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4) 솔로몬 스토다드 아래서
김재호
1. 솔로몬 스토다드의 선한 유산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는 노샘프턴을 중심으로 60여 년간 사역하면서, 종종 매사추세츠 서부 지역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했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스토다드는 83세였던 1726년 겨울에 외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상임 부목사로 청빙하였고, 그 뒤 2년 반 동안 강단 사역을 함께 감당하였다. 그리고 1729년 봄에 스토다드가 소천하자, 에드워즈는 그의 뒤를 이어 노샘프턴의 담임 목회자가 되었다.1
솔로몬 스토다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혈기왕성했고 타고난 웅변가였으며, 죽는 그 날까지도 그 기력이 쇠하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인크리스 매더로부터 회중교회의 교황이 되려고 한다는 풍자를 듣기도 했다. 그런 스토다드가 숨을 거두자, 벤저민 콜먼은 바로 그 풍자를 염두에 두고서 ‘참으로 모든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헌사로써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2
실로 베드로처럼 불같은 기질을 소유했던 스토다드가 자기의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쏟아부은 일은 바로 영혼 구원이었다. 즉, 회심과 선교에 특별한 열심을 냈다. 스토다드는 『회심에 관한 소고(小考) (Treatise on Conversion, 1719)』에서 영적인 빛 또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볼 수 있는 열린 눈을 갖는 일을 회심의 본질로 언급하면서, 그 일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에드워즈가 1733년에 『신적이며 영적인 빛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에서 설교한 내용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3 다시 말해, 스토다드는 에드워즈처럼 단순한 이론적 지식과 성령의 역사에 수반하는 경험적이고 인격적인 지식 사이의 차이를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에 버금갈 정도로 생생한 지옥에 관한 스토다드의 설교는, 그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심지어 스토다드는, 회심한 사람이 경험적인 지식을 수반하는 회심의 때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능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신앙의 경험적인 측면을 무척이나 강조하며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타고난 스토다드의 불같은 기질은 그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도구로써 크게 쓰임 받았다. 스토다드는 틈만 나면 사회의 악과 부도덕을 열렬히 꾸짖으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고, 뉴잉글랜드가 인디언 선교에 별 관심이 없는 일에 대해서도 책망과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4 이러한 구령의 열정과 경건한 삶, 그리고 칼빈주의 근본 교리 수호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그 일을 탁월하게 감당한 점 등은 스토다드를 한 시대의 영적인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의 신성시할 정도로 존경하였다.5
「이런 일들을 최우선에 두었던 스토다드와 윌리엄스는 그 마을 전역에 부흥을 촉진시켰다. 1712년 지역적 부흥에 탄력을 받아, 그들은 부흥이 교회의 가장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보스턴의 지도적인 목사 가운데는 그런 복음주의적 갱신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 1714년 인크리스 매더는 스토다드의 새로운 복음주의 입문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잡이 (A guide to Christ)』의 서문을 썼다. 이것은 교회 회원권에 대한 그들의 오랜 논쟁의 종식을 의미했다. 이와 유사하게, 매더 부자는 이 시기에 보스턴 브래틀 스트리트의 무례한 목사 벤저민 콜먼도 그들처럼 칼빈주의와 세계적인 부흥에 헌신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의 갈등을 끝내게 되었다.」6
이렇듯, 스토다드는 영적인 각성과 회심, 그리고 전 세계적인 선교를 향한 헌신적인 소망으로 대표되는 복음주의적인 부흥이 미국 전역에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크게 쓰임 받았다. 건전한 교리에 기초한 참된 회심과 더불어, 그 은혜를 전 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그의 소망이 건전한 복음주의적인 화합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덕분에 에드워즈와 휫필드를 주역으로 하는 ‘대각성 운동’은 초반에 큰 걸림돌이나 반대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는 스토다드와 그의 동료들이 믿음으로 힘써 뿌려놓은 결실을 풍성하게 거두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2. 솔로몬 스토다드가 남겨놓은 그림자
선하지만 불같은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스토다드는 선한 열심으로 좋지 못한 유산까지도 합리화하여 에드워즈에게 넘겨주었다. 특히, 그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경계선을 사실상 지워버리고 말았다. 훗날 에드워즈에게 찾아올 성찬 논쟁과 사임 및 선교지(스톡브리지)에서의 극심한 어려움은, 사실 모두 스토다드의 이 실책으로부터 나왔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스토다드에게 국가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언약 아래 놓여있는 기관이었다. 즉, 교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스토다드는 마치 교회를 목양하듯 국가와 사회 전체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고, 그분의 일에 모든 시민이 앞장서라고 외칠 수 있었다. 목회자 협의회를 통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고, 사회의 유력 인사와 친밀하게 유대하며 공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토다드의 입장도 아주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1636년에 로저 윌리엄스가 오직 신약적인 모범만을 따르는 교회론을 주장하다 추방된 뒤, 얼마 못 가 교회정치 자체를 오염된 것으로 규정한 선례도 있었다. 더하여, 영국 본토에서 매사추세츠 주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특허장(Charter)을 한동안 발급해주지 않아, 왕이 파견한 총독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교회가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었던 점도 충분히 참작해야 한다.7
그러나 신정 국가였던 이스라엘이 이미 잘 보여준 바와 같이, 이러한 해결책은 실로 양날의 검과도 같다. 콘스탄티누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국교회 형태의 해법은, 광범위한 선교와 신앙의 대물림의 촉진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실 더없이 강력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저지른 우상숭배로 인해 백성 전체가 바알에게 돌아선 것처럼, 지도자층의 신앙이 한 번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 사이의 경계선이 명확하다면, 교회는 죄에 물든 사람에게 권징(勸懲)을 행하여서 그 사람이 실제로 속해있는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교회는 그 일을 통하여 참된 성도를 보호하고 권징을 받은 그 사람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을 훨씬 수월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교회(國家敎會) 형태에서 그런 권징이 있기는 사실 어렵다. 국가교회에서 성도와 죄인을 분리하는 권징을 행하려면 사실상 해외 추방이나 사형, 둘 중 하나밖에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시대 제후들이 교황의 파문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그에게 복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교회의 구조상 그냥 믿는 척하는 거짓 신자들이 늘어가기 아주 쉽다. 또 그렇게 늘어난 수많은 명목상의 신자들이 은밀하게 퍼뜨리는 죄도 교회 안으로 계속 퍼져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명목상의 신자와 교회 직분자가 정치적으로 서로 얽힐 수밖에 없는 구조이니, 교회 직분자는 좋든 싫든 그들의 눈치와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교회 전체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일은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교회가 한동안 광범위하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수많은 사람이 그 선한 유산을 물려받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어느새 아합을 왕으로 모신 다수의 이스라엘 대(對)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엘리야와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7,000명이라는 실로 고전적인 형국이 자리 잡게 된다.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 극히 소수만 참된 신앙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는 상황이 찾아오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며(요 18:36), 사무엘도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삼상 8:6~18).
이처럼, 교회와 국가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는 국가와 구별되어 자기 성결을 유지하면서,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공의)을 선포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러면서 복음 전파, 즉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속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라고 하는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복음의 일에 열심을 내는 선한 국가교회가 되라고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스토다드는 그런 일에도 많은 열심을 냈고, 결국 그 결실을 에드워즈가 받게 되었던 것이다.
더하여, 이 사실은 교회 연합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이루기 위한 연합의 기초는 참된 회심과 근본 교리의 통일성, 건전한 권징, 그리고 비본질(非本質)적인 영역에서 관용함과 경계함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에큐메니칼 또는 신복음주의적이고 인위적인 형태의 연합을 모색하는 경우는, 앞서 말한 국교회의 재앙을 피하기 어렵다. 어느새 회심하지 않은 이들이 교회의 모든 것을 장악하여서, 참된 신자는 광야의 선지자처럼 변두리에서 사람들에게 외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곤경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해를 듣고자 모일 때에 가족을 제외하고 다섯 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비밀집회 금지 법령(Conventicle Act)’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비국교도들이 이전에 사역했던 곳 근처, 5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5마일 령(Five Mile Act)’도 통과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법령을 어기고 끊임없이 설교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도 같은 이유로 베드퍼드에 있는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있어야만 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중략)……
우리가 보았듯이, 그들은 국교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교개혁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영국 국교회의 개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셋째로, 항상 다수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까? 혹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수의 결정이 매우 잘못되었다면 비록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가 적다 하더라도 남아서 진리를 증거하며 다른 이들을 설득해 진리로 이끌어야 합니까? 이미 말했듯이, 청교도들은 10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662년에 이르자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비국교도들이 추방된 것입니다. ……(중략)……
넷째로, 우리는 모든 권위주의적인 경향과 교회들이 추진하는 여러 가지 활동, 혹은 여러 교회들로 구성된 연합체나 교회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측면에서 교권주의나 성직 계급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형제처럼 지내려는 경향에 대해서 빈틈없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8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은 모두에게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 결과는 세상의 교회화가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복음주의와 신칼빈주의의 문화 선교 및 세속적인 교회 운영을 항상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선교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론하여 사람이 참되게 회심하게 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의 결실이나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실용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수단을 강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은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3. 사라 에드워즈
이런저런 인간적인 결점에도, 여전히 좋은 아내요 현명한 어머니이자 경건한 사모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사라 에드워즈는, 15살이었던 1725년에 조나단과 약혼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27년 7월에 결혼하였다. 당시 사회의 평균 결혼 연령이 남자는 26세, 여자는 23세였음을 생각하면 둘 다 무척이나 일찍 결혼한 편이었으며, 사라의 경우는 무척이나 일찍 결혼한 셈이었다.9
사라 에드워즈는 기본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속과 등진 채,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를 묵상하며 그분과 교제하기를 무엇보다 즐거워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10 또한, 자신의 심령을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와 그분의 영광에 혹시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를 진지하게 고심하면서 자기를 시험했다.
그로 인해, 천성적으로 내향적이고 영적인 사람이었던 사라는 자기 죄로 인한 깊은 낙망에 빠지기도 했다. 반대로 그런 자신을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가 주는 달콤함에 마치 천국을 거니는 듯한 황홀함에 완전히 사로잡히기도 했다.11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라가 지닌 이러한 기질의 장단점과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낙망과 침체 및 열광주의적인 광신에 대한 의혹들을 건전하게 분별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조나단은 그런 사라와의 결혼 생활을 영적인 연합이라고 회고했다.12 이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평소 가르치고 실천했던 것처럼,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 생활이라는 자연적인 주제 역시도 영적인 맥락에서 모형적으로 접근하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그는 결혼 생활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 즉 성삼위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무한하신 구속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한 영적인 모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경건하고 온유하게 자기 속 사람을 단장하는 사라를 깊이 사모했고, 사라 역시도 그 사랑 안에서 자기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며 매사에 복종하기를 힘썼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은혜의 영광스러움이 서로를 온전히 연합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건에 기초한 사랑의 연합은 가정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에 필요한 능력을 충만하게 공급해주었다. 그 덕분에, 사라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고도 어려운 일을 탁월하게 감당해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문하생이었던 사무엘 홉킨스의 증언에 따르면, 사라가 보통 한마디만 하면 자녀들은 기꺼이 순종했고,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자녀 사이의 싸움과 말다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사라는 그 모든 일에 있어 고함을 치는 일 없이 침착하게 타일렀으며, 그러면서도 아이의 고집과 악행을 묵인하는 일도 없었다. 그만큼 조나단과 사라는 자기 자녀에게 진정으로 존경받는 참된 권위, 즉 성경적인 권위를 가진 좋은 부모였다.
또한, 사라는 무척이나 근면하여 농사, 요리, 옷 만들기, 설거지, 청소, 자녀 교육 등을 모두 혼자서 돌보아, 남편이 하루에 13시간을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손님들에게 무척이나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그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면서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13 그랬으니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독신으로 살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휫필드가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은 복음전도자 조지 휘트필드였다. 그는 에드워즈 목사의 집을 잠깐 방문했다가 독신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온통 흔들리고 말았다. 휘트필드는 경건함과 상냥함과 우아함을 두루 겸비한 에드워즈 부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중략)……
그랬던 인물이 에드워즈 부인을 보자 자기도 에드워즈 목사처럼 결혼의 축복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온유하고 고요한 성품을 소유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풍성한 감성이 실린 차분한 어조로 하나님의 일을 말했다. 그녀는 에드워즈 목사의 좋은 배우자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제게도 아브라함의 딸을 아내로 주소서!’라고 여러 달 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14
물론, 모든 사람이 사라 에드워즈와 같을 수는 없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는 꽤 진취적이고 당돌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가정을 무척이나 평안하게 잘 가꾸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마틴 루터와 같이 뚱뚱한’이라는 서양 경구는 아마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 에드워즈가 남겨준 모습은 참된 경건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자연적인 기질과 관계없이 모든 기독 여성들이 본받아 마땅한 선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습관적으로 자기 남편을 무시하고, 심령의 온유함 대신 명품으로 외모를 치장하기를 즐기며, 실질적으로 자기 집안을 천국의 휴식터로 가꾸라는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소명의 영광스러움을 가볍게 여기면서 밖으로 돌다가, 결국 집안을 사막처럼 만들고 마는 명목상의 기독 여성이 수없이 많다. 사라 에드워즈는 그런 여성들에게 따끔한 훈계와 따뜻한 격려를 함께 건네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5, 172, 191.
2 위의 책, pp. 184, 192.
3 위의 책, p. 183.
4 위의 책, pp. 184~187.
5 위의 책, p. 177.
6 위의 책, p. 181.
7 위의 책, pp. 60, 61, 742.
8 마틴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Truth Unchanged, Unchanging And From Puritanism to Nonconformity)』, 김효남 옮김, 지평서원, 2010, pp. 281, 283, 290, 291.
9 앞의 책, p. 165, 각주 p. 755.
10 위의 책, p. 148.
11 위의 책, pp. 357, 362, 363.
12 위의 책, p. 711.
13 위의 책, pp. 469~471.
14 에드나 거스너,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랑한 사람들(Jonathan and Sarah: an uncommon union)』, 조계광 옮김, 생명의말씀사, 2005, pp. 165,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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