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9) 기독교 세계관과 변증
김재호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토대와 방식이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일까? 또,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나며, 그리스도인은 그런 차이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지금부터 그 점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자기 신뢰, 세속적 세계관의 근본 토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겸손을 비롯한 다른 미덕에 관해 말하고 칭송한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가득하다. 실제로, 190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중심 세계관 노릇을 했던 근대주의의 기초를 이룬 데카르트 사상(思想)의 핵심 내용을 쉽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고(思考)의 토대를 얻으려고 엄청나게 수고했다. 그러다가 그 어떤 의심이나 회의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모든 존재의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 두고서 온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길로 걸어갔다. 그에게 ‘생각하는 자신’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대상은 곧 재해석과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세상 사람이 그러한 그의 사상을 따라갔고, 그 결과 이 세상을 사람의 이성과 사고로 낱낱이 해부하고 해석해야만 한다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자기 지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보증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중이라고 해보자. 그래서 그 아이는 고심 끝에 자신은 주워온 자식이며, 이 어른분들은 그냥 맘씨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아이의 부모는 그때부터 부모가 아닌 그냥 맘씨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 대목에 이르면 근대주의가 실제로 믿고 추구한 ‘자기 신뢰’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근대주의자들은 자기 자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이성의 무한한 능력과 절대성’을 믿었던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이 세상을 인간 이성으로 낱낱이 해부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곳으로 보게 하는 근대주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했다. 그리고 그 세계관에 맞지 않는 가치들은, 그것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음에도 이성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무시되었다.
물론, 세상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근대주의의 모순점과 위험성을 조금 일찍 간파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이 세상이 이성의 부메랑에 의해 초토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 일을 막으려고 힘썼던 그들은 사람들에게 빨리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했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이 세상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무의미하고 삭막한 곳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 그래도 이 세상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가, 참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갈 이성적인 근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계속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이들을 가리켜 실존주의자라고 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근대주의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진 20세기에 들어서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 결과, 현재 세상 사람들은 중대한 논리적 모순점이 발견되어도 그런 점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답게’ 사는 데 유익하면 그만이라는 반응과 함께 말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동양 철학이나 신비, 초월 사상에 큰 호감을 보이는 것도 다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사람이 정말 이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까? 사람이 이성적 사고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이성의 정당한 기능과 역할을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부모가 정말 어떤 아이의 부모라면 그에 따르는 명백한 이성적, 논리적 증거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DNA 검사 결과를 통해 어떤 아이가 내 자녀일 확률이 0%로 나왔는데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확실하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그때까지 감추어져 있던 실존주의자들의 ‘자기 신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니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이성 대신에 ‘인간 본성의 무한한 능력과 절대성’을 굳게 믿고 의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에 근거하여 현대인에게 익숙한 ‘자아실현 세계관’이 탄생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자아실현에 함몰된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말았다. 그들은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와 분명한 사실이 있다고 해도, 지극히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자기 세뇌를 따라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끝까지 고수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에는 항상 자기 신뢰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이성을 믿든 감정을 믿든 의지를 믿든, 또는 본성을 믿든지 항상 사람의 무엇에는 무한한 능력과 절대성이 내재해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아무리 사조(思潮)가 바뀌고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를 반복해도, 이 세상이 자기 신뢰를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하는 온갖 주장이나 소리를 접할 때 그러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나 해탈과 같은 소리를 접할 때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소리의 본질을 계속 추적해가면, 결국에는 가장 굳건한 형태의 자기 신뢰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 토대
세속적 세계관이 자기 신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터를 잡고 있다(골 2:3).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모든 존재의 근거를 두고서 온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데카르트에게 인간 이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곧 회의와 재해석이 되었고, 니체에게 자아실현을 역행하는 것은 곧 초월의 대상이 되었듯이 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곧 재해석과 전투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기독교 세계관의 한 분과(分科)인 창조 과학에서는 세속 과학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이나 빅뱅 이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이들 이론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탐구해야 한다는 동일과정의 철학적 전제(사람의 지혜를 믿는 믿음)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세속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일정한 환경 가운데 있지 않았다. 6일 동안의 천지창조는 물론이고, 노아 홍수 때 시공간이 얼마나 많이 뒤틀리고 격변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창조 과학자들은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이나 빅뱅 이론의 결과물들을 대체로 무시한다.
혹 그런 것을 사용할 때도 어디까지나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여 활용하지,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친히 인정하고 가르치신 이 세상의 격변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사람이 멋대로 배제해버리고서 이 세상의 연대나 기원을 탐구한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은 자기 지혜와 경험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이 차이가 바로 세속적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이며,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차이인 것이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영적 교만이요, 허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영원한 종말을 맞기까지 깨닫지 못한다(벧후 3:3~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허황된 세계관에 근거한 모든 소리를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분별하여 걸러내고, 때로는 재해석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께 나아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의 3가지 핵심 요소
참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는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는,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다소 오해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지만 그런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정쩡하고 미흡한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가르치셨는가를 항상 유심히 살펴보고, 건전한(청교도 개혁주의) 신앙 도서를 통해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 배움과 체득의 과정이 없는 신앙은 절대로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결실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연구하고 확증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 두 가지가 잘 갖추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다. 교회를 몇 년 다녀본 이라면 대부분 이 용어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 실생활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다들 그저 막연하게 “창조는 말 그대로 창조이고, 타락은 나쁜 것이며, 구속은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심지어는 구속(救贖, redemption)을 경찰이 나쁜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어 두는 구속(拘束)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당신 안에 완전히 잡아 가두셨다는 의미로써 말이다. 교회가 얼마나 성경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 않고 뜬구름 잡듯이 가르쳐왔는가를 보여주는 실로 어이없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완전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께서만 존재하셨다. 그때는 시공간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창조 이전을 가리켜 ‘그때’라고 부르는 일도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류이다. 하지만 시공간적 제약 안에서 지음 받은 사람이 ‘그때’를 달리 지칭할 방도가 없으므로,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야 할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완전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만물이 스스로 생겨나고 무한히 발전한다는 진화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금방 이해하게 된다. 피조물에게는 스스로 존재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로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한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처음부터 사람이었고 원숭이는 처음부터 원숭이였다. 사람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원숭이가 될 수 없으며, 원숭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전히 원숭이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 세상 만물에는 각기 고유한 목적과 질서와 조화로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지으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창조 개념을 이해한 이는, 무목적성을 추구하고 질서와 조화로움을 어지럽히는 현대 대중문화나 예술을 가까이하지 않게 된다. 더불어 그는 동성애와 무정부주의를 반대하며, 어른과 선생님 공경을 옹호하는 예의 바른 이가 된다.
어떤 이는 이 말이 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 사실로 알고 믿는 이가 과연 동성애자가 되거나 동성애를 옹호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동성애에 빠져 있거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이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타락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죄로 부패해있다는 뜻이다. 자연인은 지성도 감정도 의지도 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육체도 죄로 인해 쇠하다가 결국 무너진다. 사람은 죄의 철저한 지배를 받는 죄의 노예이며, 그에게서 참된 자유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전적 타락의 개념을 참으로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그는 모든 면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탁하는 길로 가게 된다. 그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로 자존감이니, 자신의 공로니, 자기 선택의 결과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한다(고전 2:2). 전적 타락이 무엇인지 참으로 아는 이는 그런 가망 없는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탁월한 지성도, 열렬한 감정도, 굳센 의지도, 고고(孤高)한 인간성도, 부모와 친척과 배우자와 자식도 결국 다 죄의 올무 아래에서 허망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자기 의를 저 멀리 내던져버리고서 죄와 상관없으신 분께 자기를 온전히 의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구속은 죗값을 대신 치러서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는 ‘대속(代贖)’을 말한다. 따라서 누군가 이 구속의 개념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절대로 만사를 자기 멋대로 하면서 사는 ‘율법폐기주의적인 자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한 획도 폐하지 않으신다(눅 16: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그 법대로 집행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분께서 죄를 범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람이 아무리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죄를 지었다고 해도 사형을 피해갈 수 없다(롬 1:29~32).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거나 ‘폐기’하는 은혜와 사랑이 아니다. 공의를 무시하는 그런 은혜와 사랑은 죄인들이 계속 죄를 즐기며 살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된 위조품이며,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낚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미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일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구속의 사랑은 당신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하게 성취하는 의로운 사랑이다(마 5:17~19).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죄로 죽어야 할 수많은 이를 사망에서 건져내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완전한 의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율법의 정죄와 형벌에서 놓여 참 자유를 얻게 된다(요 8:32). 또한, 그는 그 자유로 인해 율법주의자보다도 더 율법을 사랑하며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된다(마 5:20).
물론,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고자 함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최고로 안전한 길이자 가장 밝은 등불이 바로 율법이기에 그 법대로 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이다(시 119:105, 106).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밝히 드러나고, 그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하면서 그 일을 힘써 행한다.
그러므로 진정 그리스도인답게, 즉 정말로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 이 3요소가 우리 심령 안에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해가면서 날이 갈수록 더 새로워져야 한다. 그런 이는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온갖 궤변들에도 마음에 별다른 요동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난리를 치면 칠수록 그 이면에 깔린 세상 사람들의 허망함을 더욱 분명하게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싶은 선한 갈망에 더욱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4. 변증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확고해지면 질수록 세속적 세계관의 허황됨과 약점은 계속 드러나게 된다. 수많은 허황됨과 약점이 있지만, 그것들은 다 하나로 귀결된다.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가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람에게 무엇이 참된 의미와 가치를 지니려면 영원불멸성이 꼭 보장되어야 한다. 영원하지 않은 가치는 사람의 심령에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다. 잠깐 반짝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 다 잊혀지고 본래 가치를 상실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자기를 믿는 세속적 세계관을 따라 사는 이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하나 둘씩 깊은 허망함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다. 절대적인 하나님 대신 상대적인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한, 허망함은 그 사람의 영혼을 한없이 짓누를 것이다. 전도서는 그러한 이 세상의 근본적인 허망함을 잘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불멸함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악한 욕심에 취해 그 영원불멸함은 자신 안에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다. 수없는 한계와 제약 속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들어 영원하신 하나님 바라보기를 죽기보다도 더 싫어한다.
기독교 세계관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이러한 세상 사람의 근본적인 허망함과 어리석음을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더불어 그러한 어리석음은 그런 이들에게 적절한 변증을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접촉점 역할을 하게 된다. 전도서의 주제가 괜히 인생의 허무함이 아닌 것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허무함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위로와 소망이 변증의 기초 토대라면, 변증은 단순한 지적 작업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진리는 머리로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이가 변증을 고도의 지적 작업 정도로만 생각한다. 많이 배운 이들이 고차원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기독교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입증해내는 일을 변증이라고 여긴다.
물론, 변증에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부분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기에, 어느 정도의 지적인 수고가 들어간다. 그러나 그 지적인 수고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볼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밝혀내고, 그것과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정도의 역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변증에 필요한 지적 수준과 사고력은 보통 사람 정도면 충분하다. 변증을 위해 철학적 완전함을 꿈꾸지 말라. 그런 것은 평생 철학만 연구하는 철학자도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문벌 좋은 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성도에게도 변증을 하라고 명령한다(벧전 3:15, 16).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변증을 하기 위해 철학을 연마하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서 거룩하게 하면서, 구원의 소망에 관해 묻는 자들에게 답변할 내용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준비해놓으라고 할 뿐이다.
사실, 베드로도 촌구석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무식한 어부에 불과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참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리스도이신지를 조리 있게 설명하자, 그를 책잡기 위해 모인 유력한 공의회원조차도 반박할 거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놀라워할 따름이었다(행 4:8~14).
이처럼, 많은 이가 변증의 초점을 박학다식함에 맞추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참된 변증은 고차원적인 지식보다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지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말장난이나 궤변을 뛰어넘어, 인간의 교만함과 허망함과 비참함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그런 지혜로써 그들의 양심이 자기의 비참함을 자각할 수 있게 ‘적용’해주어야 한다(눅 2:35).
즉, 참된 변증이란 어떤 부분에서든지, 또 어떤 영역에서든지, 혹 어떤 맥락에서든지 인간의 자기 신뢰가 틈타려고 할 때, 도리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자기 신뢰의 근본적인 허망함을 드러내면서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참된 위로와 소망을 제시하는 통로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변증의 본질은 철저하게 믿음에 기초하지만, 외적 형식은 상대방의 말과 생각과 논리를 차용하고 그것에 맞추어주는 형태를 띤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에게 맞추어서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이다.
이쯤 해서 변증의 실례로 가장 유명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변증에 관심이 있는 이는 바울이 어떤 형태로 변증을 진행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을 총망라하고 있는 실제 사례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을 위한 변증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은 대상은 놀랍게도 그들의 우상숭배였다.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과 격렬한 ‘토론’에 들어갔다(행 17:16, 17).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놓고 그들과 ‘대화’했던 것이다.
바울은 원래 유대인의 회당을 돌면서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반이 없는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는 아테네 사람들의 기초적인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예수님을 전했다(18절). 그러자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주목하면서 그에게 모두(冒頭) 발언을 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여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은 우선 아테네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인류 보편의 종교심을 지목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그 수많은 우상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그들에게도 신적(神的)인 것을 감지하는 영적 감각이 분명히 실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영적 감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우상숭배는 그 영적 감각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찾는 일에 무익하게 되었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덩어리나 나뭇조각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어리석음과 허망함을 드러내는 중에 있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라는 교리와 ‘모든 사람은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며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죄인이다.’라는 교리를 우상숭배라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에 적용한 것에 해당한다(롬 1:19~23).
더불어 그러한 그의 행동은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숭배 뒤에 감추어져 있던 자기 신뢰에 창조와 타락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둥 2개를 사용하여 타격을 준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일반 종교심을 발판 삼아서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실재와 함께, 그들이 그런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죄인임을 구체적으로 변증해나간 것이다(행 17:22~28).
그런 뒤에 바울은 그러한 허망하고 망령된 행위를 버리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했다(30절). 또한 지금의 길을 계속 가면, 결국에는 공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그 증거로서 제시했다(31절).
다시 말해, 바울은 우상숭배라는 행위 뒤에 깔린 자기 신뢰의 허망함을 앞서 증거한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죽음이 교만으로 인해 나타난 비극이자 형벌이라는 사실을 ‘논증’하면서, 곧장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아간 것이다. 그 사실이 공의의 형벌로 멸망할 사람을 건져내실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해 보여준다고 의미로써 말이다. 그렇게 바울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3요소 전부를 변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들의 실제 삶에 밀접하게 적용해 주었다.
이처럼 변증이란 우리 믿음의 근본 토대인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진리를 세상 사람들이 더듬어 찾고 있던 바로 그 대상에 직접 적용해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하면 ‘변증이란 특별 계시의 가르침을 믿고 그 내용을 일반 계시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적용해서 일반 계시 스스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온 세상의 주인이요 주권자라는 사실을 증거하게 하는 행위이며,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 사이의 접촉점 역할을 하는 통로는 바로 인간의 죄악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엄청난 지식 물량공세로 우리 믿음을 위협해온다고 해도,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오히려 그런 공세를,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의 대홍수로 여겨야 한다. 그런 자세로 우리 인격 안에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 진리를 해당 공세의 근본 토대에 하나씩 분명하게 적용해가면 된다. 그러면 세상의 허망한 자기 신뢰는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런 허망함에 깊이 빠져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을 건져내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 것이다(행 17:34).
5. 마무리하며
사람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특정한 세계관이 가늠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세계관에 그 역할을 맡기느냐는 그 사람의 ‘믿음’이 결정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는 세속적 세계관에 그 역할을 맡기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기독교 세계관에 그 역할을 맡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조금씩 변증에도 눈을 뜨게 된다. 이는 변증의 본질이 바로 일반 은총의 영역에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가 불신자의 생각과 삶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깊이가 더해지면, 어느새 많이 배웠다고 하는 이들을 놀라게 하며 입을 다물게 하는 지혜로운 변증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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