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 요동하는 세상
김재호
1. 격동의 한복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난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지역은 요동하는 세상의 한가운데 놓여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원주민인 인디언과의 갈등과 그들을 뒤에서 돕는 프랑스와의 험악한 관계뿐만 아니라, 17세기에 확립된 근대주의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18세기였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언덕 위의 도시를 꿈꾸며 대서양을 건넜던 청교도 1세대들이 무대 뒤로 퇴장하자, 후세대들은 세속화되고 느슨해져서 형식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조나단 자신은 뉴잉글랜드의 학생들에게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동료 학생들 대다수가 신학을 공부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시끄러운 패거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보다 못한 하버드의 상황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 소박한 치마는 초창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대표적인 옷이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화려한 부의 과시를 개탄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청교도 유산을 물려받은 3대, 4대 후손들 중 많은 이들이 옛 신앙의 형식적인 교리에는 여전히 동의하면서도, 금욕적인 외양을 버리고 영국의 유행 – 그 유행이 화려한 것이든 이상한 것이든 상관없이 – 을 따르고 있었다.」1
에드워즈가 살던 시대는 결코 편안한 시대가 아니었다. 요동하는 국제 정세의 불안과 세속 학문의 거침없는 도전, 그리고 참된 경건의 쇠퇴가 겹쳐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러한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조용히 예비해두고 계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진리 안에서 보호를 받도록 하셨다.
2. 인디언과 프랑스의 위협
원래 청교도와 인디언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남부 버지니아에 먼저 세워진 제임스 타운이 처참한 실패와 죽음으로 점철된 것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급변한 환경, 풍토병과 굶주림을 비롯하여, 원주민의 자연스러운 반감과 경계심에 의한 무력 충돌은 이주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원주민과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이주민의 생존율은 올라간다. 척박한 현지에 적응할 때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싸우다 죽는 숫자까지 함께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록 크고 작은 긴장과 충돌은 있기는 했지만, 청교도 1세대는 주변 원주민들과 우호 관계를 전반적으로 잘 유지했다. 그러나 정착한 뒤 55년이 흐른 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필립 왕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이 전쟁을 계기로, 인디언들은 영국과 앙숙인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주민을 공격하고 위협하는 집단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 이주민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관계를 잘못 맺은 것이다. 1675~1676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필립 왕의 전쟁은 평화로운 관계와 성공적인 선교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과 함께 끝이 났다. 생존한 인디언 가운데 많은 사람이 프랑스 군대와 – 더욱 좋지 않은 것은 – 카톨릭 예수회 선교회에 들어갔다.」2
1704년, 인디언과 프랑스 군대는 인구가 300명가량 되는 디어필드라는 도시를 습격하여, 주민의 1/10가량을 학살하고 1/3가량을 포로로 잡아갔다. ‘디어필드 대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게다가 프랑스는 ‘짐이 곧 국가’라는 말로 유명한 루이 14세의 중앙집권체제 아래 전성기를 맞이하여, 여러 국제 문제에 개입하고 카톨릭 인사들을 꾸준히 지원했다.
그 결과, 에드워즈가 태어날 즈음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두 번이나 맞붙어 전쟁을 벌였다. 이렇듯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은 최악의 경우 인디언-프랑스 세력에 넘어가 카톨릭화 될 수도 있었다.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디어필드의 경우처럼 수많은 이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하는 습격이 또 일어나지는 않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3
3. 근대주의(계몽주의)의 도전
▲『프린키피아』 출처: (cc) Daniele Pugliesi at commons.wikimedia.org
문예 부흥운동(르네상스)을 주도한 인문주의자들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재현이었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해석과 지도를 거부하고 그리스 고전들을 직접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개혁 세력 정도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합리적인 정신을 통해 부패와 편견과 무지에 떨어진 당시 사회를 구해내려고 했다. 이후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베이컨, 로크, 데카르트 등을 거치면서 이 운동은 보다 분명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다가, 아이작 뉴턴에 이르러 정점을 맞는다.
뉴턴은 1687년 『프린키피아』에서 세상을 수학적으로 이해하고 예측하며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세상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불리는 고전역학의 확립 그 자체보다는, 그 일을 이룩하며 사용한 방법론에 더 주목하였다. 세속 지성인들은 그가 사용한 연구방법론을 모든 분야에 적용하여 참된 실재에 다가가려고 했고, 이 혁명을 통해 인류와 세상이 온전해지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 그것을 막아보려는 초기 근대주의자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 점차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성의 의미변화를 이끈 원동력은 대개 종교적인 것이었으나 과학에서 이성의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성의 형식논리의 방법론에서 자연과학의 방법론까지 변화시켰고, 이성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 이성의 의미변화는 우리가 자연세계에 대해 배우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신은 자신의 창조를 위해 자연법칙을 자유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그 법칙은 실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어떤 논리적 논증도 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입증할 수는 없었다. 이로서 17세기에 실험은 자연에 대한 ‘이성적’ 접근방법의 일부가 되었다. … 대체로 계몽주의는 이성을 완전한 지성의 개념에서 자연법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4
근대주의의 연구 방법론은 모든 역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교리의 추방과 폐기를 함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교리는 청교도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굳게 의지하는 교리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근대주의가 이룩한 눈부신 업적에 대항하는, 더 온전하면서도 통합적인 지식체계를 내놓을 것을 요구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함의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근대주의를 배우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4.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
청교도 1세대의 경건과 열정이 수그러들자, 교회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부모 세대에서는 대부분 회심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났었기에, 하나님의 언약적 부르심에 따라 유아세례를 베푸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 세대와 같지 않았다. 교회는 회심했다는 증거를 아직 분명하게 나타내지 못한 청교도 2세대들에게서 태어난 3세대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할지 말지 어려움을 느꼈다. 또한, 2, 3세대가 그 상태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도 답을 내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였던 솔로몬 스토다드는, 중도 언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2, 3세대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성찬이 은혜의 방편이므로, 중도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이 성찬에 참여함을 통해 회심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과 거부도 존재했다. 에드워즈 테일러, 인크리스∙코튼 매더 부자,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등은 스토다드의 노선이 사실상 감독∙주교제로의 복귀를 선언한 것과 다름없으며, 스토다드는 그 국교회의 수장 노릇을 하는 회중 교회의 교황이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하고 비꼬기도 했다.5
「이것은 배교입니다.
당신을 장로교라는 장막에 가두어버리는
(그것은 기껏해야 감독 제도일 뿐)…….
참으로 사악한 죄인들조차 버젓이
(신조를 고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성찬에 환영 받고 있습니다.」6
대다수 목회자들이 솔로몬 스토다드의 견해를 지지했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계속 신중하게 세례와 성찬이 시행되었다. 이는 당시 목회자들이 교리적인 입장을 정할 때, 온전히 성경적이기보다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요인들에 더 영향을 받았음을 잘 보여준다.7
그리고 그 작은 결정 하나가 훗날 에드워즈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각주
1 조지 마스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 (A Short Life of Jonathan Edwards)』, 정상윤 옮김, 복 있는 사람, 2009, pp. 22~23.
2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37.
3 위의 책, p. 63.
4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양유성 옮김, 글항아리, 2011, pp. 17, 20.
5 조지, M. 마즈던, 앞의 책, pp. 60~63.
6 위의 책, p. 63.
7 위의 책, 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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