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4) 오직 그리스도
김재호
‘오직 그리스도’. 자기를 복음주의자로 여긴다면 누구나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신조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수많은 자칭 복음주의자들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말로는 분명히 ‘오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여러 예수’를 좇는다.
또는, 그리스도와 세상을 ‘겸하여’ 따른다. 그러면서도 강단에 오르기만 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열렬히 ‘오직 예수’를 외치기에 여념이 없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버니언이 지금 시대로 온다면 이런 이들을 과연 누구에 비유할까? 나는 달변(Say-well, 수다쟁이)이나 위선(Hypocrisy)에 비유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성경이 가르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
성경이 가르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나사렛 예수가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독생자요, 구속주이심을 뜻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와 비교할 만한 다른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전자가 구속의 근거와 그 적용 범위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그 구속의 영광스러움이 절대적이며 영원무궁함을 뜻한다. 이 중에서 구속의 근거와 적용 범위의 측면에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뜻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1. 유일한 구속의 근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대속이라는 말의 뜻은 ‘값을 대신 치른다’이다. 이는 우리가 저지른 악한 죄가 요구하는 모든 죗값과,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행해야 하는 모든 의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감당해주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살면서 행한 수많은 선행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적 결단 때문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신비하고 놀라운 일 때문도 아니다. 만일 누군가 이런 것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잔칫날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예비된 형벌이 그를 맞을 것이다(마 22:12~14). 왜냐하면 ‘대속’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을 만한 무엇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대속을 통해 사람을 의롭다 하실 이유가 전혀 없다. 여전히 남아있는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라고 하시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으로써 사람을 용납하시기로 하셨다면, 타락한 인간에게서 당신을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셨다는 뜻이 된다.
즉,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대신’하게 하시고, 당신의 공의가 약속한 모든 복락을 긍휼 가운데 ‘거저’ 주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의뢰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전혀 아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분명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그 은혜를 믿고 의지하기에,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심히 탄식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롬 7:23~8:1). 우리는 깊은 탄식 속에서도, 갚을 것이 전혀 없는 빈털터리에게 한없이 인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고귀한 ‘은혜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무능력한 우리는 은혜를 따라 새 힘을 얻어, 억눌림을 당해도 짓눌리지 않고 답답한 일에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사람이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오직 그 은혜 안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한다(고후 4:8~10).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힘써 옛사람과 싸우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간다(요 8:11).
성경은 이러한 유일한 구속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는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슬픔을 많이 맛보고 병고(病苦)를 아는 사람이다. 마치 사람들이 외면하는 자같이 그가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방황하여 각기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그에게 넘겨 씌우셨다. (사 53:3~6, 바른 성경),
우리가 아는 것은,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언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어 이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어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자신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롬 3:19~26, 바른 성경)
이렇듯, ‘오직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은혜만을 믿고 의뢰한다는 뜻으로 사용해야 한다. 비록 뻔뻔한 사람들에게 얼토당토않게 오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 따라서 여전히 자신에게 선한 무엇을 기대하면서 의뢰하는 자가 외치는 ‘오직 예수’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말들은 요란한 꽹과리 소리처럼 공허하고 시끄러울 따름이다.
1-2. 구속의 적용 범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위대한 구속 사역은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해주신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한다. 구속의 ‘근거’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그 구속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통로’는 오직 믿음인 것이다.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위대한 일에 참여하게 된다.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따라서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좀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관한 올바른 지식 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믿으려면 먼저 그 대상을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위대한 구속 사역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통해 당신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계시해주셨다. 따라서 사람이 진정으로 정직하게 자연 만물을 대하기만 한다면, 스스로 깨우침을 얻어 장차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의 실재와 그분의 영광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다해 그분을 간절히 찾고 바라게끔 된다(롬 1:19,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풍성한 계시를 젖혀두시고―다시 말해 그렇게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것들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을 완전히 접으시고―사람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대신하는 대속의 사역을 홀로 계획하고 실행하실 정도로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시 53:2~4). 만물보다도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자연 계시에 풍성하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렘 17:9).
심지어 그 부패한 마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 죄를 합리화하면서 하나님을 미워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복음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이와 같다(롬 1:32).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모든 악함을 인내하시면서,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심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오늘도 변함없이 온 세상 만물을 통해 증거해주신다(롬 9:22; 행 14:17).
따라서 구원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똑같이 주어져 있으며,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연 계시를 따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고 그분을 찾으며 구하는 데 이르는 일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두가 그 길을 따라 그리스도를 찾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시기에, 그 영광을 증거하는 일을 단 하루도 게을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자기 죄를 따라 더욱 불의한 길을 가게 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그 간절한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마 22:3).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진노의 심판이 그들을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게 하기까지 기꺼이 그렇게 한다(롬 1:19).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이 세상에 특별하게 작용하여 멸망으로 치닫는 그들 중 일부를 건져낸다. 즉,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은혜가 죽어 마땅한 자가 자기 죄로 멸망하는 일을 마냥 기뻐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멸망시키는 대신 온전히 당신의 자비에 근거한 은혜의 언약을 홀로 제정하시고 일부 사람에게 주권적으로 수여하신다.
그 일방적인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죄로 죽은 사람의 마음은 다시 살아나 비로소 그리스도를 찾고 믿기 시작하게 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먼저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께 주권적으로 이끌어주셔야만 한다(요 6:65).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타락한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그렇다면 왜 일부만 그리해주시는가? 같은 죄인인데 누구는 건져주시고 누구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일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자비와 관련한 일에 평등이나 선택의 공정성을 과연 논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자선가가 일부 특정한 계층만을 선별하여 도왔다고 그를 거세게 비난하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똑같이 도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누군가 자비에 관한 일에 평등이나 선택의 공정성을 논한다면, 그는 아직도 자비와 공의를 헷갈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는 아직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적으로 맞닥뜨려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과 더불어 공의가 무엇인지 논해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롬 9:22, 23)?
자비란 본질적으로 그 수혜자(受惠者)의 완전한 실패와 무능력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그냥 그렇게 실패로 끝나게 내버려둬도 지극히 정당하고 공평하다. 그러나 그렇게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가 바로 자비이고 은혜이다. 그런 호의를 누구에게는 베풀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하여 공평함의 개념, 즉 공의와 맞물려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공의로 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충분한 기회와 초청을 똑같이 받았지만 한결같이 실패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르짖어야 한다.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려고 하거나, 그 공의가 과연 정당한지 헤아려보겠다는 식의 발상을 하는 것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자비로운 선택에 따라,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 중에서 일부를 특별하게 구별하시고 가엾게 여기신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강권하신다.
다시 말해, 선포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깨우치고 구원하신다(고전 1:21, 2:4,5).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먼저 부르심을 받은 이가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다른 이에게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것과 똑같은 말씀을 다시 올바르게 풀어 가르치는 복음 전도의 사역 없이 그리스도를 알고 부르는 일은 전혀 없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만일 오늘 우리가 이 병든 사람에게 행한 선한 일, 곧 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심문을 받는 것이라면,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알아야 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너희 앞에 건강하게 서 있다. 이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시다.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이 없으니, 천하에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행 4:9~12, 바른 성경)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 성경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함이 되신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파하겠느냐? 기록된 것과 같으니,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롬 10:9~17, 바른 성경)
이렇듯, ‘오직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복음 전도를 통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일 외에는 누구도 예수를 주로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 외 다른 경로를 통한 구원을 포용하거나 추구하면서, 동시에 ‘오직 그리스도’를 외치는 자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이가 하는 말에 속아 넘어간다면, 당신 역시도 여전히 다른 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이르려는 불신자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1-3.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을 몇 마디 말로써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유의 주인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신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빌 2:5~11)? 그 영광의 고귀함 앞에서는 천사도 자기 얼굴을 가릴 뿐이며(사 6:2, 3), 영광의 면류관조차도 그 빛을 잃는다(계 4:10).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찬송하고 즐거워해도 다함이 없는 무한한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계 5:11~14).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이는, 그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조차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극히 귀한 진주를 발견한 진주 장수처럼, 또한 우리 문을 박차고 나오는 양 떼처럼 그 영광이 빛나는 곳으로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게 된다(마 13:45~46, 11:12)
그들은 그 영광만이 마음에 가득하기에, 라헬을 기다리는 야곱처럼 수고의 날들을 기쁘게 인내하며 자신의 모든 수고와 어려움을 무가치하게 여긴다(창 29:20). 그 결과, 그런 이의 삶 속에는 자기 부인과 겸손―즉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권에 돌리며 소망 중에 오래 참는 덕스러움이 깃들게 된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으로 아는 이들은 그 영광스러움이 너무도 위대하여, 그 외에 다른 무엇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경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진정 전부다.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이 존재할 여지조차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며,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 (빌 3:7~11, 바른 성경)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알아낼 수 없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주께 되돌려 받겠느냐?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나와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께로 돌아간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원한다. 아멘. (롬 11:33~36, 바른 성경)
‘오직 예수’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영광, 즉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한가를 성령의 조명 하심을 따라 밝히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그분만을 마음에 담고, 오로지 그분께 충성하는 순결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교활한 소리에는 이질감을 느끼고 피하게 된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꼴을 얻고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요 10:5).
2. 성경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이들
성경이 선포하지 않는 다른 예수를 좇는 이들은 대개 ‘예수와 다른 누구’를 함께 좇거나 ‘여러 예수’를 따른다. 또는 ‘예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참으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저들의 헛된 확신과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선포하신다(마 7:21~23). 따라서 성도는 이런 이들이 내뱉는 거짓말로부터 우리 자신과 이웃을 잘 보호하여야 한다.
2-1. 예수와 다른 누구를 함께 좇는 이들
아무런 죄의식 없이 편안하게 이런 일을 저지르며 사는 이들은 로마에 가면 너무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로마 교도(천주교인을 말함)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가 사람에게 주입되며, 그 주입된 의를 힘입어 공로를 쌓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따라 죄인을 의롭다고 단번에 선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또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힘써 공로를 더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공로를 더하지 않거나 대죄라고 규정된 큰 죄를 지으면,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 멸망에 이르게 된다. 결국,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인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 않고 사람의 노력과 행위에 있게 된다. 아무리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선행, 칠성사(七聖事), 교황에 대한 절대복종, 면죄부 등을 통해 꾸준히 공로를 쌓아야만 겨우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트렌트 공의회에서 이신칭의를 말하는 자에게 저주가 선포된 것이다.
이렇듯 로마 교도들은 앞에서는 인간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능력과 공로를 믿고 의지한다. 심지어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들에게는 잉여 공로라는 개념도 있다. 즉, 일평생 공로를 많이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는 여분의 공로를 쌓는 이(카톨릭 성자(聖者)를 말함)도 있는데, 그 여분의 공로는 로마 교회의 보고(寶庫) 안에 보관되어 있어서 사제들을 통해 분배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로를 얻기 위해 사제와 성인에게 기꺼이 자신을 의탁한다. 이렇듯, 그들은 정말로 예수도 믿고 성인의 공로, 즉 인간의 능력도 믿는다.1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은 마리아도 믿는다. 물론, 로마 교도들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마리아를 공경할 뿐이다”라고 말해왔지만, 이번에도 그 모든 것은 그냥 말에 불과하다. 실제로 저들은 마리아를 굳건하게 믿고 의지한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그저 공경하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죄 없이 태어나 살다가 숨을 거두자마자 곧바로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면, 과연 누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겠는가?
게다가 로마교 내부에서는 마리아를 이미 공동 구속주(Co-Redemptrix)로서 칭송하고 있다. 즉,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모든 수고와 희생으로 동참하여 함께 의를 이루었다면서 그녀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과연 단순한 ‘공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2 로마 교도들은 기꺼이 자기 영혼을 마리아에게 맡기고 그녀의 능력을 믿는다.
그렇게 신격화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사역을 감당한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며 자기 공로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런 이들이 과연 ‘오직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던,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왕상 18:21). 그런 이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의미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 엎드러진 육적인 이스라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그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는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해졌다. 기록된 것과 같으니,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다.”라고 하였고, 다윗도 말하기를 “그들의 식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롬 11:6~10, 바른 성경)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이 모두 구름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으며, 모세와 연합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고, 다 같은 영적인 음식을 먹었으며, 다 같이 영적인 음료를 마셨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고 있는 영적인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하였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처럼 우리가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처럼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마라. 기록되기를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 뛰놀았다.” 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으니, 우리는 그들처럼 간음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불평하다가 멸망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처럼 불평하지 마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이 본보기기 되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경고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여라. (고전 10:1~12)
이처럼 이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그러니 정말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이르기 전에 어서 그곳을 탈출하라.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르는 순결한 성도가 되도록 하라.
2-2. 여러 예수를 좇는 이들
여러 예수를 좇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삶의 모범으로만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말하는 삶의 모범이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한 자기 부인과 희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고서, 그분의 죽음은 단지 모두가 따라야 하는 자기 희생의 모범일 뿐이라고 여긴다.
즉,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하는 선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촉진하기 위해 예수께서 친히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교훈을 전심으로 따르며 사는 이들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이루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나사렛 예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어도 좋고 꾸며낸 이야기여도 별로 상관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나타난 자기 희생과 같은 도덕적 교훈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3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든지 여러 명일 수 있다. 나사렛 예수여도 되고, 부처여도 되며, 무함마드여도 상관없다. 심지어 효녀 심청이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오직 도덕적 교훈과 모범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이자 모형이 되고 만다. 그렇게 여러 예수를 좇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다양한’ 모형 안에 계시하신 구원의 길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면 누구든지 넉넉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게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찾지 않고, 죄에 물든 자기의 도덕적 이상 속에서 통합하는 것이다(시 14:2, 3). 그러므로 이들에게 구원은 결국 도덕적인 자기완성이며, 역사의 주인공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범우주적인 그리스도가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이 아닌, 토속 신앙과 문화를 교회가 더욱 진흥하고 격려해줄 당위성을 주장하게 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여라. 많은 이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며 많은 이들을 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 24:4, 5, 바른 성경)
그리고 많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많은 이들을 속일 것이다. 또한 불법이 성행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 나라의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 24:11~14, 바른 성경)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여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라고 말하여도 믿지 마라. 번개가 동쪽에서 치면 서쪽에까지 번쩍이듯이 인자의 오심도 그러할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 그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 (마 24:23~28, 바른 성경)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시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입에 달고 산다는 이름난 목회자가 이런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화평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갈 1:6~9)? 여러 예수를 좇는 이들에게 성도가 해야 할 말은 화평과 연합이 아니다. 오직 회개하기를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선포해야 할 따름이다.
2-3. 세상 영화(榮華)를 사랑하는 이들
세상 영화는 본질적으로 초점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다.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통해 업적을 쌓고, 그것을 이룬 자기를 보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며 즐거워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일 뿐이다(요일 2:16).
이는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서, 자신을 높이고 뽐내며 육체가 원하는 쾌락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세상의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또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의 죄와 그 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추악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만물이 소리 높여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해도, 그보다 더욱 자기를 높이는 타락한 마음은 결국 하나님을 자기 시야에서 가려버린다. 그 결과,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고 만다. 이러한 자아도취적인 영광을 사랑하는 이는 절대로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던가? 예수님께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려고 능력을 과시하셨던가? 만일 그러셨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실 이유가 전혀 없다(마 4:5~7). 빵을 마음에 두고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이들에게, 당신은 대속과 부활이라는 영적인 양식을 주는 자라고 하셔서, 그들이 큰 실망 속에 돌아가게 하실 이유도 전혀 없다(요 6:26, 27). 사람의 마음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자비롭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랑하든지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의 영광을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도 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군가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면, 먼저 앉아서 자기가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을 가지고 있는지 계산해보지 않겠느냐? 그가 기초만 놓고 그것을 완공하지 못하면,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였구나.’라고 할 것이다. 또는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대적해 오는 자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보지 않겠느냐? 만일 그럴 수 없으면, 아직 그가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위한 조건들을 요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3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묻기를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네가 계명들을 알고 있으니,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마라, 속여 취하지 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라는 계명들이다.” 그가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제가 이 모든 것들을 소년 시절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그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으니,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다. 그가 이 말씀에 우울한 얼굴로 근심하며 떠났으니, 그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재산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하시니, (막 10:17~23)
자기를 사랑하는 죄악으로부터 전심으로 돌이켜,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와 세상을 함께 소유하려는 곳에 이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복 신앙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을 가장 주의하고 멀리해야 한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얻고자 소망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지, 이 땅의 영광이나 일신상의 문제 해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기
‘오직 그리스도’의 함의는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방대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가장 필수적이고 시급한 부분만을 아주 간략하게 다룬 것일 뿐이다.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하면, 겨우 터 파기를 마친 것 정도밖에는 안 된다. 여기에 바닥을 다지고 철골 구조물을 세우며 시멘트를 부어 굳힌 다음, 창을 달고 벽돌을 입혀야 한다.
그러나 겨우 터 파기를 마친 이 정도에도, ‘오직 그리스도’를 마르고 닳도록 외치는 복음주의자들 중 많은 이가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 공허한 소리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고 가지 않도록, 우리는 매사를 주의하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철학과 헛된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를 따르는 데서 완전히 벗어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골 2:8~10).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외식하는 자가 받을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각주
1 로레인 뵈트너,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Roman Catholicism)』, 이송훈 옮김, CLC, 2014, p. 353~355
2 위의 책, p. 214
3 J. G.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황영철 옮김, 복 있는 사람, 2013, p. 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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