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4) 돌밭에 뿌려진 씨
김재호
▲ 고난과 마주치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버린 온순(Pliable)
「온순(Pliable): “당신이 여태껏 내게 말해준 행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오? 출발하자마자 이런 고생을 하게 됐으니 앞으로 어떤 고생이 다가올는지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소? 만일 여기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면 내겐 상관하지 말고 당신 혼자서 그 멋진 왕국을 찾아 떠나시구려.”
이렇게 말하면서 온순 씨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그의 집 가까운 쪽에 있는 늪 가로 기어올랐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고 그 후로 크리스천은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1
복음을 전하면, 그 모든 말씀을 즐겨 듣고서 옛 생활을 정리하는 듯한 이가 나타난다. 그러한 일은 참으로 기쁘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모든 이가 다 진실하지는 않다. 그들 중 일부는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기는 하나’, 성령님께서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신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영적인 ‘진지함’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매사에 가볍다. 눈 앞에 보이는 넓고 곧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세 그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자기 부패의 깊이와 심각함을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눈 뜨게 되어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 나서게 되기보다는, 신앙을 통해 자기를 만족하게 할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속히’ 손에 넣기를 꿈꾸면서 들뜨게 된다.
그러다 그들이 한 귀로 흘려 들었던 수많은 고난과 갈래길이 실제로 나타나면, 그들의 ‘장밋빛 환상’은 무참하게 깨져버리고 만다. 그때 그들은 절망하되 심히 절망하며, 낙심하되 완전히 낙심한다. 심지어 그들은 ‘속았다’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진짜 속았다. 물론 성경이 아닌 타락한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즉, 부딪힐 돌에 부딪힌 것이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자기 죄의 실체를 인격적으로 깨닫지 못한 이들은 결국 자기 죄에 속아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의 책임을 감히 하나님께 떠넘기면서 아주 돌아선다. 그들에게는 즉시 기쁘게 받아들인 그 모든 교훈을 끝까지 붙들어줄 ‘온전한 영적 자각’이라는 기초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님의 일반적인 은총 안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온전한 데로 나아가는 일에 게으르며, 심지어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면서 설쳐대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이런 자이니,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즉시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깐밖에 살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즉시 걸려 넘어지는 자이다.” (마 13:20, 21, 바른 성경)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면, 멸망 당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고후 4:3, 4, 바른 성경)
죄의 비참함에서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를 무엇보다도 갈망하는 진실한 마음이 아닌, 막연히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의지력을 동원해도 한계가 있다. 온갖 세뇌로 아무리 자기를 속여보려고 해도 안 된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여전히 품고 있는 그 ‘좋은 것’들이 아닌 진짜 ‘쓰디쓴 것’들이 예상 범위를 넘어 계속 다가오는데, 어찌 그가 계속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안락함을 마음에 품고 좁은 길로 나아가는 그의 양옆에는 지뢰밭이 실제로 펼쳐져 있다. 자기 편안함 때문에 조금만 옆으로 치우치면 지뢰가 정말로 터진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홀연히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만다.
‘아, 내가 엉터리 사기꾼들의 말장난에 속았구나! 내가 미쳤지. 세상에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다고? 가자, 돌아가자! 이제야 친지들이 왜 그토록 나를 말렸는지 알겠구나.’
이런 이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과연 그들을 어떻게 대해줄까? 그들의 영웅적인 귀환을 칭송하며 크게 기념해줄까? 그간 고생 많았다고 그들을 위로해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타락한 세상은 그런 이를 ‘비웃음거리와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삼는다. 술 안줏거리로 삼아 희희낙락하면서 더욱 굳세게 복음을 거절하는 증거로 삼아 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복음? 그깟 거 믿는다고 열심 내던 사람들 나중에 보니까, 결국 재산만 다 까먹고 하나같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던데 뭐.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그걸 믿어? 그걸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지!”
세상은 그렇게 다시 돌아온 자들을 비웃으면서 승리의 축배를 높이 든다. 그로 인해 돌아간 이들은 심한 수치를 느끼고, 점점 저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에는 마음에 큰 용기를 얻어, 한때 자신이 그토록 즐거움으로 따랐던 믿음의 도를 몹시 비난하고 경멸하면서 큰 역겨움과 분노를 표하기에 이르고 만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에까지 이른 악한 자들을 이렇게 그린다.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선물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시대의 능력을 맛보고 나서도, 타락한 자들은 회개에 이르도록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그분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히 6:4~6, 바른 성경)
“의의 길을 알면서도 자신들에게 전해진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알지 못했던 것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참된 속담에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돼지는 씻었다가 도로 진창 속에서 뒹군다.’라는 말이 그들에게 이루어졌다.” (벧후 2:21, 22, 바른 성경)
“누구든지 자기의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하여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나는 그것에 대하여 간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불의는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 (요일 5:16, 17, 바른 성경)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부디 타락한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고, 당신이 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지를 정직하게 되짚어보라. 그분이 한없이 인자한 할아버지나, 또는 나를 무한히 아껴주는 애인 같아서인가? 현재의 삶에 약간의 정신적인 유익을 더하고 싶어서인가? 조금 더 도덕적으로 살고 싶어서인가? 교회에서 친구들을 만나 노는 게 즐거워서인가? 목사님께서 그렇게 해야 한다니 무턱대고 그렇게 하고 보는 것인가? 그게 왠지 좋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이처럼 당신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자기 죄와 어리석음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당신이 이러한 자라면, 당신은 절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된 자일 수 없다. 조금 뒤에 찾아올 고난의 때에, 당신과 우리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원수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가 이르기 전에 속히 돌이키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뉘우쳐 돌이키는 자를 절대로 내쫓지 않으신다.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늦지 않았다. 속히 돌이켜 온전한 데로 나아가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으려고 좁은 길로 애쓰며 나아가는 이들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절대 낙심하면 안 된다. 용기를 가져라. 주님께서는, 머지않아 당신이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기뻐 뛰며 쉼을 누리도록 해주실 것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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