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1)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후시네츠)
설형철
‘종교개혁자’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아마도 루터나 칼빈, 또는 츠빙글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도, 많은 이가 로마 카톨릭의 어두움으로부터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습니다. 만일, 그런 이가 없었다면(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종교개혁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이 탐방기도 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이 저보다 먼저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정보를 모은 다음, 유럽으로 건너가서 곳곳에 숨어있는 종교개혁의 흔적들을 실제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을 인터넷을 통해 공유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유럽에 있는 기독교 유적들을 여러 차례 살펴보고, 누구라도 혼자서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전문적인 서적을 출간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좀 더 수월하게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허락하고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데 큰 기반을 마련했던 이들(전 종교개혁자라고도 불립니다)은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가 대표적입니다. 그 중, 얀 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체코의 옛 이름)의 후시네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인 ‘후스’는 바로 그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얀 후스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이들에게는 늘 경건한 어머니가 있었듯이(어거스틴, 웨슬리 등), 그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비록, 그는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머리가 워낙 명석하여서 훗날에는 프라하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게 되었습니다. 얀 후스는 하루라도 빨리 사제가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 좀 더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각과는 다른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가 계획했던 체코 여행일정에는 얀 후스가 태어난 곳인 ‘후시네츠’를 가보는 계획이 원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 책자에는 프라하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만 나와 있어서, 어쩌면 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당시 ‘유레일패스’를 끊어놓아서 유럽의 어느 도시든지 기차로는 무료(간혹 유료가 있음)로 갈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타면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선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후시네츠라는 이름도 있기에, 안내원에게 이곳에 기차로 갈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갈 수 있다고 답해주었고, 저는 다른 일정을 모두 다 뒤로하고 우선 후시네츠부터 가보기로 했습니다. 무려 4시간이 걸린다고 했지만 말입니다.
다음 날, 저는 민박집에서 제공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간단히 짐을 챙겨, 아침 일찍 프라하 역으로 향했습니다. 체코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다르게 유로를 쓰지 않고, 자국 화폐인 ‘코른’이라는 돈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환전소에 들려 이틀 정도 쓸 만큼 돈을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늘 하던 것처럼, 가격이 저렴한 대형 마트에 들려서 빵과 우유를 샀습니다.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에, 저는 여행 내내 점심을 그렇게 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푼 마음으로 후스의 고향인 후시네츠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 2시간 정도 갔을까? 갑자기 저만 빼고 사람들이 모두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후시네츠 역은 멀었는데 왜 벌써 내리지?’ 저는 그렇게 조금 의아해하면서 계속 기차에 남아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기차는 여기서 더 가지 않고, 나머지는 버스가 데려다준다고 말해주었습니다(영어가 아니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눈치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오르니, 눈앞에 참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의 80년대 시골 버스를 연상하게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버스와 시골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자리를 잡은 이방인 하나.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시골에 외국인, 그것도 동양인이 오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만약 저도 시골버스 안에서 키 크고 얼굴 하얀, 또는 파마한 것 같은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를 가진 외국인을 봤다면 참 신기해했을 겁니다. 아무튼, 그런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바라보면서 후시네츠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기차역에 도착했고, 버스에서 내리고 나니 참 막막해졌습니다. 제가 가진 여행 책자에는 기차로 가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았기에, 오직 버스 터미널에서 후시네츠 마을로 가는 길만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고, 기차역에서 마을로 가는 길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 저 집을 드나들면서 가는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시골이라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몸 언어(Body Language)를 사용하여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향해 걸어가던 중,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갈림길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왼쪽으로 가야 할지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그날따라 지나가는 차도 없었습니다. 손에 침을 뱉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침이 튀는 방향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믿음으로 오른쪽 길을 택했습니다. 10분 정도 갔을 무렵, 참 감사하게도 후스 동상이 그려진 마을 간판이 나타났습니다! 드디어 후시네츠에 다다른 것입니다.
▲ 후스 사진이 그려진 안내 게시판
(이 게시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5분쯤 더 걸어가니,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마을에서 태어난 체코의 전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동상이었습니다.
▲ 얀 후스의 동상
(그의 손은 성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여행 책자를 펼쳐보니, 그 동상 가까운 곳에 얀 후스의 생가가 있고, 그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부푼 마음으로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저만치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설마’하면서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그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굳게 닫힌 얀 후스 생가 & 박물관,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앙상한 나무
‘아, 무려 4시간을 들여서 찾아왔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혹시’하는 마음으로 박물관 뒤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리 높지 않은 울타리 너머로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운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였는지, 갑자기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박물관 뒤쪽의 울타리를 넘어 정원을 유유히 가로질렀습니다. 만약 그런 저를 누가 신고했다면, 아마도 무단출입으로 경찰에게 붙잡혀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쳐들어가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볼만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그저 굳게 닫혀있는 창문 너머로, 전시물 몇 개만이 뽀얀 먼지와 함께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창고처럼 보이는 곳에는 많은 물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 있었습니다. 분명, 책에는 후스와 관련된 다양한 유품들을 깔끔하게 전시하고 있었고, 또 그가 사용했던 방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광경은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무슨 이유로 운영하지 않나요?’라고 자초지종을 물어볼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후스의 고향에 왔다는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박물관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교회 예배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이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건물에 쓰인 체코어도 모르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습니다. 예배당 입구에는 반신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아무래도 후스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이 역시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후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그 하루는, 뭔가 찜찜하고 아직 마무리가 안 된 것만 같은 아쉬움이 맴돌았던 날로 기억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러 이 탐방기를 쓰려고 준비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제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프라하에 있는 기독교 유적들을 소개하는 책을 참고 자료로서 구입하였습니다. 그 책은 체코의 한 목회자가 쓴 것으로서, 한국 선교사의 아내분께서 번역해주셨습니다. 그 책의 앞부분에는 남편 되는 선교사님께서 직접 소개 글을 작성해주셨고, 그 소개 글 끝 부분에는 그분의 메일 주소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갑자기 2년 전에 보았던 그 건물과 반신상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그 건물과 반신상이 무엇인지 문의하였습니다. 예상대로 그 반신상의 주인공은 후스였고, 건물도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 말씀에 의하면, 그 교회는 형제교회 교단에 속한 교회로서, 20세기 들어와 새롭게 형성된 체코의 개신교회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더불어 그 교단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의 신앙유산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전해주셨습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종교개혁의 원리와 정신에 충실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스의 신앙을 이어받으려는 후손이 새롭게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에 참으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록, 후스의 생가와 그의 유품들을 볼 수 없었어도, 죽었으나 믿음으로 계속 세상에 진리를 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히 11:4)을 보고 온 것이니 말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선교사분께서 현재 얀 후스의 삶과 업적에 대한 책을 번역하고 계시고, 그 책이 올해 안에 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후스에 대한 책이 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도 이미 신실하게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후스’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입니다. 1415년, 로마 카톨릭은 후스의 개혁 사상을 정죄하고, 그에게 화형을 선고합니다. 그러자 후스는 이런 예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비록 당신들이 오늘 거위 한 마리를 태우지만 100년 후에 거위가 탄 재에서 백조가 나올 것이오. 당신들은 그 백조를 절대로 구워 먹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정말 거의 100년 후인 1517년, 드디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너무나도 놀랍고 오묘합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루터가 딛고 설 수 있는 종교개혁의 발판이 마련되게 하셨습니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둔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그 강하신 팔로 이끌어가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뜻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오병학 글, 주영광 그림, 『세계위인시리즈 동화만화2: 존 위클리프, 존 후스, 잔 다르크』, 은혜출판사, 1997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묻어둔 진리』, 페텔, 2013
5. 이지 오떼르,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 김진아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1)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후시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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