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8) 은혜와 은혜의 표지
김재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사람은 그것에 걸맞은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특징을 보고서 그 사람이 정말 은혜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본 뒤, 그에게 적합한 권면과 조치를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주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교회 전체와 연관되는 공적인 성격을 지닌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개인과 교회는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주제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주변적인 주제가 아니라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마귀의 훼방과 거짓말이 그만큼 더 집중되기 때문이다. 마치 예정 교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1. 은혜와 은혜의 수단
이 주제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은혜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친히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로마교는 이 부분에서 심각할 정도로 진리에서 떠나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직접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준다고 믿는다.
즉, 사제가 세례(영세)를 주면, 그 일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는 사효적(事效的, ex opere operato) 세례중생론을 믿는 것이다. 게다가 로마교는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祝聖)하는 순간, 그 빵과 포도주가 사람을 구원하는 신비한 효험을 지닌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믿는다.
그 외에도, 사제가 죄 사함을 선포하며 공로의 보고(寶庫)에 쌓여 있는 여분의 공로(功勞)를 꺼내어 분배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여공설(餘功說, Supererogation)도 믿는다. 이처럼 로마교 사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은혜 베풀어주는 일을 정말로 수행한다. 따라서 사제가 자기 직무를 수행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리 해주셔야만 한다. 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결국 그러한 일을 주관하는 사제나 그들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그러한 직무를 수행할 때 오류 없이 행한다는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 Papal infallibility)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거짓 교리를 낳고 말았다. 물론 그러한 행태는 예수님께서 엄하게 금지하신 것이다(마 23:8~12).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사람의 무엇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오직 성령께서 죄로 더러워진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친히 새롭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해나가신다. 이 일에는 사람이 끼어들 만한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감히 그 일을 수행할 수는 없다(고전 2:1~5).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택하신 사람을 ‘친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분이시니 말이다. 그렇게 믿는 이를 가리켜 강경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라고 한다. 정통 칼빈주의자는 강경 칼빈주의자를 따라 로마서 10:14~17에 나타난 명백한 가르침을 무시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같은 은혜를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성도를 그에게 보내주신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그에게 들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은혜를 이 세상에 분명하게 확증해 보여주셨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이러한 복음이 택하신 그 사람의 귀에 들려질 때, 성령님께서는 그 진리가 듣는 이의 영혼에 깊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도록 역사하신다. 죄로 가리워진 그 사람의 영적인 눈과 귀를 활짝 열어주셔서, 그가 그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발로 돌이켜 고침을 받게 하신다. 주님을 간절히 찾던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베드로를 통해 선포되는 그 진리를 따라 그의 온 가정이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행 10장).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복음을 전할 이들을 먼저 불러 세우신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나가 은혜의 소식을 힘껏 전하게 된다. 그들의 목소리 자체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들은 그저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 누가 구원에 이르게 될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께서 자기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부르신 만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리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혹은 많은 이가 돌아올지 적은 이가 돌아올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부분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즉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 부분에 손톱만큼도 개입할 수 없다(롬 9:15).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은혜를 나누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 뿐이다. 그 약속에 따라 세상의 저 죽어가는 영혼들을 가엾게 여겨달라고 간구하며 소망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수단(말씀, 기도, 성례)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한 탄원을 올릴 때 사용하는 방편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이 둘(은혜와 은혜의 수단)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반드시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주어지지만(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일하시는 방식이시다), 반대로 은혜의 수단이 은혜가 임할 것을 반드시 보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애써도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갈 수 없었던 바울처럼(행 16:6), 우리가 그러한 수단들을 아무리 애써 사용한다고 해도 결과는 주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맡겨놓고서 그저 주어진 일에 성실히 임하는 지혜와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허락하신 은혜가 크든 적든 그것을 항상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드온이 돌려보낸 31,800명과 같은 쓸모 없는 사람과 같이 되거나, 항아리와 횃불은 버려두고 중무장한 채로 기드온을 따라 나서려고 애쓰는 실로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몸소 목도하게 하시기 위해 전장(戰場)에 세워주신 한낱 보초병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적군을 보고 힘차게 나팔을 불어야 할 나팔수이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대를 온몸을 던져 막아내야만 하는 자살 특공대가 아니다. 그러니 매사 겸손하게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잘 보고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시 46:10).
2.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과 은혜의 표지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다운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이런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오직 사람의 영혼에 심겨진 은혜가 그의 성향과 인격을 다스리기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특징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간절히 찾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아이가 그와 같이 하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이 아이의 마음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서 아이의 성향과 인격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도 아이가 자기를 간절히 찾는 일을 보면, 기꺼이 달려가서 아이를 달래주면서 내심 흐뭇해한다.
은혜의 표지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 안에 거룩한 새 본성을 심어준다. 따라서 그 본성에 부합하는 은혜의 표지가 신자에게 나타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표지가 나타나는 데에는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일어나 걷고 말도 하며 딱딱한 음식도 꿀꺽꿀꺽 씹어 삼키기를 기대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은혜의 표지를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대면서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성도를 들들 볶는 목회 형태는 참으로 지양(止揚)해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 연령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돌봄과 책망을 함께 받으면서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손길은 오히려 건전한 인격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와 같이 신앙의 성숙도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막무가내식 은혜의 표지 적용은 건전한 신앙의 발달에 되려 악영향을 준다. 어린아이의 나이와 건강, 기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아이의 상태를 가늠하고 그것에 맞추어 훈육하듯이, 은혜의 표지도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적절하게 적용해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은혜의 표지는 각 사람의 신앙생활 연수(年數) 및 신앙적 여건,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가르침 등을 고려하여 지극히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교회 역사 전반을 객관적으로 두루 살피면서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맥락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히 5:12).
또한 부모가 검토하는 아이의 모든 특징들이, 결국은 아이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은혜의 표지도 결국에는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지게끔 적용해야 한다. 이 말은 은혜의 표지를 적용할 때,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은혜의 표지는 그 자체가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숨 쉬는 일(표지)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이의 소중한 생명(중생) 때문이고, 아이의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부모의 사랑(은혜)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은혜의 표지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표지가 나타나게 하는 은혜 자체에 모든 빛이 쏟아지게끔 적용해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때 양들은 자기가 은혜의 표지를 지니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그것을 그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평생을 살아갔을 뿐이었다(마 25:37~40; 눅 17:7~10).
이처럼 우리가 은혜의 표지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충분하게 이해하면, 그때부터는 은혜의 표지보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생겨나게 된다. 이런 시각을 지니게 된 이들은 누군가에게 은혜의 표지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그러한 상황이 몰고 올 파국(破局)을 엄중하고 분명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함께 바라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은혜가 은혜의 표지가 없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그런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게 된다. 그래서 그 믿음을 따라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려고 하게 된다(히 6:1~12; 갈 4:1~20).
물론, 이런 일은 목회자가 성도를 양육하고 권면할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 개개인이 죄를 짓고 자기 무능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근심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할 그 때에도, 그 심령 안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진정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안에서 은혜의 표지를 발견할 수 없을 때면, 도무지 그리스도인 같지 않으며 감히 주님을 뵐 면목과 자격이 없는 자기 모습으로 인해 심히 괴로워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결코 거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당신께 오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어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면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께서 예비해두신 완전한 의를 믿고 의지하는 길로 나아간다(마 12:20; 요 6:37). 비겁하고 더러운 자기를 바라보는 대신, 자기를 위해 피 흘려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아무리 못나고 지저분하며 더럽고 가증스러워도, 주님께서는 그런 죄인도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긍휼로써 지금도 나를 여전히 기다리고 찾고 계신다. 그러니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나아가겠다. 지금도 나를 그런 긍휼로 기다리고 계신 분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해서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일이 훨씬 더 염치없고 이기적이지 않은가?」
이처럼 진정 은혜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가 은혜의 표지를 제대로 못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오히려 더욱더 죄에서 돌아서서 주님께 더 바싹 다가가게 된다. 억지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 안에 깊이 심겨진 은혜가 자기의 추함보다도 그분의 은혜를 더 바라보게끔 그를 강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고 바라보는 이에게 이런저런 표지들을 들이대면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행동은 아직 뭘 잘 모르는 얼치기나, 남을 그저 괴롭게만 하는 일을 죄에 대한 참된 각성이나 거룩을 향한 선한 열심으로 착각하는 몽매(蒙昧)한 영적 사디스트나 하는 짓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와 성화이지, 양자의 영을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찾는 것처럼 이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롬 8:14, 15). 어설프게 익힌 지식으로써 이런 이들의 영혼을 괴롭게 하여 낙망하게 하는 일은 어리석은 율법주의자나 즐겨 하는 행동이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 23:23~28).
이런 일과 관련해서는, 7년 간 자기 내면을 혹독하게 성찰하는 힘든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자기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말고 위를 쳐다보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뢰하라는 말씀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은 토마스 굿윈이 좋은 안내자이자 선생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1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야 은혜의 표지만으로는 내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을 확신하기 위한 항시적인 은혜만 너무 치중하여 신뢰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온전하게 가치가 있음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2
또한,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도 여러분의 좋은 벗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구원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면서 고통 받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스펄전은 이름도 없는 어떤 집사가 임시로 강단에 올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설교를 듣고서 모든 죄의 짐을 내려놓았다. 다 함께 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심령이 괴로웠던 시절, 혹시나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가 살던 마을에 있는 모든 예배의 자리에 참석해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사하여주시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교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그런 식으로 여러 예배에 참석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곳의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었던 불쌍한 죄인에게 그 숭고한 진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존경할만한 목사님은 늘 율법에 대해 설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갈아엎어져 복음의 씨가 뿌려지길 기다리는 밭에 계속 쟁기질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다리가 없는 병사에게 진격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교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중략)……
그 교회의 목사님은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나오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교인 중에 어떤 깡마른 아저씨가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갔는데, 구두나 옷을 수선하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는 편이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남자는 전혀 지적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본문의 말씀대로 따라갔는데, 아마도 그 외에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그날의 본문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 땅의 모든 끝아(사 45:22). ……(중략)……
그러더니 그는 두 손을 번쩍 들더니, <초기 메소디스트파> 사람들만 낼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봐! 보란 말이야!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어. 그냥 바라보면 살 것이야!”
저는 그 즉시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놋 뱀이 들렸을 때와 비슷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되었습니다(민 21:6~9). 제 경우도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기 위해 수많은 것을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말입니까! 저는 눈알이 빠질 정도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그제야 먹구름이 물러가고 햇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에 저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그분을 단순히 바라보는 믿음에 대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모든 <초기 메소디스트파> 사람들보다도 더욱 크고 열정적으로 찬양을 불렀습니다.」3
지금 이 시간 참된 진지한 영적 열심으로 자기에게 은혜의 표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전전긍긍하면서 오로지 그 문제에만 깊이 골몰하는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굿윈과 스펄전과 같이 광야의 놋 뱀처럼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당신의 영혼을 짓누르던 그 모든 문제들은 눈 녹듯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니 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라.
3. 확증과 은혜의 표지
진정 성도가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신앙이 자라가면, 그에게서는 은혜의 표지가 점점 또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키가 자라고 지혜가 더해가듯, 성도는 자신이 성도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기 시작한다.
몸도 못 뒤집던 아이가 어느새 걸음마를 하더니, 또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친구들과 들판에서 공을 차며 논다. “엄마, 아빠”라는 말밖에 못하던 아이가 어느새 방에 들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도 읽는다. 물론, 아프고 구르고 넘어지는 일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진정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은혜가 속사람을 매일 새롭게 하기에(고후 4:16), 그런 표징이 겉으로도 점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전에는 도무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일만 그의 삶에 가득했지만, 이제는 점점 책망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자기 구원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께만 둔다(고전 4:4).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안에 굳게 자리잡은 이에게는 은혜의 표지가 조금씩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증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벧후 1:5~10).
이러한 확증적인 성격을 지닌 은혜의 표지는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그 표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즉, 이러한 표지는 지극히 공개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띤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은혜의 표지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천사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셨다(창 22:12).
보아스가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가 네 부모와 고국을 버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백성에게로 온 것을 내가 자세히 들었다(룻 2:11).”
그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 환자를 메고 그분께 왔으나, 무리 때문에 예수께 가까이 올 수 없었으므로, 그분이 계신 곳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은 후에 그 중풍 환자의 누운 침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하셨다(막 2:2~5).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예수 우리 주님을 뵙지 못하였느냐? 주님 안에서 내가 행한 일의 열매가 너희가 아니냐? 다른 이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주님 안에 있는 너희는 나의 사도직의 표시이다(고전 9:1, 2).」
이처럼 우리는 은혜의 표지가 우리 신앙의 건전성을 확증해주기까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가면서 계속 굳건해져야 한다.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길을 곧게 만들어 저는 다리가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끔 힘써야 한다(히 12:12, 13).
그리하여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순결한 양과 같은 성도라는 객관적인 확증을 얻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종종 시험에 걸려 넘어졌던 아브라함이 도저히 순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도 믿음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넉넉히 감당해내는 데 끝내 이르렀던 것처럼 말이다(히 11:19).
은혜 안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자라고 분명하게 확증 받기 전까지는 너무 쉽게 마음을 놓고 자만해지면 안 된다(고전 10:1~5). 돌밭과 가시밭 비유가 의미하는 바처럼,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바라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고서 따르는 이들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전부가 아닌 반쪽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쪽은 세상에 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마음으로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까지 거뜬히 해내곤 한다. 심지어 가룟 유다는 12사도의 반열에 올라 예수님과 어디든 함께 다니면서 진리의 사역을 3년 동안이나 감당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구원보다 돈과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 때가 되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본격적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자, 결국 그는 믿음을 내버리고 주님을 은 30닢에 팔아 넘기고 말았다.
이러한 확증과 관련한 좋은 책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 (The Religious Affection)』, 토마스 브룩스의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Heaven on earth: a treatise on Christian assurance)』, 매튜 미드의 『유사 그리스도인 (An Almost Christian Discovered)』 등이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진정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믿음 안에서 위와 같은 신앙 도서를 잘 활용하도록 하자.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자로 나타날 수 있도록 주님을 더욱 간절히 찾고 사모하도록 하자.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신령한 젖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그 가르침을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도록 하자(벧전 2:2).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도록 하자(마 7:24~27).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약 1:22). 주님께서는 그렇게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찾고 바라보는 이들을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평안히 이르도록 보호해주시며 그들의 믿음을 확증해주실 것이다(잠 8:17; 빌 1:6).
4. 교회와 은혜의 표지
은혜의 표지가 개인적인 측면에서 그와 같이 적용된다면, 공적인 측면에서 교회 전체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도 한 사람에게 은혜의 표지를 적용하는 일도 많은 주의와 관심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모여 한 몸을 이룬 교회는 얼마나 고려해야 할 것이 많겠는가?
교회에 은혜의 표지를 잘 적용하려면, 우선 민족적 배경과 정서, 회중의 교육 수준,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의 보편적인 영적 상태, 회중 전반의 신앙 성숙도와 훈련도 등등을 세심하게 헤아리면서 종합해야 한다. 만약 그 일의 규모와 복잡성에 대해 눈을 뜬다면, 은혜의 표지를 공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종이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취사선택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말씀이 가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며,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은혜의 표지를 공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목회자가 시행하는 성례와 권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강단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써 자기 직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진리를 온전하게 선포했다면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서, 성령님께서 각 사람의 심령에 역사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런 뒤에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역사해주셨는지 온유와 인내 속에서 각 사람의 심령을 살피면서 적절한 지도와 권면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기도와 목회 상담과 심방 역시도 강단 사역만큼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 모든 활동이 ‘될 수 있는 한’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여기서 ‘될 수 있는 한’라는 단서를 달아둔 것은,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체력적이고 정신적인 한계가 있기에 그 모든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너무도 당연하게 슈퍼맨처럼 여기는 잘못을 이제 그만 바로잡도록 하자. 성도는 목회자의 상황과 형편을 가능한 넉넉하게 헤아려주면서, 그의 부족한 점을 자원하여 돕고 메워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성도가 함께 세워가는 영적 기관이지, 목회자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사적 조직이 아니다.
비록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을 지라도 목회자가 주어진 은혜의 수단을 통해 목양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그들 가운데 부어주신다. 그러면 거듭나는 이가 꼭 나타나게 되는데, 그때 그가 받은 은혜를 확증하고 더해주는 공적인 방편이 바로 성례(세례와 성찬)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이가 나타나면, 목회자는 앞서 말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균형 있게 심사하게 된다. 그리고 별 문제가 없다면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목회자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그에게 임한 은혜가 진실하고 참됨을 공개적으로 확증해준다. 그렇게 세례는 그에게 주어진 은혜를 보증하고 확증하는 인(印, 도장)의 역할을 감당한다.
물론, 이러한 세례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험이 없다. 그러나 세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증하는 공적인 수단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붙드는 이에게는 더 없이 큰 평안과 감사를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한다. 이에 관해서 칼빈이 하는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는 전 생애가 단번에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쓰러질 때마다, 우리가 세례받은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함으로써 언제나 사죄에 대해 확신해야만 한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앞으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런 사실이 분명히 우리에게 뻔뻔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가르침은 단지 자신들의 죄에 눌려 지치고 신음하는 죄인들로 하여금 혼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4
이처럼 세례는 그냥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수많은 의식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세례는 한 사람의 부르심을 공적으로 확증해주는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귀중한 세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베풀어지고 있는가? 특히 군대에서 닭고기 한 조각으로 장병을 유혹하여 “믿습니다.” 하는 피상적 고백을 이끌어내고, 그런 이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 영혼을 얻었다고 흐뭇해하는 어이없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심지어 그 한 조각을 위해서 ‘기꺼이 다시’ 세례를 받는 이도 얼마나 많이 있던가?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르심을 확증해주시려고 친히 제정해주신 은혜의 방편이므로, 교회는 그 방편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세례는 평생에 단 한 번 시행하는 은혜의 방편인 반면 성찬은 그렇지 않다. 성찬은 세례받은 성도가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념하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갱신(更新)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찬을 받기 전에 과연 자신이 주님을 믿는 자답게 살고 있는지, 진정 그러한 은혜의 표지가 삶 속에서 객관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고전 11:23~29).
그런데 우리 양심이 개인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어떤 결격 사유를 고발해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어지는 빵과 잔을 받지 말아야 할까?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행동이 있다. 바로 즉시 주님께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한 다음에, 세례라는 인(印)을 통해 그 모든 수치 역시도 덮어주실 것을 이미 확증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아가서 그 빵과 잔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오늘 그 빵과 잔이 내게 주어지는 일이 거절되지 않은 것처럼, 주님께서도 이렇게 참으로 부족한 나를 내어쫓지 않으시고 여전히 은혜로 대하고 계심을 믿으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진지하게 자기를 살폈음에도 도무지 흠잡을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역시 나는 이 빵과 잔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어!’라고 하면서 흐뭇함 속에 그 빵과 잔을 받아 먹고 마셔야 할까? 만약 그렇게 빵과 잔을 받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차라리 안 받느니만 못했다는 점을 꼭 알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정으로 장성한 분량에 이른 이는 자기 구원의 근거를 표지 그 자체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고전 4:4). 만약 진정으로 흠잡을 만한 것이 자기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길로 인도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가운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겸손하게 그 빵과 잔을 받으면 된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도, 자기를 이방인처럼 여기면서 그저 넋 놓고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으면 안 된다. 오히려 그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열심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직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이 속히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리로 초대하고 계신다(계 3:20). 그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서, 더욱 주님을 찾고 또 찾는 자리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은혜의 표지를 공적인 측면에서 적용하는 일은 권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활발하면 할수록 그 불길을 차단하기 위한 마귀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교회에 크나큰 피해를 안겨주는 마귀의 자녀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그런 이가 나타나 진리의 사역을 훼방하기 시작하면, 목회자는 앞서 말한 기본적인 요소와 함께 그가 행한 악한 일의 공적인 성격과 범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권징을 행하게 된다.
이 권징의 의미는 성례와 정반대이다. 그 사람이 마귀의 자식이며 주님께 속해있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할 기회를 그에게 주면서, 주님의 소중한 양들이 그 늑대의 이빨에 상하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다. 권징을 받은 이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한, 그의 등 뒤에는 ‘지옥의 자식’이라는 영적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게 된다.
또한, 그 사람이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세상을 떠날 경우, 모든 성도가 그 사람이 심판 받아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드러난 늑대인 통일교에는 별다른 해를 받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 교주인 문선명이 지금쯤 지옥에서 자기 죗값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권징은 은혜의 표지를 공적인 측면에서 성도에게 적용할 때와 정반대의 의미로 마귀의 자녀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은혜 밖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증하는 것이다(고전 10:1~22). 우리는 은혜의 표지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공적인 속성도 잘 이해하면서 신앙 생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은혜는 같은 은혜를 받은 이들을 하나로 엮어 한 몸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5. 마무리하며
한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가, 은혜 밖에 있는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니 자기가 진정 은혜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확증하기 위해,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표지들을 잘 헤아려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런 표지를 통해 더욱 은혜를 찾고 구하는 계기로 삼거나, 더욱 자기를 낮추며 주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자.
더불어 그러한 은혜의 표지가 공적으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잘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 표지들을 통해 교회를 더욱 강건하고 거룩하게 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찾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눅 11:9~13).
각주
1 마이클 리브스, 『굿윈과 십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Goodwin, Sibbes and the Love of Christ)』, 서문강 옮김, 진리의깃발(한국어판 113호), p. 14.
2 위의 책, p. 14.
3 찰스 스펄전, 『스펄전의 회심 (Spurgeon’s Conversion)』, 정시용 옮김, 프리스브러리, 2013, pp. 55~62.
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4권 (하)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11, p.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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