이 원하는 바를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비극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창 3:6).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안에서 탐심이 일어나려고 할 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우리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하나님 말씀보다도 그것을 더 낫게 여기게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빨리 눈치채야 한다. 그리하여 하와처럼 어리석게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주님께 빨리 나아가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고는 말씀을 다시 굳게 붙들어서 죄를 범하지 않게 자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하와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탐심에 못 이겨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다.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와는 자기 남편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건네주었다. 또, 아담은 아담대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누룩처럼 확산하는 죄의 특징과 죄의 문제와 관련해서 인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죄는 절대로 한 자리에 얌전하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마치 병균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듯, 죄는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죽고 사는 문제라는 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처신해야 했다. 즉 하와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여 일깨우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가엾게 여겨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녀를 용서해달라고 예수님처럼 간절히 빌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한심하게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넙죽 받아 먹어버리고 말았다. 아담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죄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상한 교훈에 빠져서, 순전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가 빠져있는 이상한 교훈의 패역함과 자기 중심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라고 일러줘야 한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아담 타락의 실상은 대강 이러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알려준다.
먼저, 우리가 듣는 교훈의 중요성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의 타락은 마귀가 만들어낸 거짓 교훈을 들음으로써 말미암았다. 죄인의 모든 생각과 정서와 행동은 모두 그 거짓 교훈에 의존한다. 그런 면에서 죄인은 참으로 마귀를 의존하며 사는 마귀의 자녀들이다(요 8:44).
반대로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말미암는다(롬 10:17). 성도의 모든 생각과 정서와 행동은 모두 그 말씀에 의존한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다(갈 4: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거짓 교훈을 잘 분별하고 걸러내는 일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일은 올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거짓 교훈을 그냥 내버려두는 일은 죄가 누룩처럼 온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퍼져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같다. 성도는 거짓 교훈과 맞붙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워야만 한다(딤전 6:12).
두 번째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사실은 우리 행위의 무가치함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상태로 태어난다. 죄인인 우리에게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를 만회할 만한 의로운 행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다(시 49:8).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의에 대한 미련을 깨끗하게 접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인은 자기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롬 1:17).
3. 은혜 언약
행위 언약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온 세상이 당신의 영광 안에서 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참으로 잘 반영되어 있는, 선하기 그지없는 언약이다. 아담이 그 언약의 말씀대로 잘 지켜 행하기만 했다면, 약속된 영원한 복락을 너무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대한 언약의 대표자였던 아담이 그만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그릇된 길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의지는 그 수혜자인 사람의 의도적인 반대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아담과 온 세상에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내리셔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담을 찾아오기는 하셨으나 멸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해주셨다. 책망하시며 매를 들기는 하셨으나 은혜로 그 죗값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리고 끝내는 회초리마저 꺾어 버리셨다.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눈에 기이한 이 일(시 118:16~23)을 기록한 창세기 3장으로 다시 한 번 가보도록 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아담이 대답하기를 “제가 동산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네가 벌거벗은 것을 누가 네게 알려주었느냐?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저와 함께하도록 주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한 이 일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기를 “뱀이 저를 속여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너는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게 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으니, 그 여자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창 3:8~11, 20, 21, 바른 성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던 이유이다.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했다(창 3:8). 이 짧은 아담의 답변에는 실로 많은 구속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이 세상에 벌거벗음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자기 부모를 피해 숨는 아이가 대체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 앞에 벌거벗은 상태로 서게 된다.
그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의 아담은, 아이가 부모 앞에서 자기 벌거벗음에 이상함이나 부끄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자기 벌거벗음에 전혀 개의치 않았었다(창 2:25).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선택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든 자기 벌거벗음을 극복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되고 말았다(창 3:7).
아이에게는 따뜻한 의복과도 같은 부모의 사랑과 권위를 저버렸으니, 어찌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아담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였다. 그러나 그런 조잡한 것이 어찌 부모의 완전한 사랑과 보호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처럼 공허할 뿐이다(렘 2:13).
심지어 무화과나무 잎 치마를 개발해낸 아담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담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했으나 조금 부족한 것이 있어 부끄러워 숨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여전히’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인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아담은 자신의 그 모든 노력이 영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큰 두려움에 빠져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서 피해 도망하려고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죄가 얼마나 사람을 어리석고 충동적으로 만들어서, 오로지 눈앞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게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벌거벗은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기 노력’이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두려워했다면, ‘영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려는 ‘자기 노력’도 똑같이 실패하리라는 사실 역시도 깨달아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러한 ‘자기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서, 하나님께 온 맘으로 용서를 구하는 길로 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죄에 사로잡힌 아담은 오로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멸망의 두려움)만 따로 떼어내어 보았다. 그러고는 실패가 확실하다고 자인했던 바로 그 길로 힘껏 내달리고 말았다. 멸망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가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아담은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했던 하와를 지켜주고 보살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그 애틋했던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살기 위해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한 치졸함만이 아담의 마음속에 가득 남았다(창 3:12). 하와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자기 남편이 보여준 그 모습을 그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익혀서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창 3:13).
이처럼 죄는 정상적인 사고를 파괴하고서,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대목만 자기 맘대로 부각하고 편향되게 취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죄에 물든 사람이 내놓는 지혜의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서는, 구원의 경륜을 깨닫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고전 2:1~5). 결국에는 모두가 임박한 두려움에 못 이겨,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자기 노력’에 휩쓸리고 만다. 이처럼 사람은 총체적인 무능력과 부패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발버둥 치며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공허함만 더할 뿐이다.
이와 같이 사람을 타락하게 하려는 사탄의 간계는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런데 대체 사탄은 왜 이런 일을 이토록 치밀하게 꾸몄던 것일까? 모든 것이 선하게 창조된 이 세상에서 서로 원수질 만한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사탄이 사람을 죄와 사망이라는 덫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던 근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까지 높아지려는 헛된 마음을 품은 데 있었다(사 14:14). 그리고 그런 야심을 품은 사탄이 자기 망상을 실현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자존적 충분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일부터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자존하시고 스스로 충족하시는 분이시라면, 창조된 세상과 피조물은 참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안정된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사탄도 영원히 피조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언제나 충분하여서 모두가 항상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충돌하고 크게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사탄은 그 일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성공을 토대로 삼아, 자기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영원히 격상하려는 장밋빛 환상에 들떠있었을 것이다. 그런 악한 뜻과 계획을 품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존적 충분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기 위해 택한 대상이 바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죄와 사망의 사슬에 꽁꽁 묶어두면서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세상에 던졌다.
“하나님께서 진정 자유와 책임을 아는 공의로우신 분이면서 또한 그 공의로 온 세상에 복 주기를 계획하신 선한 주인이시라면, 이처럼 자의로 하나님을 거스른 아담과 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그에게 책임을 물어 멸망시키시겠는가?
아,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조물에게 재앙을 주려고 그들을 만드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복을 주시겠는가? 오, 보아라! 하나님의 공의란 실로 일장춘몽과도 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권세와 통치를 존중하고 순종하던 지금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노라. 나는 이제부터 나를 부당하게 억압하던 그 존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노라!”
사탄의 이러한 교묘한 거짓말에 속아 수많은 천사가 자기 자리를 이탈했다(유 1:6). C.S. 루이스는 마귀가 갖고 있는 이러한 자기 확신의 헛됨을 가리켜 ‘지옥의 명확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1 이러한 확신은, 개미가 점과 선이 아닌 공간의 개념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그러한 저차원적인 질문과 도전에 대해 은혜 언약이라는 궁극적인 답을 꺼내 드셨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행위 언약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에 복 주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기초해있다(롬 13:8~11).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세 전부터’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에 참된 자유와 책임이 깃들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행위 언약은 그보다 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한 영원한 언약을 가리키며 의존하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자아도취에 빠져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영원한 언약을 꺼내 드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따라, 마귀가 쳐놓은 간교한 그물 안으로 친히 발을 내디디셨다. 죄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손수 그 결박을 풀어주시며 그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그러자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 줄을 힘껏 당겨서, 사망의 덫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그때 마귀는 자기의 영원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었다. 마귀가 악인들을 움직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을 때, 그가 그토록 불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던 공의와 사랑이 서로 연합하여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즉, 마귀가 가장 자신 있게 내놓았던 증거가 되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가장 지독한 반역마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 모든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에서 밝히 빛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창세 전부터 이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 안에서 참된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하실 완전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대한 일을 오직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홀로 제정하시고 성취하셨다. 사람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고 택하신 자에게 값없이 나누어주셨다.
이처럼 행위 언약의 핵심이 ‘인간의 자유로운 순종’이라면, 은혜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엡 1:4; 요 13:1).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들고 놓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온다(행 13:48). 그 은혜는 저항할 수 없으며 거절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행위 언약의 저주를 대신 당하시고 약속된 축복을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밝히 보여주시는데, 그 영광스러운 초청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로움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힘껏 따르는 사람이 되고야 만다. 억지나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그 고귀한 은혜를 최대한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그리하게 된다.
이처럼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을 무너뜨리지 않고 도리어 굳게 세워준다. 이전에는 죄로 인해 도무지 할 수 없었던 일을 자원하여 하게 하는 힘을 ‘속 사람’에게 공급해준다(고후 4:16). 그렇게 진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요 8:32).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혜 언약에는 마귀의 반역을 쳐서 무너뜨리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을 따라 마귀를 영원히 대적하신다. 은혜 언약이니까 마귀도 은혜로 붙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히 2:16).
오히려 은혜 언약이 정말로 이 세상에 온전히 적용되려면, 마귀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원수 취급을 받아야만 한다. 이 세상의 참된 행복과 평안은, 이 세상을 노예로 삼으려는 마귀의 망상이 무너지고 파산 상태에 이름과 함께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은혜로 감싸 안으시는 것이 아닌, 행한 대로 돌려주시며 대적하신다. 하나님처럼 되기를 꿈꾼 만큼 지옥의 가장 밑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창 3:14).
이는 은혜가 진정 은혜일 수 있으려면, 공의가 적용되는 대상도 반드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은혜는 반드시 특별하고 선택된 일부에게만 임하는 ‘제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은혜가 무제한적으로 주어진다면, 은혜는 절대로 은혜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는 은혜와 공의가 연합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공의를 몽땅 흡수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혜는 공의의 또 다른 말이 되고, 따라서 범죄자는 사면받는 일을 정당하게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게 되고 만다. 즉, 죄인이 사면받는 것은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만큼 어리석지 않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오직 창세 전에 따로 택하여 구별하신 일부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적용하신다.
물론 그 일은 그런 은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는 마귀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그를 좇는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여 지옥에 던지심으로써, 선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영원히 은혜 될 수 있게 하신다.
복음이 항상 믿지 않는 자를 향한 심판의 경고와 함께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진실하게 바라면서도, 믿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벧후 3:9; 살후 3: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당신을 믿지 않고 완고하게 대적하는 무리를 그리스도께서 모두 심판하여 이기시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망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참으로 영원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확증해 보여주시는 ‘영광의 날’이기 때문이다.
4. 마무리하며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언약은 행위 언약이 아니라 ‘은혜 언약’이다. 그러나 참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행위 언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억지로나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은혜받은 자답게 자원함과 감사함으로 그리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 가운데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어 세상에 보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정말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이에게 확증해주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각주
1.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s Letter)』, 김선형 옮김, 홍성사, 2000-특별보급판,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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