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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적 각성과 성령의 열매
김재호
현대 기독교에서는 영적 각성이라는 말이 대개 은사주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헌신·봉사하게 되면 영적으로 각성했다고 한다. 여기에 방언이라도 터졌다거나, 꿈과 환상을 통해 앞날을 맞추기라도 하면 더 신뢰도가 올라간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신비하고 놀라운 외적 현상을 영적 각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에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의 역사가 많으니 주의하라고 한다(마 24:23~28; 고후 11:14).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각성이란 무엇일까? 영적 각성이 무엇이며 그 열매는 어떠한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의 신적 속성, 자신의 부패함,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각함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각성이란,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 죄로 죽은 사람의 영혼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일을 말한다. 그런 은혜가 임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과 그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게 된다(고후 4:6).
만약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죄인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자각하는 일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참으로 은혜 되게 하시려고, 아담이 온전한 자기 의지와 선택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는 일을 허용하셨다(롬 11:5, 6).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 은혜로 죄와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그동안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분 앞에서 멋대로 행한 자기 심령과 그런 심령으로 저지른 행위가 무슨 의미였는지를 함께, 또는 뒤따라 자각하게 된다. 비로소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역겨우며 불같은 진노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는지 밝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각성은 사람의 예상과는 반대로 심한 곤혹스러움과 고통을 안겨줄 때가 많다. 심지어는 영적 각성이 되려 타락한 본성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롬 7:8). 그래서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지옥 불 속으로 뛰어들기 좋아하는 자신의 어리석고 악한 실제 모습 앞에서 깊이 탄식하며 절망하게 된다(롬 7:9~11). 아무리 어르고 달래며 화내고 때려도, 꿋꿋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타오르는 새까만 구덩이로 용감히 돌진하는 자기 손과 발 때문에 심령이 깊이 상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죽어 있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여기게 된다.
사람마다 강도와 기간과 순서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영적 각성에는 이러한 자기 죄악의 실체와 자신의 무능력함을 전인격적으로 자각하는 일이 꼭 존재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과 그 속성에서 말미암는 영광스러움을 정말로 자각하면, 자신의 악독함과 그로 인해 받게 될 형벌을 자기 인격이 스스로 증거하고 감응하며 동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부인하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 펼쳐진다. 예전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만큼 자신의 악독함과 부패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떤 영적인 현상이 일어날 때, 성도들은 그런 일에 혹해서는 안 된다. 그런 각성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환영한 수많은 유대인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마 21:8, 9). 그런 각성으로 일어난 믿음은 죽은 믿음이어서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지 못한다(약 2:14~17). 결국에는 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잠깐 깨끗해졌다가 시궁창에서 다시 뒹구는 돼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교만하고 악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벧후 2:20~22).
또한, 자기 죄로 인한 고통과 어두움에 완전히 파묻히는 영적인 각성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참으로 각성한 자는 자기 죄로 인해 깊고 실제적인 절망 가운데 있기는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영혼에 비친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영광스러움에도 매여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무능함을 참으로 잘 알고 이해하면서도 절대로 그냥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랄 수 없는 그것을 정말로 바라고 소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다(눅 11:9~13). 불의한 재판장을 찾는 과부처럼,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처럼 고래 심줄보다도 더 끈질기게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늘어진다(눅 18:1~8; 창 32:21~31). 그렇게 그들은 정말 초인적인 기세와 능력으로 천국을 향해 맹렬하게 침노해 들어간다(마 11:12).
만약 그 일이 너무도 괴롭고 힘든 나머지 이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면, 곧장 그의 심령 안에서는 그것보다 몇백 배는 더 큰 괴로움과 고통이 밀려와서 맘대로 포기하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진정으로 각성한 이들은 어느 정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간이 지나가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죄의 짐을 내려놓고 참 평안을 누리는 데 이르게 된다(롬 7:24~8:3). 그리고 그 평안은 평생 그의 심령을 지배하면서, 죄로 낙심할 때마다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워준다.
이러한 영적 추구가 없는 각성도 참된 각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각성은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에 스스로 무너져 내린 가롯 유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마 27:3~5). 이런 이들은 정말로 깊은 영적 어둠이 찾아오면, 고개를 들어 예수님 바라보기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자애로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시던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지 않고, 계속 자기 죄와 허물만 바라본다. 그러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 속성, 그 앞에 선 죄인의 비참함,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 없는 자비하심을 고르고 균형 있게 자각해야 참된 영적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요소를 한꺼번에 똑같은 정도와 크기로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좀 뒤늦게 자각하기도 하고, 누구는 죄인의 비참함을 좀 덜 강하게 자각하기도 하며, 누구는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압도적으로 자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적 각성을 일반화하여 일정한 공식처럼 다루는 일이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빠진 각성은 참된 각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한 요소는 다른 요소를 활성화하고 깊이를 더해주면서 결국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자비하심을 자각한 이는 주님 앞에서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의 심령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메뚜기 같음을 함께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악독함을 정말로 자각한 이는 양이 자기 목자에게 안기듯 그리스도의 넓은 품으로 힘껏 달려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자각한 이는 자기 죄의 끔찍함에 몸서리치며 깊이 겸비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이러한 세 요소가 한 사람의 영혼과 인격 안에 균형 있고 깊이 있게 뿌리내리고 터를 잡는 일을 가리켜 영적인 각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요소가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종교적 행위를 가리켜 영적으로 각성했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고 오류이다(마 7:22, 23).
2. 영적 각성과 성령의 열매
참으로 각성한 이들은 이 세 요소를 지각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적 감각은 각 요소로부터 경건과 거룩, 자기 부인과 겸손, 참된 너그러움과 평안이라는 참 신앙의 근본 토대를 마련해준다. 성도가 그 토대 위에서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신앙에 물을 주고 가꾸면, 우리가 종종 듣곤 했던 ‘성령의 9가지 열매’라는 신앙의 열매가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열리게 된다(갈 5:22, 23).
교회에 다니는 이들 중에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함, 선함, 충성, 온유, 절제’라는 이 신앙의 덕목을 싫어하고 거부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와 같은 열매를 맺기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열매 맺기를 바란다고 하는 이 시대 교인이 입에 올리는 말을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 얼마나 신앙의 근본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바라보면서 똑바로 나아갔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들판을 헤매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천국에 이를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과 신기루에 휘둘리고 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앞서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대개 일반적인 윤리·도덕의 맥락에서 생각한다. 예를 들면 매일 늦게 들어오며 집안 상황에 무관심했던 남편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정적으로 바뀐 일, 아무 데나 쉽게 돈을 쓰던 아내가 계획적으로 지출하기 시작한 일, 어떤 교인이 온갖 역경을 이겨낸 성공 이야기, 냉소적이고 겉돌던 아이가 밝고 친절한 성격으로 바뀐 일, 겸손하게 행하며 양보하기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 등을 보고 좋아하면서, 이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개선’이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아니다. 이런 열매를 맺으려고 굳이 영적으로 각성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적당한 자기반성과 교육 등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에는 그 열매를 맺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마치 사람과 동물을 구분할 때 이성(理性)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듯이, 성령의 열매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란 앞서 말한 세 요소가 단단히 결합해 있어서, 영적으로 각성하지 않은 사람은 감히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신앙 덕목을 뜻한다(히 11:38). 즉, 성령으로 ‘완전히 새로 태어난 사람’이 ‘옛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좇는 것’을 말한다(갈 5:24~26).
예를 들면 기꺼이 자신을 개에 비유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낮은 마음’,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시기를 감당치 못하던 백부장의 ‘겸손함과 자기 부인’,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보여준 ‘용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하나님을 찬송한 욥의 ‘인내’,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일에 끝까지 전심전력한 바울의 ‘충성’,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던 다윗의 ‘기쁨’,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인애와 온유함’, 나병을 고침 받고 주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인의 ‘감사’와 같은 것들이 있다.
진정으로 이러한 열매를 맺은 이들은 성령의 열매를 일반적인 윤리·도덕과 연결하여 취급하는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불신자도 행할 수 있는 윤리·도덕적인 개선을 성령의 열매로 다루는 행동을 신앙의 근본 토대를 허물고 위협하는 ‘죄악’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그런 생각은 불신자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그런 생각과 행동에서 거듭남이 없는 기독교, 성령을 소멸한 교회, 교회와 세상이 하나 된 끔찍한 장면을 분명하게 읽어낸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생각에 빠진 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규례를 외적으로 잘 준수하는 바리새인에게 자기 선함에 속지 말고 거듭나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23:1~36, 요 3:3~21). 즉,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행하는 모든 선행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도전하신 것이다. 실제로 바리새인의 세련됨과 선함은 위선과 교만이라는 사망의 늪에서 그들을 조금도 건져내지 못했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죄, 즉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크고 무서운 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윤리·도덕적 선함을 여기저기 때가 묻고 구멍 난 누더기나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무화과나뭇잎 치마로 여기신다. 그런 옷이 거지들의 골목이나 원시림(原始林)에서는 그런대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옷이 지극히 고귀하신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서도 같은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를 거지들의 너저분한 잔치 자리나 원시인들의 난잡하고 미개한 축제처럼 만들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으시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서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덜 부끄럽게 산 모든 영적 거지와 원시인들은 단 한 사람도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3. 참 신앙과 일반적 선함 사이의 올바른 관계
이처럼 성도는 영적 각성과 그 열매, 곧 거듭남과 구원의 열매가 이 세상의 일반적인 선함처럼 여겨지는 일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실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행 4:12). 그러나 성도를 죄에서 건져주신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이 세상이 자기 죄로 멸망하지 않게 붙들어주고 계시는 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만 온전히 좇는 사람에게는 앞서 말한 일반적인 선함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예를 들면, 전심으로 주님을 좇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재물을 향한 욕심과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탄식하며 재물에 끌리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기에 분주하다. 그런 이들이 땀 흘려 일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성도로서의 소명을 감당하는 데 잘 사용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에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순간에도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억누르시는 가운데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주시는 선한 섭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한다(행 14:17).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은 이들의 경제활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들은 풍부해도 궁핍해도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며 감사한다(빌 4:11, 12).
그러므로 이들은 굳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추어야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죄를 억누르는 수준을 넘어서서 경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부유한 자들과 맞서고 투쟁해야 할 이유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들어주시는 섭리 아래 거부해야 할 것은 거부하고, 참고 감내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조용히 넘어간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활동에는 어떤 위대한 뜻이나 엄청난 계획, 또는 특별한 목표가 있을 수 없다. 그저 주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맡겨주신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얻은 것들로 교회와 가정과 다른 성도를 섬기며 즐거워하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도의 삶과 태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 윤리·도덕적으로 이해된다. 그들은 성도가 왜 그렇게 행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는지 알지 못하고 사실 관심도 없다. 불신자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성도는 근본적으로 불편하고 성가시며,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가 정직하다, 타협하지 않는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안다, 마음이 따뜻하다, 공정하다,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안다는 등의 평가를 기꺼이 내어놓는다. 그래서 간혹 일부 고위층에서는 그런 성도를 눈여겨 봐뒀다가 데려가서 큰일을 맡기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이성 교제와 결혼이라는 문제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애틋한 연애감정이나 결혼이 주는 행복함과 안정감을 누리려고 배우자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그런 것에 휘둘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다. 그런데도 이들이 배우자를 찾고 결혼하려는 이유는, 오직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배우자에게 베풀어주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창 2:18~25). 또한, 그런 일이 대대로 이어지며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 일이 주님께서 뜻하신 바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창 1:27, 28).
그래서 이들은 배우자를 찾고 가정을 꾸리는 모든 순간순간에 성도로서의 본분과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쁘고 부유하고 끌리는 점이 많아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배우자감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아무리 못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정말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면 일등 신랑·신붓감이 된다.
따라서 이들의 이성 교제와 결혼생활에는 연애 감정을 들뜨게 하는 온갖 행사와 수단과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 싸움과 심리전이 전혀 필요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못난 점을 진솔하게 돌보아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서로 세워주기에 최선을 다하는 한 쌍이 되어 간다.
세상 불신자들은 이런 성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해 순결하다, 희생적이다, 진실하다, 다정다감하다, 현명하다 등등의 평가를 한다. 이 세상을 붙드시는 주님의 섭리 아래 사는 그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보고 있는 선한 부분까지 싸잡아 나쁘다고 하면서 싫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일을 하는 이를 세우려고 할 때, 불신자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들어보라고 가르친다(딤전 3:7). 불신자들의 평가는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셨는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최소한 그가 교회를 급격하게 죄로 치닫게 할 사람인지와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않는 이를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라고 선언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딤전 5:8). 이런 부분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는 전혀 말해주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상당히 말해주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런 상태에 있는 이에게는 개인적 권면, 여러 사람의 증언, 교회의 권고라는 절차를 거쳐 회개하고 돌이키게끔 해야 한다(마 18:15~17). 그러나 그 사람이 계속 그렇게 살기를 고집한다면, 그에게는 세상 불신자를 위해 예비된 저주와 진노보다 더 큰 저주와 진노가 임하게 된다.
성경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신자들도 한목소리로 악하다고 하는 죄를 짓는 이들에게 곧장 영원한 지옥 심판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고전 6:10; 갈 5:19~21). 즉 살인이나(자살 포함) 간음을 저지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기를 치고, 향락을 즐기며, 도둑질하고, 이단 사설(邪說)을 가르치며, 분쟁과 음모를 꾀하는 교인들은 빨리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다 멸망한다. 그들은 영적 각성은 고사하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하려고 불신자에게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와 섭리조차도 현저히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주여, 주여’하는 것이 어떻게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내겠는가? 주님께서는 그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4. 마무리하며
영적인 각성은 단순히 들뜨거나 무언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각성은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사용하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다(롬 14:18). 그러나 이들은 그런 사람의 인정을 신앙의 열매로 여기지 않으며, 그런 일을 바라거나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태를 정죄하며 멀리한다(눅 16:15).
여러분은 정말로 영적으로 각성했는가, 아니면 이름만 성도인 채로 여전히 세상을 좇고 있는가? 둘 사이는 훗날 예수님의 심판 자리에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엄청나게 큰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외면과 부인함을 받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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