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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교회와 이스라엘
김재호
▲ 존 린넬이 그린 <노아: 대홍수 전날 밤(Noah: The Eve of the Deluge)>
20세기 중반에 세대주의가 힘을 얻고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교회는 유대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을 따로 분리하여 그들에게 특별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이 약속하는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코앞에 다가왔다면서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는 유대인을 특별한 위치에 두려고 해서도, 유대인 전체가 회심할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둘 사이의 구분을 유지하시면서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 되게 하셨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 교회와 이스라엘의 공통분모, 하나님의 구속 언약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낼 구속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 3:15). 이때부터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아담,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을 비롯해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도 모두 그 한 가지 방식으로 구원받는다. 누구든지 장대에 달린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다(요 3:14, 15).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이들에게 영원한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벧후 3:13; 요 14:2, 3).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약속도 똑같이 믿고 의지한다. 그 믿음은 그들이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이 땅을 참된 소망과 평안 가운데 안전하게 지나게 한다(히 11:25, 26). 세상은 그들이 낙망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히 11:38).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 살아가는 장소와 시대와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이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항상 변함없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했던 그 언약은 심하게 요동하는 이 세상의 장단에 맞추어 달라지지 않는다(엡 1:4). 오히려 항상 변하는 세상을 한결같이 굳게 붙들어준다.
그러므로 성경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교회’라고 부르고, 신약의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행 7:38; 갈 6:16).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그 둘은 본질상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님이자 아버지이시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자 아들이다(히 1:5; 2:11~13; 11: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은 교회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간절히 바라고 소망했던 것들이다(요 8:56; 히 11:39, 40).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나무에서 생명을 얻고 그 안에서 자라간다(롬 11:24). 그들은 똑같이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며, 이 세상 백성이 주는 박해와 핍박을 겪는다(히 11:13, 36~38). 하나님께서는 그 둘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대우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유대인을 따로 구별하여 그들에게만 특별한 지위와 섭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을 차별하는 행위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고락을 함께한 형제 사이를 나누는 몹쓸 짓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똑같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욕되게 하는 악한 죄이다.
교회와 이스라엘은 변치 않는 유일한 구속 언약 안에서 똑같은 대상을 말한다.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모든 성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따로 분리하려는 이들을 주의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경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성도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조각내고 훼손하는 무뢰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택함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구속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뒤, 곧장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무려 4,0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람들은 그동안 언약 백성, 곧 하나님의 선민(選民)과 세상 사람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어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 가운데 아벨은 택하셨지만, 가인은 자기 본성대로 행하게 내버려 두셨다(창 4:25). 노아와 그의 식구 8명은 택하여 방주에 들이셨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며 육체의 일에 몰두하게 그냥 내버려 두셨다(벧전 3:20).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택하셨지만 그의 친지들은 그냥 내버려 두셨으며, 그의 자녀 가운데 이삭은 택하셨으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가게 하셨다(창 12:1; 21:12). 에서와 야곱 가운데는 야곱을 택하고 에서는 내버려 두셨으며, 사울과 다윗 가운데는 다윗을 택하고 사울은 버리셨다(창 25:22, 23; 행 13:21, 22).
이 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구원 역사가 어떠할지를 미리 보여준다. 즉, 예수님께서 공로나 노력 같은 외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하시리라는 사실을 예표(豫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세상에 그 사실을 미리 확증해 보여주시려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두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강하고 잘난 이방 민족 대신, 보잘것없고 미약하여 그냥 내버려 두면 ‘멸망해 사라질’ 유대인을 선택하셨다(신 7:7). 한편, 자기 힘을 믿고 하늘에 닿는 ‘바벨 탑’을 쌓은 이방 민족은 그냥 자기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멸망하게 하셨다(창 11:9). 그렇게 유대인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자 선물이라는 사실을 약 4천여 년에 걸쳐 이 세상에 확증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처럼, 유대인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받았으므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구속의 진리에 관하여 알 수 없었다(요 4:2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 완전히 닫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리아의 장군이었던 나아만과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회개 사건은 버림받은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미치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준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가운데는 그 사실을 말하는 대목이 존재한다(눅 4:27; 창 26:4).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선택과 유기라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섭리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외적인 모형일 뿐, 그 자체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공로를 따라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요 1:1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 뒤로는 이러한 외적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약 4,000년 동안 가시적인 모형을 통해 나타났던 일을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외적 장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제거되었으며, 이제는 ‘모든 민족’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불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눅 16:16; 엡 2:16~20).
참 이스라엘 사람, 곧 거듭난 구약의 성도들은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사모했다(요 8:56).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행 15:7~9).
그러나 단순히 가시적, 물리적 장벽 안에서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던 육신적 이스라엘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몸으로 그 장벽을 허무시는 일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이라고 여겼다(요 2:19~21; 막 14:55~59). 그들은 그렇게 모형을 실체로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와서 로마를 대체할 강력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들에게 세계 제국 대망(大望)의 핵심인 가시적인 규례와 장벽을 십자가 공로로 폐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게 하는 일은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그 일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그들의 자부심과 그동안 쏟아부은 율법적 열심을 모두 헛되게 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막 1:15; 행 3:13, 14). 그들의 완악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들도 박해했고 복음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격렬하게 방해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복음의 불길은 가시적인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이 아닌, 버림받은 이방인 가운데에서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롬 11:12). 약 4천여 년 동안 이어진 외적 상황이 한순간에 뒤집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장벽을 십자가로 허무신 이상, 그러한 ‘가시적인 상황’은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방인은 꼼짝없이 죽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면, 모든 ‘가시적인’ 축복과 선한 영적 유산을 상실한 유대인에게는 왜 희망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계획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파산한 유대인을, 이방인과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려내신다. 분명히, 많은 유대인이 완악함 가운데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여 멸망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악한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남겨두신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 길을 걷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 기적적으로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새 생명을 얻는다. 마치,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행 9:1~5). 하나님께서는 자기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맹렬하게 핍박하는 일에 앞장선 사상 최악의 유대인도 다시 살려내셨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망과 은혜가 여전히 남아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한 사실은, 이와 같은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어떠한지가 이 세상에 다시 한번 ‘가시적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을 때의 상황은 똑같이 비참하여 그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아 ‘보이는’ 상태였다. 자기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 영생을 얻지 못하며, 남은 것은 오직 지옥 형벌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망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을 아무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택하여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성령으로 강권하여 받아들이게 역사하신다. 바짝 마른 뼈 같던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안에서 똑같이 새 생명과 참 자유를 얻고, 순전한 기쁨과 소망을 누리는 데 이른다(겔 37장). 그들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복락은 서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지식은 그런 주권적인 섭리 아래 온 세상과 민족 가운데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민족적인 완악함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처음부터 버림받은 민족이었지만, 유대인은 처음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선택받은 그들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영원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참으로’ 거저 주어지는 은혜로운 선물임을 확증해주는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증거 역시도 사라져버린다.
즉, 성경이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이다(롬 11:32).”라고 명백하게 선언한 이상, 신약 시대 내내 유대인이 완악함에 빠져 있는 상황은 변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완악해진 유대인이 이방 민족의 냉대와 핍박을 받아 지구 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도록 그들을 특별한 섭리로 계속 지키고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아주 비참한 지경에 가두어두기는 하셨으나, 그런 특별한 은혜와 섭리까지 거두지는 않으셨다. 완악해진 유대인을 이야기할 때, 그런 부분을 함부로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원래 버림받은 이방인과 완악함으로 버려진 유대인 가운데 택하여 그분의 소유로 삼으신 이들을 복음으로 건져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을 이끌어내 주님의 재림이 신속하게 임하게 하자는 ‘백 투 더 예루살렘’과 같은 운동이나, 이스라엘 건국을 종말의 징조와 연결하여 유대인이 모두 회심할 날이 임박했다는 등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는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된 때, 곧 하나님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둔 온 세상 사람 중에 택하여 남겨두신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된 그때이기 때문이다.
3. 종말의 날, 영적인 실체가 이 세상에 완전하게 임하는 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영생을 실제로 향유하고 있으며,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그 사실을 확증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아직 이 세상에 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심판하여 멸하시는 날이 오기를, 곧 그분의 의가 있는 영원한 나라가 이 세상에 속히 임하기를 갈망하며 탄식한다(고후 5:2). 다시 말해, 종말의 날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새 생명과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증거가 분명하게 가리키는 그 ‘영원한 나라’가 이 세상에 실제로 임하는 날이다.
구약 성경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한데 엮어서 선포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 있다. 예수님의 초림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온 세상에 ‘모형을 통해’ 보여주셨던 선택과 유기라는 영적인 실체가 이 세상에 실제로 임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으로 ‘실제로’ 인도되었으나, 자기를 사랑하는 육신적 이스라엘은 진노의 홍수에 떠내려가 ‘실제로’ 파멸하고 말았다.
흔히,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한 날만 염두에 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때부터 다시 오시는 날에 이르는 기간 전체를 종말의 날로 부르기 때문이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는 ‘실제로’ 영생을 얻지만, 누구는 ‘실제로’ 영벌에 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일거에 끝내버리지 않으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든 시대, 모든 민족 가운데서 택하신 그분의 백성을 모두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벧후 3:9).
노아의 대홍수 심판이 이루어졌던 과정을 살펴보면, 현재의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한결 더 쉬워진다. 노아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산 위에 커다란 방주를 지었다. 산 위에 엄청난 크기의 방주가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구나 그 방주를 보면서 장차 저 산꼭대기까지 차오를 대홍수 심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택받은 노아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때가 되어’ 예고되었던 심판이 시작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사실을 믿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을 비롯해 노아와 함께 있었던 동물들은 ‘완성된 방주 안으로 실제로’ 들어갔다. 한편, 그 사실을 믿지 않았던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방주를 분명히 보면서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들 모두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를 마치자, 친히 방주 문을 닫으시고 세상을 물로 뒤덮어 심판하셨다.
여기서 ‘완성된 방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내내 예고되었던 그 일이 이 땅 위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 소망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모든 저주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믿지 않는 이들의 영원한 유기도 역시 지금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열린 방주 문을 통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으로 다 들어오면, 예수님께서는 방주 문을 닫고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기 위해 천군천사와 함께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이다. 즉, 우리는 아직 열려 있는 방주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그저 가시적인 차원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졌던 선택과 유기가 영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한 자의 영화와 세상 속에 있는 유기된 자의 영원한 멸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지금 그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누리는 영생과 이방인의 구원, 그리고 유대인의 완악함이라는 망원경을 통해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모든 것들이 완전하고 영원한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영원한 천국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는 영원한 지옥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곧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믿음으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고 소망하기에, 탄식함 가운데 매일 성화에 힘쓰게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만 어떤 특별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참으로 큰 잘못이다.
또한, 종말의 날에 있을 어떤 일과 그 일을 가리키는 어떤 징조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가 아닌 완악해진 유대인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금도 차별하지 않으신다. 성도들은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4.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유일하며 모두에게 차별이 없고 영원하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건짐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 영원한 영적 실체는 이미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이 세상에 임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 전체 모습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고 완전히 동등하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외형적인 구분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될 것이지만, 둘 사이에는 서로를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영적 실체가 나타난 교회를 제쳐놓고 가시적인 모형에 불과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집착하는 이들을 주의하도록 하자. 또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향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무시하는 반(反) 유대주의도 똑같이 주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시며, 수많은 유대인을 그분의 교회로 인도하기를 참으로 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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