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유흥문화 진단3」 그리스도인의 시간 사용
김재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시간 여유가 생길 때 마음이 괜히 풀어지고 느슨해지는 일을 아주 피할 수 있지는 않다. 다윗은 한가로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순간적으로 일어난 목욕하는 어떤 여인을 탐하는 마음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고 말았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악으로 달려가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지를 놓고 고심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머릿속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흥을 즐길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마귀의 유혹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시간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가르친다(고전 10:31). 주어진 시간을 흥청망청 사용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는 행동은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기와 같다.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눅 16:10).
1. 경건을 위해 사용할 시간을 따로 마련하기
현대인의 삶은 매우 번잡하고 분주하다. 그래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도대체 오늘 뭘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넘어가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 앞에 가야 할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최고의 거짓말은 ‘나중에 은퇴하고 여유가 좀 생기면, 그때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라는 종류의 말이다. 사람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사람은 평생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각 연령대에는 그때가 아니면 체험하기 어려운 유익한 신앙 경험이 아주 많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가야 비로소 ‘나의 달려갈 길’ 전체를 가늠하고, 자신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행 20:24; 시 90:12).
훗날 주님께서 “너는 내가 맡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내일을 바라보면서 잘 간직해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어리석은 이가 없기를 바란다(마 25:18~30).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더욱 영화롭고 빛나게 하는 일에 주어진 시간을 ‘곧바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태도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치열하게 보내지 않으면, 어느새 분주한 현대의 삶에 떠밀려가서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경건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특히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날 처리해야 하는 많은 일과 씨름해야 하므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정 분량의 시간을 따로 마련해놓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러한 시간을 마련하려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전날의 피로, 모자란 잠, 이리저리 기회를 살피는 게으름 등과 싸워 이겨야 한다. 많은 이가 이런 어려움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어려운 일과 싸우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으로 뒤집히기 일보 직전의 배에서조차 곤히 잠들어 계실 정도의 강행군을 이어가셨다(막 4:36~39). 그러나 그런 피로를 무릅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한적한 새벽 시간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곤 하셨다(막 1:35~39). 아무리 우리 삶이 힘겹고 피곤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공생애와 비교할 만큼 바쁘고 분주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내셨다. 그러므로 경건의 시간을 마련하는 일에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어렵고 힘들어도 자꾸 시도해보라. 저녁에 쓸데없는 일 하느라 잠자리에 늦게 들지 말고 빨리 잠들라. 이런 요구가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1장, 특히 후반부를 다시 한번 잘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과 충분히 교제하며 새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런 일이 없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좁은 길을 걸어가겠다고 큰소리치지 말라. 우리 주님께서도 성부 하나님과 교제하시면서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다.
2. 성경 읽기와 기도와 가정예배, 매일 힘써야 하는 신앙 의무
경건을 위해 사용할 시간을 충분하게 마련했다면 마땅히 그 시간을 잘 사용하려고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동안 먹을 만큼의 만나를 항아리에 충분히 담았던 것처럼, 그날 하루 동안 영혼이 먹고 마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생각이라는 항아리에 충분하게 담아야 한다. 본문 말씀을 그냥 죽죽 읽어 내려가지 말고 본문의 핵심은 무엇인지, 평소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지, 성경의 다른 부분은 이에 관해 무어라고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천천히 읽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건한 신앙 선배가 즐겨 사용한 주석을 참고하고 활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성경 본문을 잘 상고했다면, 이제는 본문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정리하고 암기해야 한다. 이는 본문의 핵심 내용을 암기하지 않고서 읽은 말씀을 실제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의 중간중간, 예를 들면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 같은 때에 흐트러지는 생각과 정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핵심 내용을 꼭 간단하게 암기해두어야 한다. 이런 성경 읽기 습관이 몇 년간 꾸준히 이어지면, 어느새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이 우리 마음과 삶 전반에 뿌리내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 읽기를 마쳤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 그 내용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경건의 시간에 누가복음 12장을 꼼꼼히 잘 읽고 묵상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함’이라는 핵심 교훈이 새겨질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던 자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 뒤에,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충분하심이 내 영혼 가운데 새롭게 되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신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서, 거짓과 오류의 그림자 가운데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이 빨리 주님께로 돌아와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한 다음에는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건져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가 긴밀하게 연결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말씀의 인도함이 없는 기도는 메마르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를 마친 다음에는 꼭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그렇게 하루를 잘 시작했다면, 이제는 일상적인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일을 할 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골 3:22~25). 그러므로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직업을 내게 맡기셨다는 생각과 태도로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옛 청교도 건축공이 하나님께서 결산하실 날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해 벽돌을 쌓았던 것처럼 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경건은 산속에서의 경건이 아니라, 세상살이 한복판에서의 경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와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공급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루를 잘 보내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는 순간 발생하기 시작한다. 타락한 우리 본성과 육체가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일을 감당한 보상으로서, 유흥이라는 쉼터에서 잠시만 쉬어가자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이때 잠깐만 쉬어가려고 허리끈을 풀어놓다가 큰 낭패와 부끄러움을 당하곤 한다.
물론, 사람은 적당히 쉬어야 한다. 그러나 유흥을 즐기는 일은 근본적으로 쉰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체력을 더 사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흥에 쏟아부을 수 있는 체력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 체력을 흐트러진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는 데 사용해야 한다. 정말로 기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가 찾아오면, 유흥을 즐기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하루의 피로가 기분 좋게 몰려오면서 가벼운 오락거리를 향한 갈망이 고개를 들면, 그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체력이 아직 남아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정신을 다시 차려야 한다. 괜한 핑곗거리를 찾아 헤매지 말고, 아침에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씀을 꺼내어 심령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유흥을 향한 옛사람의 소욕은 사라져버리고, 남은 시간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내려는 마음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잘 추스르고 집에 도착했다면,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정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물론, 이 예배를 꼭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드릴 필요는 없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어느 정도 소화가 된 시점이 바람직하다. 가정 예배는 남성 연장자가 주관하는 것이 성경적이므로, 가능한 아이의 아버지가 주관해야 한다.
따라서 예배 주관자인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에 다시 본문을 상고하면서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다음, 본문의 가르침과 어울리는 찬송을 고르면서 예배 준비를 마무리해야 한다. 대표 기도는 가족 구성원이 돌아가면서 하는 편이 좋으며, 마무리 기도는 예배 주관자가 하거나 주기도문으로 하는 것이 좋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아이에게 간략하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게 가정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아마도 밤(8~9시경)이 되어 있을 것이다. 꼭 필요한 신앙 의무를 다했을 뿐인데도, 하루 중 사용 가능한 시간 대부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의무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유흥을 추구하고 즐길 만한 여유 시간 자체가 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 여유는 기본적인 신앙 의무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고 타협하며 뒤로 미루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것들을 좋아하며 따라다니는 이들은 기본적인 신앙 의무를 등한히 하는 사람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또한, 그들 대부분이 게으른 종이 받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3. 개인 시간 내기
생리학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적당한 시간은 밤 10시~12시 사이이다. 그러므로 별일이 없다면 가정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간단한 맨손 체조와 스트레칭으로 하루 동안 긴장하고 움츠러든 근육을 풀어주고 세수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옛날 사람들이 살아가던 시대처럼 단순·소박하지가 않다. 세계화의 바람이 일면서 무한경쟁 사회의 막이 올랐다. 이제는 내 지역에서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정된 삶의 기반을 갖기 어렵다. 전 세계와 경쟁하면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 외에, 그것과 인접해 있는 분야까지도 ‘어느 정도’는 익혀두어야 한다. 그래야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급격한 환경 변화나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는 가정 예배를 드리고 곧장 잠자리에 들기보다, 11시 30분이나 12시 정도까지 개인 시간을 따로 내어 공부하는 편이 좋다. 이때 자신의 전공 분야를 더 깊이 탐구해도 좋고, 그것과 인접해 있는 분야를 폭넓게 탐구해나가도 좋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 시간을 신학을 연마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리 뛰어나고 좋은 학문이 있다고 해도, 충분한 신학적 비평 작업이 없이는 그 학문을 올바르게(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부족한 본인의 예를 하나만 들어본다면, 본인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ロ-マ人の物語)』 시리즈를 참 유익하게 읽었다. 전체 15권 중에서 13권까지 읽었고, 특히 한니발 전쟁을 그린 2권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그린 4, 5권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이 책은 증거주의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 소설에 더 가깝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정치 철학을 토대로 전체 줄거리를 구성하고 전개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해당 정치 철학에서 말미암는 잘못된 역사적 평가와 이야기 구성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실용주의적이었던 로마인의 사고방식과 생활상이 어떠했는지를 ‘어느 정도’ 개연성 있고 일리 있게 그려낸다.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이 어떻게 꽃을 피워갔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기본적인 신학 기초가 없이 이 책을 깊이 읽으면 철저한 실리 추구를 방해하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반감을 품기 딱 좋다. 그런 이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로마는 기독교의 방해만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 존속했을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신학 기초와 신앙이 있는 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그 어떤 세상의 위대함과 탁월함도 결국은 다 사람의 타락에서 비롯하는 부조리와 역기능으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런 일은 비단 『로마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다 몇 번씩은 읽었을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도 똑같이 살펴볼 수 있다. 난세의 간웅(奸雄)도, 큰 대의명분을 앞세운 영웅(英雄)도, 몇 대에 걸쳐 넓은 지역을 자기 연고지로 삼았던 실력자도, 그토록 위대했던 자신의 이상과 꿈이 내부의 부조리와 역기능에 휘둘려 비틀거리다가 결국 주저앉아버릴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안목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책들이 하나같이 성경, 특히 전도서의 가르침을 스스로 확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그토록 강대했던 로마가 하루아침에 스러져 없어진 것은 이런저런 조치를 제때 취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 어떤 세상 나라도 타락한 인간에게 존재하는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한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모래밭에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는 일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허망함을 살펴보면서, 왜 새 하늘과 새 땅에만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를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의 그 장대함과 위대함은 오히려 이 세상의 허망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상 최대의 역설(逆說)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강대함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본인의 신학적 안목도 참으로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다. 그러나 그 정도 안목을 갖는 일도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탐구하고 정리하며 시험하고 확증하는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자리 잡았다. 그리스도인은 신학적 안목을 키우기 위해 힘써 공부해야 한다. 연구에 사용할 개인 시간을 마련해두고 1년이면 1년, 한 달이면 한 달 동안 달성할 연구 목표를 세워야 한다. 조직 신학, 성경 신학, 성경 배경사, 교회사, 교리사 등등의 내용을 자신의 수준과 형편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꾸준히 학습해가야 한다.
마음만 앞서서 벌코프의 『조직 신학 (Systematic Theology)』이나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에 무작정 덤벼들지 말고, 우선은 개론·입문서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연구를 진행해가도록 하자. 시중에 너무 많은 책이 나와 있어서 어떤 책이 좋을지 선택하기 어렵다면, 담임 목회자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자.
이런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두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읽고 또 읽으면, 자연스럽게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책에 도전하다가 책과 아예 담을 쌓게 되는 일을 피하도록 하자. 꾸준하게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책 2, 3권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그렇게 연구하는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면, 최소한 근본 교리와 어긋나지 않는 기초적인 신학적 사고와 비평과 대화가 가능해지게 될 것이다.
4. 마무리하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헛되게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일에만 충실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유흥에 사용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의 시간 사용을 놓고 결산하실 것이다. 그때 모두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수고하였다. 충성스러운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유흥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유흥문화 진단3」 그리스도인의 시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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