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유흥문화 진단2」 향락문화와 성도의 신앙
양승훈
▲ 우상을 숭배하며 먹고 뛰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는 모세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다(요일 2:15, 바른 성경).」
향락문화가 영혼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향락문화의 검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향락주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과 문화와 가치관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많은 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정신과 더불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먹고 놀다 죽자’라는 향락주의의 핵심 교리를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듣습니다. 자극적인 음악과 게임은 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싫어하도록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광고를 통해, 다양한 레저 산업을 통해, 온갖 문화 활동을 통해 먹고 놀다 죽는 것에서 인생의 가치와 정체성을 찾으라고 속삭입니다.
이러한 향락 추구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비롯하여,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향락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다만 현대에는 그러한 활동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고상하게 재포장해서, 좀 더 거부감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눈속임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한 자기 합리화가 타락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에게는 공허한 자기 심령을 달래기 위한 물이 오직 향락의 썩은 우물물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향락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향락에 빠져 사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 죄악의 뿌리는 이 세상과 자기를 사랑하고 숭배하는 정욕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세상과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실로 큰 죄라는 것은 거듭난 성도라면 분명히 알고 느끼는 사실입니다. 그런 죄가 사람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즐거움이란 지극히 ‘순간적’일 뿐입니다.
여러분, 향락을 추구하며 살았던 지난날을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그 시간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결실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그 시간을 통해 실제적인 생명을 얻었습니까? 그 즐거움이 지금도 당신 곁에 계속 남아 있습니까? 지난밤에 나누었던 그 시끌벅적하고 천박한 대화를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영광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런 쓸모없는 것을 움켜쥐려고 달려갔던 손과 발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는 않습니까?
이처럼 향락을 사랑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달려간 모든 이들은 장차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영원한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일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욕이 원하는 대로 하여 얻는 즐거움은 결국 끝없이 깊고 허무한 공허뿐입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참되고 영원한 즐거움은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왜 그 즐거움을 앞에 두고서, 허무하고 공허한 헛된 즐거움을 얻으려고 수고해야 합니까? 그러한 즐거움이 과연 여러분이 눈을 감을 때도 온전한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그 즐거움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여러분을 변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우리 실존과 현실을 올바르게 깨닫고 인식한다면,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힘과 물질과 시간을 쏟아붓는 일을 지극히 혐오하며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향락은 사람의 마음을 결코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사람의 정욕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계속 “주세요, 주세요.” 하면서 보챌 뿐이며, 결코 “족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잠 30:15). 향락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욱더 강하고 자극적이며 파격적인 향락거리를 찾게 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수 때문에 언제나 흡족한 가운데 모든 일에 자족하는 법을 배워갑니다(요 4:14; 빌 4:11~13).
그러나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들이 즐기는 짭조름한 향락의 소금물 때문에 전보다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무리 물을 붓고 또 부어도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채워야 할 공간이 항상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정욕을 따르며 섬기지 마십시오. 그는 자기 배만 위할 줄 아는 악덕 지주와도 같습니다. 채찍을 휘두르며 종들을 끝없이 밭으로 내모는 것이 그의 주특기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여러분을 끝없이 학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거운 짐에 깔려 죽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저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말만 늘어놓을 것입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 결말은 심히 비참할 뿐입니다.
향락문화는 치명적인 중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죄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면서 발을 들여놓습니다. 처음 한두 번은 자기 영혼을 지키는 데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가슴에 불을 품고서 자기 옷을 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숯불 위를 걸으면서 어떻게 발을 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잠 6:27, 28)?
향락을 즐기는 일이 무서운 점은, 향락을 즐기기 시작하면 점점 다른 일을 돌아볼 여유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향락을 즐기는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해도 항상 마음은 향락이라는 콩밭에 가 있게 됩니다. 그러다 잠시 틈이 생기면, 곧장 향락이 기다리고 있는 콩밭으로 달려가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다 보면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귀한 의무에 사용할 시간이 사라집니다. 기도에 쏟아부어야 할 기력을 사치와 방탕을 즐기는 데 다 소진해버려서, 잠자리에 들기 무섭게 곯아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한 영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도살장으로 힘없이 끌려갑니다. 그에게는 방패를 들어 마귀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낼 힘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뻔히 바라보면서 속수무책으로 간이 꿰뚫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잠 7:22, 23).
너무도 많은 이가 그렇게 손쓸 방도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한부 환자가 내뱉는 때늦은 후회와도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잘할 걸’ 하는 후회와 탄식은 죽음이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향락의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끌어안고 있는 바로 그 작은 우상이 나중에 여러분을 짓누르고 옥죌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두렵지 않습니까? 잠깐 방심하다가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가 그토록 크다니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찾는 스마트폰을 통해, 여러분이 쉬는 시간에 무심코 즐기는 음악과 게임을 통해, 직장 동료와 나눈 경박한 대화를 통해, 퇴근 후 즐기는 텔레비전 연예 오락물을 통해서도, 여러분이 향락으로 가는 길이 아주 탄탄하게 닦여질 수 있습니다. 혹시 “이까짓 게 무슨 죄라고?”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 분은 수많은 이가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살다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덫에 걸린 영혼
사람이 향락에 빠지면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고 즐거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을 좋아하면 저것을 싫어하고 멀리해야만 합니다(마 6:24). 그러므로 이 세상 향락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면, 그만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향락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냉담하고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관심도 두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고 맙니다.
한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하나님의 진리는 마치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힘없이 연기만 뿜어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불신자처럼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아침에 결심한 것이 밤에는 다 무너집니다. 죄악의 자리로 나오라는 마귀의 손짓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나갑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오라는 말씀에 심령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껏 마귀가 쳐놓은 이 무서운 덫에 걸려 소중한 영혼이 수없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땅 위로 고개를 내밀던 파란 새싹이 향락이라는 돌에 막혀 뿌리를 뻗지 못하고 누렇게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나무에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쓸모없는 나무를 뽑아 불에 살라버리십니다.
그러므로 향락에 깊이 빠진 여러분이 계속 교회를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없는 인자와 긍휼 가운데 여러분이 그 덫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일을 계속 뒤로 미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시각을 회복시켜주시길 구하십시오
이러한 영혼이 사망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살아나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너를 향해 참고 너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사 48:9, 바른 성경).」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영적인 감각이 둔해질 때 향락에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향락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시각(視角)을 회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아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천만한지를 다시 헤아려봐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 2:4, 5, 바른 성경).」
당신이 사랑하는 향락이라는 우상의 영광과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 비교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일, 그분께서 타락한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화염을 가르시는 여호와의 음성과 위엄, 그분의 공의와 진노를 떠올려 보십시오. 천국과 지옥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이 세상 모든 이들보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겸손과 자기부인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 지혜보다 월등히 탁월한 그분의 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그렇게 돌아가셔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으신 것입니까?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멸시하고 비웃으면서 향락을 더 사랑한 우리가 아닙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거센 진노가 우리 머리 위로 폭풍처럼 휘몰아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의 잔을 죄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을 따라 그 쓰디쓴 잔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화목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계속 중보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한낱 향락에 눈이 멀어 그리스도와 원수 되려고 하십니까?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하게 욕을 뵈려고 하시는 것입니까(히 6:6)? 그런 어리석음에 치우치지 마십시오. 어서 뻣뻣해진 고개에서 힘을 빼십시오. 마음의 눈을 열어 무한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엾게 여겨 어두워진 여러분의 심령을 밝게 해주시면, 여러분은 세상 향락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가치한지를 깨닫고 미련없이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죄악을 회개하십시오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죄는 절대로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빌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벌써 그 격렬한 진노의 불에 살라져 한 줌의 재와 같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위험천만한 자리에 언제까지 앉아 있을 것입니까? 혹시 지금껏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겠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십시오. 심판의 모래시계에서 모래알이 계속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한 알이 떨어질 때를 기하여 죄인을 심판하려고 일사불란하게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긋지긋한 허무와 공허가 여러분을 영원히 삼키려고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계속 태연자약하게 그 자리에 누워 있는 것입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일어나 그 자리를 피하십시오. 겁도 없이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를 악용한 일을 깊이 회개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로 남아있는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영적인 시각이 회복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또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죄를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솥 안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 신세를 절대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어찌 네가 죽고자 하느냐? 일어나 이 성읍을 심판하는 중에 멸망하지 않도록 하라. 나 외에는 구원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아직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있는 지금 빨리 예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당신을 환대해주실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의 저 말씀이 너무도 멀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자와 긍휼을 거두셨고 방주의 문은 굳게 닫혔으며, 깨져버린 그릇과 같은 나에게 기회가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판단과 내적인 느낌을 우선하는 죄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내적 상태 속에서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주님의 종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자가 누구냐? 어둠 가운데 걸으며 빛이 없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고 자기의 하나님께 의지하여라(사 50:10, 바른 성경).」
위의 말씀에 여러분의 잘못된 판단과 느낌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대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다하였다고 멋대로 판단하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의 눈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심각한 상태만 계속 살피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지금보다 몇백 배는 상황이 악화된다고 해도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길가의 가로등을 올려다보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절망의 탄식을 내뱉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십시오. “나에게는 이제 소망이 없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절망에 찌든 여러분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결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하시므로(요 8:12, 바른 성경),」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불신앙이자, 정말로 영원한 흑암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임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려고 인자와 긍휼을 완전히 거두어 가는 것처럼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기가 찾아오면 사람은 대번에 불신앙으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한심함과 무능력함을 뼈저리게 맛보는 일은 오히려 은혜의 정수를 맛보는 준비과정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귀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과 완악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그제야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깊이 좌절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더욱 자원하여 찾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남아있는 죄악과 허물을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은혜를 찾고 구하게 하는 통로이자 회초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그토록 고집한 영원한 어둠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성도의 신분은 빛의 자녀입니다. 이 명예로운 신분을 절대로 망각하지 마십시오. 그 존귀함에 어울리지 않는 육체의 저급한 일을 따르지 마십시오.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런 일을 미워하며 멀리하십시오. 낮에 행하는 것처럼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롬 13:12, 13). 우리 영혼을 참으로 흡족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밖에 없습니다.
세상 쾌락과 향락에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에 힘을 쏟으십시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의 중심을 예수님께만 두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머무르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서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나태와 무관심 속에서 굶주리지 않게 하십시오. 너무 허기져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피기도 전에 무조건 입으로 가져가고 보는 상황을 만들지 마십시오. 늘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겸손함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오직 그분께만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하면 죄악을 탐스럽게 바라봤던 여러분의 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음란하고 상스러운 말을 내뱉던 여러분의 입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입이 될 것입니다. 저급하고 방탕한 음악 소리를 좇던 여러분의 귀는 주님의 말씀만 듣기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연합하기를 전심으로 소망하며, 그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과 헌신은 하나님께서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계 14:12, 13).
위선자에게 주는 경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은 교회 전체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교인은 교회 전체를 음란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와 찬양조차 음란함으로 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잠 28:9).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련 없이 모두 내어버리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믿음은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힘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약 2:14~17).
여러분, 죽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만왕의 왕이시자 재판장이신 주님께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는 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왜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더 사랑하는 위선자를 영원한 지옥으로 몰아갈 줄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곳에는 외식(外飾)하는 여러분을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셨던 주님의 긍휼과 인내가 조금도 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울고 불며 땅을 치고 후회해도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고 계실 때 빨리 돌이키십시오.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되고 말 이들이 교회 안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며 진리를 배웠음에도 자기 욕심을 따라 결국 지옥에 영원한 자기 거처를 마련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비추어주신 밝은 진리의 태양 빛이 아깝지 않게 하십시오. 그 밝은 햇살 아래서 음란하게 뛰놀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른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름다운 겸손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여러분이 그 옆에서 저지른 추악한 일들이 여러분을 맹렬하게 고발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다 주인이 돌아올 때 술 취해 잠들어 있었던 종처럼 되지 마십시오(눅 12:45, 46).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돌이키기를 바라며 계속 뒤로 미뤄주셨던 하나님의 진노를 마지막 날에 집행하러 오실 것입니다(눅 13:7). 그때, 수많은 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라고 하신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은 이들을 전부 우상숭배자로 고발할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잠깐의 쾌락과 영원한 생명을 맞바꾸는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마십시오. 가장 아름다운 보화를 썩은 들 포도로 바꾼 청지기는 모두 쫓겨나 바깥에서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어서 돌이켜 회개하십시오. 더 늦기 전에 복음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사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움에 있게 하며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속히 오겠다. 내가 줄 상이 나에게 있으니,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계 22:11, 12, 바른 성경).」
글을 맺으며
하나님께서는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딤전 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중하게 여기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형편을 둘러보십시오. 또, 여러분 자신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환락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불신앙자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많은 이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멸망의 도성인 이 세상이 추구하는 즐거움을 그대로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술에 취해 이 세상에 바치는 찬양을 그대로 따라 부릅니다. 사치와 방탕과 관능으로 가득한 잔치 자리에서 즐거워하며 신나게 춤을 추며 놉니다.
그렇게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 세상 사람이 즐기는 허망한 농담과 천박한 웃음을 함께 즐기면서 세상 정신과 문화와 친하게 지낼 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을 비웃습니다. 유행에 뒤처지기 싫어하면서 세상을 향한 강한 애착을 드러낼 때, 지옥의 자식들은 속으로 저들이나 우리나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교회와 진리를 비웃고 대적할 것이며, 더욱 담대하게 죄를 탐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복음의 불길은 힘없이 사그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분명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질 것입니다(딤후 3:1~5). 세상은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교회를 압박하며 물어뜯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마귀는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지만, 마귀가 이끄는 지옥의 세력은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하고 돌이켜 거룩함을 위해 분투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다시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이들처럼 향락이라는 술에 취해 잠들지 말고 깨어 일어납시다(살전 5:6).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면, 세상도 교회를 다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꺼져가던 기도와 복음의 불길은 다시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바른 성경).」
「유흥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유흥문화 진단2」 향락문화와 성도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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