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21) 성도의 교제
김재호
▲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한 일을 말해주는
신중(Discrestion), 분별(Prudence), 경건(Piety), 자애(Charity)의 모습
「식탁 위에는 ‘기름진 것들(살찐 고기들)과 오래 저장했던 맑은 포도주’(사 25:6) 등이 잘 차려져 있었고, 식사 도중에 그들의 대화는 주로 이 산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그가 쌓아놓은 여러가지 공적, 이러한 일들을 어떤 목적으로 행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또 무슨 이유로 이 집을 짓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산의 주인은 위대한 무사였으며,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와 싸워서 그를 살해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큰 위험에 빠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크리스천은 그분을 한층 더 사모하게 되었다(히 2:14, 15) …(중략)…
그들은 해 뜨는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이 층의 커다란 방으로 순례자를 인도해 주었는데 그 침실의 이름은 평화(Peace)였다. 그곳에서 동이 틀 때까지 숙면을 취한 크리스천은 잠에서 깨어나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순례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마련하신 장소인가?
이렇게 예비해 주시고 이렇게 죄를 사하여 주시다니!
벌써부터 하늘나라 이웃에서 머물고 있도다.”」1
경건했던 옛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를 방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지역 사회와 함께 한다며 열리는 바자회, 신자의 교양을 위한다며 열리는 인문·심리학 강좌, 커피를 팔며 장사하는 모습 등,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세속적인 오락과 유흥을 즐기면서 성도의 교제라고 말하는 행태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사교장이 아닌 교회에 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여러 번 이곳이 정말로 교회인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펼쳐 보이며 사람들을 엄하게 책망할 것이다.
「아론이 그것들을 그들의 손에서 받아 녹이고 조각 연장으로 다듬어 송아지 형상으로 만드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다.”라고 하였다. 아론이 이것을 보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고 공포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이다.”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리며, 백성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놀았다(출 32:4~6).
만일 네가 안식일에 네 발을 삼가서 나의 거룩한 날에 너의 즐거워하는 것들을 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하고, 여호와의 거룩하신 날을 존귀한 날이라 하며, 그 날을 존귀하게 여겨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너의 즐거워하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때 너는 나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며, 나는 너를 땅의 높은 곳으로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유업으로 너를 먹일 것이다. 나 여호와의 입이 말하였다(사 58:13, 14).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시기를 “울고 통곡하며 머리를 밀고 굵은 베옷을 입어라.” 하셨으나, 보아라, 너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소를 잡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이 죄는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사 22:12~14).」
성도의 교제는 근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 우리의 무가치함,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등을 놓고 즐겁게 대화하며 토론하는 부분이 없으면 안 된다. 연예, 오락과 스포츠를 주제 삼아 상대방의 안목과 취향에 감탄하고 공감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성도의 교제가 아니다.
나아가,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진리를 각자에게 어떻게 맛보게 하셨는지를 나누면서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사모하는 자리이다. 서로 교제하면서 한 주간 계속 실패하여 비틀거리던 영혼은 힘과 용기를 얻게 하고, 충성한 종에게는 장차 받을 영광의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도움을 줘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리에 함께하셔서 성도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니, 이는 너희가 우리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쓰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일 1:3, 4).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살게 하여라.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여라. 또 너희는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려라(골 3:16, 17).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가 소망의 신앙고백을 흔들림 없이 붙잡자. 또한 사랑과 선한 일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서로를 보살피자. 어떤 이들의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히려 열심히 모이도록 서로 권하며 그 날이 가까워짐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자(히 10:23~25).」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성도와 교제하기를 참으로 원하며 즐거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가나안 성도)이나,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수도사들은 절대로 성도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아비 마귀를 따르는 사생자(私生子)일 뿐이다. 그런 이들을 성도라고 하는 일은, 우리를 불러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이야기와 활동으로 친목을 도모하며 감성적 만족을 얻으려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교회를 더럽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불호령을 듣게 될 자들이다(마 21:31). 참 성도는 이런 이들과 교제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을 멀리하며 그들이 짓는 죄에 참여하지 않게 주의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지키시기 때문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p. 77,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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