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11) 약한 믿음
김재호
성경은 신자의 믿음이 모두 똑같다거나 평생 그대로라고 말하지 않는다. 개인차와 성숙도가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성경을 유심히 잘 살펴보면, 믿음이 약한 사람의 모습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직 연약했을 때의 모습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약하고 작은 믿음을 강한 믿음으로 자라도록 섭리하신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아두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보다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을뿐더러, 성도에게는 그런 이들이 장성한 신앙을 지닌 자가 되도록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1. 주님의 마음과 계획을 깊이 헤아리지 못함
어린아이는 부모의 심정과 생각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꼭 사고를 친다. 그러면 자신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내고 울며불며 부모를 찾는다. 믿음이 약한 이들도 이와 똑같다. 이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거룩함을 분명히 알고 믿는다.
그러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는’ 아직 잘 모른다(엡 3:19). 마치 아이가 부모 손에 이끌려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익히듯, 이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정말 어떠한 분이신지를 하나씩 ‘배워가는’ 중에 있다. 이러한 영적 사고뭉치, 천방지축, 말괄량이, 왈가닥이 어엿한 신사·숙녀가 되려면, 상당한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을 함께 해야 하는 부모의 고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은 그 모든 수고와 눈물을 다 잊어버릴 만큼 귀하고 값지다. 이미 장성한 분량에 이른 이에게는, 믿음이 약한 성도가 하나님의 크고 광대하심을 조금씩 헤아려가면서 의젓해지는 모습을 보는 일보다 더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은 없다(요삼 1:4).
성경에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신자의 모습이 많이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 대표자 격으로 기록해놓으신 인물은 역시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이 부문에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베드로의 약한 믿음을 다루기 전에 꼭 전제해야만 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미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자신의 죄와 비천함,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하게 알고 믿으며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눅 5:5~10). 그런데도 베드로가 저지른 사고 내역은 참으로 화려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을 가르치시자 감히 예수님을 붙들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마 16:21, 22),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겠다고 큰소리치다가 막상 그런 상황이 찾아오자 살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하기도 했다(마 26:35, 74). 심지어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는 그 일을 자기 힘으로 막아보겠다고 상대방보다 먼저 칼을 빼어 휘두르기까지 했다(눅 22:49, 50; 요 18:10).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 그 책이 이 세상보다 더 클 것이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사고 친 내역을 낱낱이 기록해도 그에 못지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육신의 부모는 아이를 키우다가 힘에 겨우면, 아이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구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말 한없는 인자하심과 온유하심으로 천방지축 같은 베드로를 계속 용납해주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넌 대체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라든가, “어휴, 이 답답아. 생각 좀 하고 행동하라고!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라고 하시며 면박을 주신 일이 있으셨던가? 성경에 그런 말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는 오직 조용히 베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뒤처리를 해주시면서, 따끔하게 훈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나와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하시는 모습에서는 인간 부모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조급함과 혈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마 12:19).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어리숙함을 넓은 마음으로 오래 참고 기다려주셨으며, 그런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베드로후서에 나타나는 성숙한 믿음과 성품을 지닌 베드로를 만든 주요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이들은 이런 ‘미숙한’ 신앙을 지닌 이들이 너무 깊은 근심과 고민에 잠기지 않게 주의하면서 오래 참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고후 2:5~7). 그리고 패역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줘야 한다. 이들의 마음 안에는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가 되고자 하는 ‘아이 같은’ 소망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소망까지도 철저하게 짓밟고 무너뜨리는 것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일깨워주는 거룩한 성도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꺼져가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정말 확실하게 끈 다음, 다시 불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가혹하고 무지막지한 채찍질이 훈육이 아니듯, 그런 행동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큰 비극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사람은 항상 자신이 여전히 많은 허물에 둘러싸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가슴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그런 마음과 태도로 믿음이 약한 성도를 대하면, 장성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생각과 행동이 지나침
어린아이는 정말 작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집착하는 일이 잦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대성통곡을 한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말해줘도,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면 아이는 결국 혼자 울다 지쳐서 곤한 잠에 빠져들게 되곤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숨 잘 자고 일어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또다시 온 집안을 헤집어놓고 다닌다.
이처럼 아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고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잘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자기 손으로 쥐고 있는 것과 경험을 통해 습득한 단편적인 사실에 지나치게 큰 중요성과 의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렇게 잘못 부여한 가중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교정되고, 그에 따라 아이도 조금씩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지나침은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로 음행하는 자를 멀리하라고 교훈했다. 그러자 일부 교인이 그런 죄를 짓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5:9~11). 그들이 바울의 권고를 따라 영적 순결함에 악영향을 주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멀리하려고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다가, 그 교훈에는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교회의 순결함’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현저한 죄를 짓는 이를 멀리하라고 편지한 것인데, 이들은 오로지 ‘순결함’만 생각하다가 그런 죄를 짓는 사람을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성도가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생각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이 세상 가운데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과도 맞지 않는 ‘지나친’ 것이었다(마 5:13).
또한, 고린도 교인 가운데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8:4~10).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관습이 제사에 사용한 제물을 먹는 행위가 그 제사상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데 있었다.
즉, 자신의 옛 문화·관습을 아직 넘어설 만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연약한 신자에게는 그런 행동이 ‘그리스도인은 우상을 섬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엉뚱한 뜻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충분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성도의 자유만 생각하다가, 그 자유를 다른 이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고전 8:1).
그러나 성도는 자유를 거저 받은 만큼, 그 자유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전 10:31~33).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자유가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지나친’ 자유 사용을 지양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사도 바울은 방언과 같은 은사나 신비한 체험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일 등을 바로 잡았다(고전 12~14장, 고후 10~12장). 성경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모세의 잘못된 분노(민 20:10~12), 베냐민 지파 전체가 멸절할 뻔한 일(삿 21:1~4), 입다의 맹세(삿 11:29~31), 사도 요한의 심판 청구(눅 9:54), 연장자를 꾸짖음(딤전 5:1), 거짓을 미워하다 처음 사랑까지 내버린 에베소 교회(계 2:2~6), 거짓 교사까지 관용한 두아디라 교회(계 2:19, 20) 등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아직 미숙한 성도가 다소 지나친 생각과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잘 교정하여 균형을 맞추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일에는 성경 전체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시각과 오래 참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머리로는 마치 기하학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공리(公理)로, 에덴으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모든 언약과 사건들을 공준(公準)으로 삼아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을 줄줄이 구슬 꿰듯 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평생 용납한 모세처럼 그들을 정말 오랫동안 품어줘야 한다. 마치 히브리서 기자가 다시 유대주의로 복귀하려는 교인들을 대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성급함과 교만함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이를 다시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3. 시험에 잘 넘어지고 인내하지 못함
어린아이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참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눈앞에 놓인 달콤한 사탕의 유혹을 참아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부모는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잘 따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해하고 기특해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좀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아이에게 다소 벅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지혜로운 부모는 기꺼이 아이에게 다소 벅찬 일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서 눈앞의 것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을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안겨주어도, 결국 제풀에 내팽개쳐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러한 부모의 지혜와 깊은 속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작게는 “엄마, 아빠 미워!” 부터 시작해서, 심하게는 가출, 방황, 자살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탈선과 원망과 불신이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자신에게 이런 ‘부당한’ 어려움을 강요하는 부모 따윈 필요 없다는 악한 본성이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아이의 인격을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다.
아이의 그러한 반항과 탈선은 참으로 화목하고 단란했던 부모·자식 관계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든다. 아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부모가 정말 물려주고 싶어했던 좋은 것을 결국 물려받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가운데 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익히면,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평생 잃어버리지도 않게 된다.
이 두 가지 모습 중에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두드러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따라 애굽의 가혹한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기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 애굽은 타락한 이 세상, 가혹한 압제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타락한 이 세상의 허망함과 곤고함에 짓눌리고 시달리던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어 만족과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일을 의미한다.
이들은 참으로 그 일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미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추격하던 죄와 사망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것을 보고 환호하듯 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와 함께 이들의 눈앞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지며, 한 발만 내디디면 ‘곧장’ 그곳에 이를 것만 같은 ‘기분과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정말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황량한 광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꼭 신기루처럼 온데간데없고, 온갖 독충, 식량·물 부족, 뜨거운 태양 빛, 매서운 밤 추위, 적대적인 이방 민족이 그들을 맞이한다. 이런 당혹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상황의 이면에는 우리 신앙이 정말 진실한지 시험하고 확증하며, 더욱 견고하고 깊이 있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지혜가 담겨 있다.
성경에서 광야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첫 세대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고 영접한 이들 중에서 일부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라도 주님을 찾고 나올 수 있도록 섭리하시며, 나오는 모두를 기쁘게 받아주신다.
성경이 이 사건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주님을 찾고 구하는 이들 중에는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온전하지 못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이들 앞에 어려움으로 가득한 광야를 두셔서, 정말로 그 사람의 심령 가운데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고 확증하신다.
만약, 단순히 세상의 고달픔과 압박에서 벗어나 모종의 심적 안위를 얻으려고 주님을 찾은 사람 앞에, 그것보다 더 심한 고달픔과 압박으로 가득한 광야가 나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참으로 자연스럽게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저버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다른 안식’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반대로, 정말로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으려고 주님을 찾은 이는 어떻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 한 그릇을 맞바꾸는 일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쓸 게 아니겠는가? 이처럼 광야는 그 사람이 마음에 정말로 품고 있는 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하나님의 시험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그 선지자’가 분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요 6:14). 그들은 예수님께서 모습을 감추시자, 바다를 건너가 예수님을 찾을 정도로 큰 열의를 나타냈다(요 6:24~25).
그러나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해 자신을 찾지 말고 생명의 떡인 그분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 자신을 찾으라고 하시자, 수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다(요 6:26~66).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참된 제자는, 다른 제자들을 돌아서게 한 그 말씀이 바로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요 6:67~71).
다시 말해,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한 첫 세대 가운데,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바랐던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광야에서 죽 한 그릇과 영원한 생명을 맞바꿔버리는 나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히 3:6~19; 12:16).
하나님께서는 그런 열매를 통해 그들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뿐, 실제 마음은 애굽의 바로가 주던 고기와 파와 마늘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확증하셨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오직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만 믿고 받아들였을 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채 광야를 걸어갔던 것이다. 결국, 원래 그들에게 약속되었던 영광스러운 가나안 땅은 그들이 아닌 그들의 자녀 세대에 돌아가고 말았다. 대신 그들에게는 황량한 광야가 영원한 유업으로 주어졌다.
반면, 시험을 끝까지 잘 참고 견디는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난 다음의 모습을 말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의 모습은 출애굽 첫 세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높은 지위를 향한 욕심, 생명의 위협에 허둥댐, 육체의 피로를 이겨내지 못함, 자연재해 앞에서 넋이 나감 등등, 크고 작은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제자들의 믿음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눅 9:46~48; 마 26:55, 56; 막 14:37~40; 막 4:36~41).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출애굽 첫 세대에서 엿보이는 목이 곧고 뻣뻣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그때마다 이내 주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했다. 물속에 빠져가는 베드로의 외침과 죄에 사로잡히는 바울의 탄식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 심령의 골수에 새겨 놓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본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을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출애굽 첫 세대는 겉으로는 돌아오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돌아오지 않은 반면, 제자들은 분명히 탈선하는 듯했지만 이내 돌아와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켰다(마 21:28~31).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부족함을 다 덮고도 남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의 상한 심령을 쉬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구속함을 받은 지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해주신다(롬 8:1, 2).
그러므로 시험에 잘 걸려 넘어지는 교인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의 심령이 뻣뻣하고 억센가에 가장 초점을 둬야 한다. 정말 잘하려다가 그만 육신의 연약함에 휘둘려 넘어지는 이라면, 베드로와 바울처럼 ‘상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찾고 구하는 일을 거의 본성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심령을 굳이 더 아프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과 술 취한 노아를 대하는 두 아들처럼 가능한 한 조용하게 덮고 넘어가 주는 가운데 타이르고 기도해주는 것이 올바르다. 이런 이들은 시간만 충분하게 주면, 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억세고 뻣뻣한 이들은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계속 지금처럼 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경고로 그 마음의 고집스러움과 뻔뻔함을 꺾어놔야 한다. 처음에는 개인 자격으로, 그다음에는 두세 사람의 확증을 더해서,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경고해야 한다.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권면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출교하고 그 사람과는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일을 통해 그 사람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다(마 18:15~17). 그러나 이 일을 할 때도 문제를 일으킨 주요 인물과 그 영향력에 멋모르고 휩쓸리는 이를 구분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한 첫 세대를 먼저 내팽개치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경고에 순응하는 이들은 기꺼이 형제와 자매처럼 대우해줘야 한다(눅 17:1, 2). 그들의 회개가 정말 진실했는지 아닌지는 주님께서 판단하실 부분이므로, 사람이 주제넘게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를 그냥 관대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렇게 방황하며 주님을 쉽게 등지던 출애굽 첫 세대가 어떤 결말에 이르렀는지를 일깨워주면서 용납해야 한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에 힘쓰라고 권면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회개한 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시험에 쉽게 걸려 넘어지던 옛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후회나 뉘우침 수준에 머물며 안주한 이들은 옛 죄악의 얽매임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멸망하는 날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4. 마무리하며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건전하고 올바른 목양이다. 믿음이 아직 약한 사람 가운데 누가 진실한 신자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거의 좋은 목양이 좌우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목양 원리 위에 든든하게 서 있는 신실한 목회자를 찾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얼마 없는 믿음으로나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런 사람을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이는 그를 정말 든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줄 선량한 목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일을 더 우선하는 이는 끝내 광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 엎드러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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