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홈 스쿨
(7) 기독 ‘홈 스쿨 가정 모임’의 현실과 장래 희망
김선희
우리 가정은 많은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자녀 양육을 향한 염원 하나로 홈 스쿨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통과해야 했기에, 장차 어떤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해도 꿋꿋이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섣부른 기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의 결심과 의지는 우리 기대와 생각만큼 굳건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사람이 자기를 믿고 의지했다간 크게 낭패를 보기 쉽다. 홈 스쿨을 시작하고 나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어려움이 찾아왔다. 우리 가정도 그 어려움 앞에서 여느 가정들처럼 겁을 내고 두려워하면서 한참동안 갈팡질팡했다.
홈 스쿨 초기에는 많은 가정이 ‘아이의 사회성’ 문제를 가장 크게 걱정하게 된다. 우리 가정만 이런 특별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 옆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다. 그러다 보면 참으로 자연스럽게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가정은 없을까?’ 하면서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다가 기독 홈 스쿨 가정이 주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금은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더불어 그런 가정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면, 정말 만사를 제쳐 놓고서라도 그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 하게 된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절대로 위험하거나 특별한 길이 아니며,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 홈 스쿨 가정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과 동시에 모임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때는 차분히 앞뒤를 살펴보는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정이 홈 스쿨 초기에 크게 의존했던 인터넷 동호회에는 지역 모임 관련 정보를 게재하는 공간도 있었다. 그곳을 살펴보던 중에, 우리 지역의 정기 모임이 약 4~10 가정 정도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교제를 나누고 있을 정도로 꽤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정은 게재된 모임 사진과 후기를 살펴보면서, 이젠 됐다 싶어 안도감을 느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홈 스쿨 초기에는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내가 아이를 너무 폐쇄적으로 키우려는 것은 아닐까? 장차 아이가 사회에 나가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까? 이러다 영영 고립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외골수로 자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과 생각이 종종 찾아온다.
부모도 처음 마음과 생각을 유지하기 어려운데 아이는 오죽할까?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을 많이 찾으며 그리워한다. 이런 경향은 다자녀 가정의 아이보다는 한 자녀, 두 자녀 가정의 아이일수록, 또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더 강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한창 그런 어려움에 힘겨워하던 우리 가정에 홈 스쿨 가정 모임은 모든 어려움을 한순간에 해소할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처럼 다가왔다.
우리 가정은 같은 길을 가는 이들끼리 모여 남모르는 고충, 경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의 대처 방안 등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들떠서 그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은 기대대로 참 만족스러웠다. 부모들끼리 모여 아이들의 학습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그토록 바라던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우리보다 지역 모임을 더 좋아했다. 우리 아이들은 지역 모임이 있는 날만을 설렘 가운데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설렘, 기쁨, 편안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얼마 못 가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현재, 기독 홈 스쿨 가정은 전국에 약 2,000가정 남짓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기독 홈 스쿨 가정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신학적, 교리적 공통분모보다는, ‘기독교’라는 다소 느슨한 범주 아래에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준은 한창 이단논쟁이 불거진 큰 ** 교회에 출석 중인 가정도 홈 스쿨 가정 모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경계선이 아주 넓다. 그 기준으로 신앙의 공통분모를 추려내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자녀에게 교회에 나가지 말고 가정에서 신앙 생활하라고 가르치는 가정, 목사는 성경에 없는 직분이니 모두 형제, 자매로 불러야 한다는 가정, 십일조 헌금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정 등등, 수많은 불일치점이 존재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과연 이 가정이 성경대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홈 스쿨을 하는 것이 맞나 싶은 가정까지도 손쉽게 모임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기독 홈 스쿨 가정 모임인데도, 아이의 신앙과 연관이 있는 중요한 주제를 토론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는 일을 해내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면 금세 이야기가 빙빙 겉돌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에 논쟁이 불거지는 신학적 쟁점에 대해서는 더 그러했다. 모임을 거듭할수록 그런 경향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모임에서는 분쟁의 소지를 줄이려고 신앙적인 대화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의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가 주로 오가게 되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잘 양육할 것인가에 관한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모여서 무엇을 하면서 즐겁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까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모임이 이루어지고 나자 자연스럽게 ‘세상의 여타 사교 모임과 다른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더 재미있는 시간을 위해 머리를 맞댄 어른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다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무렵, 모임 참여가 더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가정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라 CCM이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는, 아이들에게 왜 CCM을 부르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고 부르지 않게 하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어느 날, 홈 스쿨 모임에서 가정들이 드럼, 기타, 전자 건반 등을 사용하여 CCM 찬양 예배를 함께 드리자고 제안했다. 그런 악기들을 통해 아이의 음악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면서 모두가 열정적이고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시겠냐는 것이었다.
우리 가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제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기에 참 난감했다. 우리 가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문제를 놓고 한참 고심했다. 그런 뒤에, 모임에 참여하기는 하되 CCM 찬양이 모두 끝날 즈음에 맞추어서 참여하기로 했다. 그렇게 참여하기는 했지만 무의미한 참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도 그런 변화를 느꼈는지 먼저 우리에게 홈 스쿨 모임에 꼭 참여해야 하느냐는 말을 해왔다. 그런 일을 겪은 뒤, 홈 스쿨 모임을 향한 우리 가정의 갈망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건은 주일 성수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는 홈 스쿨 모임에서 오지 마을로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 가정은 다른 일로 인해 그 여행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들 잘 다녀왔나 싶어서 후기를 읽어본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원래 일정은 주일 전날까지였다. 이는 주일에 교회를 섬기려고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몇 가정은 하루 더 있기로 하고 그곳에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앙은 마음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꼭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앞선 글에서도 여러 번 밝힌 것처럼, 홈 스쿨은 우리 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이에게 가르치면서 아이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는 그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고 하면서 여행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가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물론, 먼 지방을 다니다 보면 불가피하게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나가 예배 드리는 일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아예 교회 자체를 나가지 않는 행동과 그런 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정말 그 말이 맞다면, 교회에 출석하려고 굳이 토요일에 올라온 이들은 장소를 중요시하는 고리타분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충분히 올 수 있었는데도 더 여행을 즐기고 싶어서 그곳에 남아놓고서, 그런 행동을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하는 행동은 참된 신앙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요, 지독한 위선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앞에 두고서도 자꾸 핑계를 대고 타협하며 자기를 합리화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된다. 우리가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까지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우리 아이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 순간 보여주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홈 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 가정은, 고심 끝에 이 문제만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 가정은 지역 모임에 해당 문제를 제기했다. 기독 홈 스쿨 모임인 만큼, 그 근본 취지와 목적에 맞는 진리에 대한 순수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본 진리를 이탈한 가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역 모임의 중론은 각자의 신앙과 삶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모두를 이해하고 포용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가정이 말한 진리에 대한 순수성과 기독 홈 스쿨 모임으로서의 정체성은 ‘사랑 없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와 함께, 우리 가정은 그러한 이해심과 포용력이 없고, 정죄와 판단만 하는 편협한 가정처럼 되고 말았다. 그 일을 통해 우리나라 홈 스쿨 모임의 현실과 한계를 깨닫게 된 우리 가정은 더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 우리 가정은 개별적으로 가정을 만나고, 소식을 주고받는 방향으로 홈 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우리 가정이 내린 결정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면서 불편해하실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그럼 매번 모여서 성경 이야기만 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 세상과 단절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적인 자녀 양육이라는 것인가?’ 하는 격앙된 반응을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가정이 요구한 것은 모임이 이 세상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정은 모든 일을 성경적으로 생각하면서, 서로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근본 토대와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 토대와 울타리가 없이 모임과 자녀 양육이 이루어지면, 그 모임과 양육방법은 세상의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되고 만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명령한다(롬 12:2; 약 1:27). 또한,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가르친다(고전 10:31). 그런 진리의 토대와 울타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물려줄 것인가를 논의하는 가운데, 친목도 이루어지고 아이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는 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상적인 활동이 진리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면, 다소 부족하고 어긋나는 점이 발생해도 교정과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가정에서 아이들이 여전히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지만, 성경의 가르침으로 책망하고 바로잡으며 위로해주어서 계속 천국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가정은 홈 스쿨 모임이 그러한 진리의 토대와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부분을 양보하고 타협한다면 눈앞의 불협화음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아이를 굳이 홈 스쿨로 양육해야 할 이유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필요와 갈급함 때문에, 앞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행동에 나선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사회성’ 문제는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아이의 사회성은 또래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기보다는, 부모의 가정 교육이나 다른 형제, 자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홈 스쿨을 준비하는 가정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를 많이 낳기를 바란다.
우리 가정도 다섯 남매가 북적이면서 생활하다 보니 친구 관계나 사회성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아이들끼리 의견이 충돌할 때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 말씀은 이런 부분에서도 능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아이들도 나이가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또래 친구들에 대한 갈망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그때가 되면 친구 흉내를 내면서 따라 하기보다는, 스스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주어진 시간과 자원을 배분하여 사용하려고 한다. 그러면 각 가정의 홈 스쿨 운영은 그러한 아이의 성향과 재능에 따라 특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각 가정의 처지와 형편도 상당한 영향을 주기에, 다른 가정의 사례는 언제나 신중하게 검토하고 기도한 다음에 도입해야 한다. “누구네는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자녀 교육과 양육에 대한 고귀한 책임을 우리 부모 손에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홈 스쿨을 운영하면서도 자녀 양육의 최종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겼다가 어려움을 겪은 가정들이 있었다. 용인 수지에 있는 기** 교회는 홈 스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목회를 했었다. 그래서 성경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30여 가정이 그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 가정들은 한동안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수월하게 홈 스쿨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회 목회자가 돌연 홈 스쿨 사역을 중단하고, 대신 교회 성장 사역으로 방향을 선회해버렸다. 그 교회의 지원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가정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져 방황하면서, 한동안 어떻게 홈 스쿨을 운영해야 하는지 몰라 애를 태워야 했다.
이처럼 자녀 양육은 부모가 직접 책임을 지고 감당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보다는 목사님께서 아무래도 성경을 폭넓게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 양육에 관해서 목사님께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는 일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목회자도 부모가 그 가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가꾸어 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상태를 점검해주는 일을 잘 해줘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각기 고유한 기능을 하는 별개의 기관이다. 누가 어디에 종속되거나 어떤 역할과 기능을 상대방에게 위임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가 공부방을 운영하고 가정이 거기 참여하는 일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자기 본분에 맞는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일반적인 영역에 속한 일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하면,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은 급속하게 사라지게 된다. 문화 센터, 책카페, 헬스클럽 등등이 교회를 세속 정신의 포로로 만든 첨병(尖兵)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일은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일반 사회 기관에서 배우거나, 각 가정에서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절대로 그 일을 교회로 넘겨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본연의 임무(말씀 선포, 성례 집행, 권징의 시행)에 충실해야 하며, 가정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이 각 가정에 잘 뿌리내리고 결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각 가정이 그런 일에 힘쓰면서 서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며 친교를 나누는 일은 지극히 선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먼저 어려움을 겪어본 가정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는 가정을 돕고 위로해주면서 끝까지 자기 일을 잘 감당하게 격려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다른 가정의 조언을 통해 우리 가정의 부족한 점을 잘 보완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도움이 아이들의 삶 속에서 경건과 거룩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일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하겠는가? 또, 각 가정의 아이가 그런 공통의 신앙 지도와 교육 안에서 서로 친밀하게 지내며 우정을 쌓아간다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더불어 그런 모임에서조차 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경륜 있는 목회자가 성경적인 길을 제시해준다면, 부모가 자기 일을 감당하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또, 그로 인해 아이의 삶에서 더 많은 신앙의 열매가 맺힌다면, 교회는 자기 일을 감당해가기가 얼마나 순조롭고 수월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홈 스쿨 가정 모임의 안타까운 현실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자기 임무를 소홀히 하고 엉뚱한 것에 눈을 돌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는 자기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데, 어떻게 홈 스쿨 가정 모임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또, 참된 경건과 거룩함이 가정에서 결실하지 못하니, 교회가 하나님 일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자기 임무 완수에 목숨을 거는, 제대로 된 개혁교회를 찾는 일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실정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임무에 충성하는 참 교회를 전국 곳곳에 세워주시는 날이 속히 이르렀으면 한다. 그날이 오면, 성경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소망을 품은 가정들이 그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서로를 돕는 일을 즐겁게 감당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1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친교도 나누고, 더 경건하고 거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기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즐겁고 기쁘다. 하지만 지금의 암담한 교회 현실을 살펴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그날은 우리 세대보다는 우리 자녀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부디, 우리 자녀들은 그런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기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전심전력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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