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홈 스쿨
(4) 교리문답 교육, 홈 스쿨 교육의 튼튼한 뼈대
김선희
홈 스쿨의 당위성을 발견하고 학교와 관계를 정리하고 난 뒤, 어떠한 방향으로 홈 스쿨을 운영할지 목표를 세우고 나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점점 명확해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에 맞는 세부 계획을 세우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시도해본 바에 의하면, 홈 스쿨 초기에는 다른 것보다 우선 교리를 확실하게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가정은 조엘 비키의 『언약 자손으로 양육하라』라는 얇은 소책자를 접하기 전까지 홈 스쿨에서 교리문답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까맣게 모르고 이리저리 헤맸었다. 그동안 보았던 신앙 교육서와는 상당히 달랐던 그 책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어린 자녀라면 30분 정도, 십 대 자녀라면 4~50분 정도 교리문답을 반복하여 가르치라고 적고 있었다. 그것이 자녀가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므로, 부모가 먼저 건전한 교리문답서를 잘 배우고 숙지하여 그 내용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글을 읽고 의아했던 부분은 ‘성경이 있는데 왜 따로 교리를 배워야 하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을 교회에 다녔음에도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는 단어조차 그 책에서 처음 보았다. 그러니 부모부터 교리문답을 숙지하고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하는데 무엇이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을 통해 청교도의 신앙교육 방식과 훌륭한 신학자의 이름을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자녀를 교육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실망스러웠다.
안타깝지만 우리 가정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 교회의 성도 중에 건전한 교리문답서의 존재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고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이 현실이다. 훌륭한 교리문답서가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어서 현실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서 등등의 훌륭한 교리문답서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렇게 손쉽고 가까운 곳에 훌륭한 교리교육서가 많이 있음에도, 그 존재조차 거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들의 중요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교회의 상황이 그러하니 많은 기독 홈 스쿨 가정이 가장 귀중한 보물을 바로 옆에 두고서, 엉뚱한 것을 찾고 배우고 가르치는 데 주어진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리는 안타까운 지경에 놓이게 되고 마는 것이다. 무언가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말이다.
교리를 잘 알지 못하면 믿음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정말 막연하게 알게 된다. 그러니 온갖 것들이 하나님인 체하고 있어도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어, 그것을 하나님인 줄 알고 열심히 섬기게 된다.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정말 웃지 못한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 가정도 그런 기막힌 상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거창한 목표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성경적으로 양육하고자 하는 부푼 마음으로 힘차게 출발한 우리 가정의 첫 번째 홈 스쿨 교육 과제는 바로 운동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우리 가정도 홈 스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건강한 몸부터 만들어보자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은 무려 ‘요가’를 통해 온 가족이 체력을 단련하기로 하고 말았다.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깜짝 놀랄 분이 여럿 있으실 것이다. 속으로 ‘어라, 기독 홈 스쿨을 한다고 하면서 요가를 한다고? 이건 정말 아닌데~.’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 가정이 처해있었던 영적인 상황과 환경을 알게 되면, 그런 일이 우리 가정에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홈 스쿨을 시작할 당시, 우리 가정이 다녔던 교회는 기장 교단에 속한 원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교회였다. 엄청난 빚을 내어 크게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기도 한 그 교회의 모습을 대략 이러했다.
1. 사회 복음을 전하는 종북좌파 교회
2. 알파코스 운영
3. WCC를 앞장서서 지지하는 교회
4. 레버린스 기도길(미로 같은 길을 걸으면서 기도하는 일종의 관상 기도로서 단일론과 관련이 많음)
5. 목사님이 북한 방문을 하고, 북한 돕기 운동에 앞장서는 교회
6. 불교와 함께 산사음악회 개최
7. 방언 기도하는 교회
8. 문화 센터, 북 카페 운영
9. 좌파 시민운동가를 매년 선정하여 시상식을 개최하는 교회
10. 주일 설교 시간에 연극을 하고, 대화 설교라는 이름으로 좌담회를 벌이는 교회
11. 쉐마 기독학교라는 대안 학교를 통하여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한다고 선전하는 교회
이처럼 그 당시 다녔던 교회는 정통 교리를 등한시한 결과 사이비 이단적인 요소가 무척이나 많았고, 그러다 보니 무조건적인 열심이 곧 신앙의 척도가 되었다. 그러니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믿는 도리란 무엇인지 배워 알기는 심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우리 가정은 영적인 어둠 속에서 그저 허우적거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함께 다니며 신앙의 선배 역할을 했던 친언니가 바로 그 문제의 ‘요가’를 우리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권해주었다. 요가를 한창 배우고 있었던 언니는 요가가 정말 좋은 운동이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요가를 해도 될까?’라는 의구심이 들어서 “언니, 교회 다니면서 요가 해도 괜찮은 거야? 요가는 인도에서 온 거라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하자, 언니는 “운동으로 하는 것인데 종교가 무슨 상관이 있어? 단지 스트레칭하는 것이니 괜찮아. 만약 요가가 문제가 있었다면 교회 문화 센터에서 왜 요가를 가르치겠니?”라고 답했다. 당시 나는 언니의 신앙을 본받으려고 힘쓰고 있었던 터라 그 말을 듣고 ‘괜한 걱정을 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뒤 비교적 저렴한 학원에 등록하여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배웠던 만트라 요가는 명상 요가로서 한 달 정도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학원에 다니며 배웠다. 요가 운동이 끝난 뒤의 편안함과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에 만족함을 느껴서 계속 다니고 싶었지만, 회원들의 반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고요한 가운데서 하는 운동임에도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 보니, 소곤소곤 거리고 키득대며 웃고 힘들다고 하면서 짜증 내고 맨 앞자리에서 누워 잠드는 일이 회를 거듭할수록 잦아졌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되고 명상을 할 수 없다는 수강생들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은 따가운 눈총 속에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가정은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학원을 나갈 수 없게 되었기에 요가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학원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속으로 ‘집에서 하면 되지. 학원이라고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하고서, 남편을 제외한 온 가족이 요가 동영상을 틀어놓고 집에서 계속 열심히 요가를 했다.
그렇게 요가를 향해 활활 타오르던 열정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나브로 식어갔고, 그에 비례하여 요가는 점점 우리 가정과 상관없는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가정의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요가 체험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우리 가정에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셨다. 그때 얻은 좋은 교훈이 바로 아이의 교육을 담당하는 부모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와 실행할 때는 항상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궤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요가(yoga)’라는 단어의 어원은 ‘yuj’이며, 이는 영어 단어 ‘yoke’의 어원과 같다. 그리고 ‘yoke’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짐을 끌도록 마소에게 씌우는) 멍에
2. (비유적인 뜻의) 멍에, 굴레
3. (짐을 나르기 위해 어깨에 메는) 짐판
즉, 요가라는 단어에는 ‘멍에를 지우다, 멍에와 결합하다, 멍에와 연결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가를 하는 이들은 말에 멍에를 씌워 마차를 자기 뜻대로 움직여나가는 것처럼, 정신(말)을 육체(마차)에 연결(멍에)하여 모든 심신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것을 어떻게 단순한 스트레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요가는 결국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신인합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또한 죄의 멍에를 의지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자기 기만적인 사탄의 술수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활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쿠르트 코흐의 『사탄의 전술전략』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요가의 영적 분위기는
* 인간의 보다 높은 자아는 초월적이면서도 고유 존재성을 띠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출생도 없고 사망도 없다.
*요가는 물질적 우주와 형이상학적 우주의 합일을 뜻한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 마음이 지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마법술과 신비교, 신비술의 배후에는 요가 체계가 버티고 있다.1
이 네 문장은 요가와 성경이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방 종교의 여러 사상 체계와 기독교 신앙은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같은 책의 다음 단락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첫 단계는 몸과 마음의 합일을 도모하려는 신체요법적 특성을 띠고 있다. 아무런 해악을 입지 않으면서 이 첫 번째 요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완운동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이것만이라도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카운슬링 경험이 알려주는 바는 다르다. 요가 수련생들이 극구 찬양하는 이완의 기법과 이들 ‘텅 비우는 수련’은 또 다른 영의 유입을 초래한다. 다시 말해서 악령이 틈타 들어오는데 요가 수련생들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친다.2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보호해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냥 그대로 계속 살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처럼 부모가 제대로 된 교리 학습 없이 이것저것 아이를 가르치려고 하면, 마귀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부모와 아이 모두가 교리를 제대로 배워 영혼 안에 튼튼한 교리적 뼈대를 갖추기 전까지는 다른 교육은 가능한 삼가는 편이 좋다.
실제로 홈 스쿨을 시작하려고 하면 참으로 막막하다. 다들 좋은 마음만 갖고 있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홈 스쿨을 하려는 가정 대부분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곤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적 자녀양육]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자료를 무턱대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잘 알려진 곳에 올라오는 자료일수록 세속주의와 심리학에 깊게 물들어 있는 일이 매우 많다.
물론 우리 가정도 처음에는 이러한 부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교리를 배우고 칼빈주의 신앙을 알아가고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되면서, 서서히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눈을 뜨고 보니 그렇게 의지하였던 곳에 아버지 세미나, 자녀양육 세미나, 리더십 교육, 인문학 프로그램, 예배 음악, 부모 코칭 등의 하나님 말씀과 어울릴 수 없는 교육방식이 넘쳐나고 있었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겠다고 공교육으로부터 돌아선 것을 실로 무색하게 하는 온갖 것들이 간판만 바꿔 달고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많은 홈 스쿨 가정이 [한국 기독교 *** 협회]에 많이 의존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선뜻 권하기 어려운 단체임을 밝혀두고 싶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향해 “너무 교만하다, 홈 스쿨 몇 년이나 했다고 그렇게 단정하여 한국 기독교 *** 협회를 비난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 *** 협회 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 않은가?”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직접 깊이 있게 교리를 공부하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한국 기독교 *** 협회를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하고 싶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은 ‘쉐* 교육 연구원’의 현** 박사가 말하는 쉐마 교육법에 심취한 기독 홈 스쿨 가정도 많다는 것이다. 기독교 가정도 노벨상 30%를 휩쓸고 신앙의 대를 이어가는 유대인의 교육방식을 따라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인 쉐마 교육법은, 특히 강남과 분당의 대형 교회들이 앞장서 쉐* 교육 연구원을 지지하면서부터 크게 알려졌다.
그러나 노벨상 30%를 휩쓸고 신앙의 대를 이어간다는 유대인은 아직도 그들의 주님을 거부하며 모욕하고 있다. 우리가 공교육을 마다하고 굳이 홈 스쿨로 아이를 양육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기 위함이었던가? 유대인처럼 말씀을 줄줄 외우면서도 정작 주님은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던가? 아니다. 정반대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홈 스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올바른 교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자녀에게 정확하고도 꾸준하게 가르칠 때 가능한 것이지, 이런저런 양육방식을 도입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내려면 교리문답을 깊이 있게 배우고 꾸준히 가르쳐야 한다. 이는 신앙 교육에 있어 튼튼한 뼈대와도 같다. 뼈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겠는가? 또, 뼈 없는 사람이 일어나서 앉거나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교리문답이 아이의 영혼에 튼튼한 뼈대로 자리 잡지 못한다면, 그 아이의 신앙 교육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영혼에는 밀려드는 세상의 유혹과 속임수를 분별하고 올바르게 대처하게 하는 튼튼한 지지대가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는 먼저 교리를 힘써 배우고 과연 그러한가 하여 다시 성경을 상고한 다음에,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명감 가운데 배우고 깨우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이의 마음속에 풍성하게 심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고귀한 역할을 우리 부모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비록 우리 가정은 먼 길을 돌아 최근에야 겨우 올바른 길에 들어섰지만, 다른 가정은 처음부터 올바른 길로 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참된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과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와 교육기관이 많이 설립되어서,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마음만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 올바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각주
1 쿠르트 코흐, 『사탄의 전술전략 (Occult ABC)』, 이중환 옮김, 예루살렘, 2007, p. 57.
2 위의 책,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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