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상-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창 2:7)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1문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에 대하여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요리문답은 보통 유치원생부터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합니다. 자녀들을 철두철미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려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요리문답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비롯해서 많은 요리문답이 있지만, 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가장 유명합니다. 이 소요리문답에 대해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과거 청교도와 개혁주의자들은 자기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양육하기 위해서 이 요리문답을 외우게 하며 뜻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열 살 정도만 되어도 모두 요리문답을 줄줄 외웠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불러, 오늘 배우는 1문을 물어보면 답이 막힘 없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아들에게, “지환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이 술술 나왔습니다.
이는 동양에서 천자문 외웠던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줄줄 읊었습니다. 서양, 적어도 개혁 교회라면 이 요리문답을 그렇게 외우도록 했습니다. 아이가 청소년기로 들어가기 직전이면 이런 교육이 보편적으로 다 마쳐졌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될 때 즈음이면, 소요리문답이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많은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유, 어린아이한테 이 요리문답의 의미를 어떻게 깨닫게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외우게 하십시오. 그 아이가 예수님처럼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서’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요리문답은 일차적으로 외우는 것입니다. 이해는 그다음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외우는 것을 통한 학습 방식을 상당히 우습게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려면 기본적으로 외워야 합니다. 외우는 것은 좋은 학습 방법입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다시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본문의 말씀을 잘 아실 겁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까?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지으신 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존재가 없어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스스로 영광을 받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많은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그중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라’라는 것입니다. 이 대답이 가장 완전하고 정상적인 표준 정답입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두꺼운 다윈의 전기가 있습니다. 비록 그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거기 나오는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원래 다윈은 영국 국교회 주교(목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포기했습니다. 다윈은 자연과학에 더 재미를 느껴, 자연과학을 더 공부하는 쪽으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그런 다윈이 가장 의심했었던 게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사회 전 영역에 기독교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보편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이해했고 굳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윈은 그러한 상황에서 생물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3년 동안 연구했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진화론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다윈의 마음은 항상 어떤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본문의 이 말씀 때문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드셨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진화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 가능하겠는가?’ 스스로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갈등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공개적으로 “나는 이제 더는 성경의 창조론을 신뢰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며 기대하신 바를 사람이 얼마만큼 성취하느냐?’ 이것이 바로 인생의 참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가장 쉽게 얘기하면, 지금과 같이 예배를 받으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배의 기준이 굉장히 느슨해지다 보니 예배가 천박해지고, 또 그러다 보니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나 예배를 준비하는 사역자나, 예배 자체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하나의 행사나 의식으로 여기곤 하는데, 그게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망령된 죄인지를 모릅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큰 교회들은 1부부터 4부, 5부, 6부까지 예배를 드립니다. 신자들은 각자 사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가서 예배 드리기도 하고, 일찍 아니면 늦게 가서 예배 드리고 오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예배들은 누구를 위해 드려집니까? 그 초점이 누구에게 가 있습니까? 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개설된 예배가 되고 맙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새로운 정의를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람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존재하게 한 기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에게서 존재의 근원을 찾으면 헤매게 됩니다. 우리는 아까 철학에 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철학이란 사람의 존재를 사람에게 묻고 답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수천 년 동안 뱅뱅 돕니다. 철학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생명의 길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계시를 따라갑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출구가 있습니다. 빠져나갈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의 길로 갑니다.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그분 앞에 영원토록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영원히 그분을 뵙지 못합니다. 흑암 속에 있게 됩니다. 지옥에 영원히 머무르며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천국에 있는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 이 이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실로 다양한 천국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만 다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성경에 계시된 천국의 모습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참 특색 있습니다.
계시록을 살펴보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찬양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에 대해 무얼 그리도 알려고 하십니까? 이 땅에서는 굳이 더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천국에서 그분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가서 살게 될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머무는 동안 그것만 알면 됩니다. 그 나라에 가면 실제로 그 삶이 어떠한가를 영원히 경험할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 대부분은, 날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일은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습니다. 머리 위에 왕관을 쓰고 살아가야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대부분이 각자가 원하는 길로 걸어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이상과 꿈과 계획을 위해 살아갑니다.
대학에 다니는 청년들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취업을 위해 좋은 스펙을 쌓아야지, 경력을 쌓아야지, 이력을 만들어야지, 장차 이 사회에 나가 출세해야지,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지, 좋은 직장을 잡아야지, 또래 친구들은 다 앞서 가는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이래야 결혼도 잘할 수 있겠지, 내 인생이 이래야 좀 편해지겠지?’ 이게 바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쌓아가는 자기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이 제일되는 존재 목적임을 알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는 사람과 아까 말한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의 삶의 모양새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비교해보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습니까? 반대로 추해지면 모든 피조물보다도 더 추해지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겉모습도 그렇습니다만 도덕적이고 내면적인 모습은 더 그러합니다. 사람이 내면이 추해지면 반쯤은 악마와 방불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을 예배하며 항상 가까이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바라신 원래의 모습, 즉 ‘내(하나님)가 계획했고, 목표로 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삶과 얼굴과 심령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매일 즐거워하며 즐기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인가 즐거운 것을 찾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한번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지식을 얻는 것, 유명해지는 것, 아름다워지는 것입니까? 또는 건강해지는 것을 즐거워합니까?’ 이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많은 시편, 전체의 거의 절반가량을 지었습니다. 그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즐거워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니까, 많은 소유, 많은 군사, 천한 목동에서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 양이라는 사실로 즐거워했습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바로 다윗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소요리문답 강해 (1)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하-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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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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