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1) 학문과 신앙
김재호
신앙과 학문의 관계 정립의 어려움
학문이란 무엇이고 신앙이란 무엇일까? 둘은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을까? 신앙이 있으면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일까? 신학 박사는 다 신앙이 깊고 넓은 것일까? 우리는 분명 둘 다를 아니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깊이 있고 굳건한 신앙과 폭넓고 체계적인 지식을 함께 소유해야 한다고 거의 ‘본성적으로’ 답할 것이다. 맞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는 답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부분에 들어서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쪽을 추구하다 저쪽에 손해를 입고 저쪽을 추구하다 이쪽에 손상을 가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한쪽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쪽을 아예 ‘부정’해버리는 일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자칫하면 둘 다 붕괴할지 몰라 우선 피하고 보려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 답을 몰라 어려움을 겪지만, 이 문제는 조금 다르다. 이 경우, 답이 아니라 ‘방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고 헤맨다.
우리가 신학에 접근하는 태도만 살펴봐도 이 어려움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학이라는 말 자체에 내포되어 있듯, 신학은 분명 하나의 ‘학문’이다.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 심화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명백하게 사람의 ‘이성’이 사용된다.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사람은 어떤 존재고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지 등의 주제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체계를 세운다. 이 내용은 여기 해당하고 저 내용은 저기 해당하며, 그 내용은 이런 뜻과 맥락이고 저런 사실과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정리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숙고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신학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일반 학문처럼 가르치고 배우며 연구하고 심화할 수 있다. 그래서 신학은 말하는 법, 강조점, 함의, 뉘앙스 등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 다르다. 추론능력이 뛰어난 사람의 신학은 모든 주제를 통합하여 다루는데 뛰어나고, 활용능력이 뛰어난 사람의 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다. 이는 각 사람의 ‘이성’이 가진 능력의 크기와 개성이 신학이라는 최종 결과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학은 분명히 ‘학문’이다.
그래서인지 신학을 그냥 수많은 학설 중의 하나 정도로 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들에게 신학은 그저 이론일 뿐이다. ‘너는 그러그러하게 정리했지만 나는 이러이러하게 정리했다.’ 수천 가지의 관점과 이론 중에 내 것 하나, 또는 남의 것 하나가 더해진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들은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되곤 한다.
“아, 너는 그런 결론에 이르렀고 그 이론을 택했느냐? 잘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고 이 이론을 택했다.”
신학을 이렇게 대하는 태도가 힘을 얻으면,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르고 만다.
‘아, 신학이란 그냥 이성적 산물이고 각자의 견해일 뿐이구나. 신학은 신학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또 다른 얘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신학보다는 삶의 모양에 더 집중하게 된다. 뭔가 좋아 보이고 종교적이며 선해 보이는 모습만 나타나면 서로를 인정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진다. 본질적이고 중대한 상반 점들이 있어도, ‘우리는 다른 길을 통해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한 형제’라는 말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 그들에게 신학은 신학일 뿐이다. 신학은 새롭게 개발해내면 그만이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는 이러한 태도가 우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학은 ‘우선 젖혀두고’ 각자의 영성을 계발하고 고취하며 서로 연합하고 존중하는데 더 열심을 보인다. 그 결과, 뭔가 좀 고상해 보이면 거기엔 다 성령님께서 계신다고 하게 된다. 신학이 좀 ‘다르면’ 어떤가? 우리는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한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가? 성령님께서 이렇듯 저들을 받아들이셨거늘, 모자란 인간의 이성으로 어찌 가부를 따질 수 있겠는가? 왜 지극히 자유로운 성령님을 유한한 인간 이성의 좁은 상자 속에 가두려고 하는가?
그러나 이 말이 갖는 함의는 엄청나다. 이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모든 경계선의 실질적인 무효화를 뜻한다. 심지어 종교의 경계선이 무너져도, 그에 관해 옳고 그름을 말할 토대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 중에 일부는 ‘반드시’ 무너진 경계를 넘어 우상의 얼굴에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는데 이른다. 무당의 입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며 환희에 차는 어처구니없는 이가 ‘꼭’ 나온다.
누군가는 내가 지나친 비약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내용은 조금도 비약이 아니다. 신학을 하나의 ‘지적인 정리 결과물’ 또는 ‘수많은 학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내포된 의미를 끝까지 따라갈 때 나타나는 실제 결과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 엄청난 지점에 이르기 전에 이유 없이도 ‘멈추어 선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다. 멈추어 설 이유를 도무지 발견하지 못하겠다며 담대하게 넘어가는 이가 나오게 되어있다.
이처럼 신학은 분명히 학문이지만 단순한 지적 산물이나 정리된 체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신학과 신앙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한쪽이 세움을 입으면 다른 쪽도 세움을 입는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무너지게 된다. 신학 없는 신앙은 소경이고 신앙 없는 신학은 이론에 불과하다. 둘 다 죽은 시체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위와 같은 늪지에 말려들어 가지 않게 될까? 어떻게 해야 양쪽을 온전하게 세워가고 보존할 수 있을까? 어려워 보이지만 답은 뜻밖에 간단하다. 학문과 신앙이 기능하는 ‘방식’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접근하면 된다.
신앙과 학문의 근본요인
학문과 신앙에는 각자를 기능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하나씩 존재한다. 우선 학문은 ‘전제’가 그 요인이다. “전제 없는 학문은 없다.” 이 말은 학문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깨우친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유명한 경구다. 학문이 아주 사소한 가설 하나라도 공식적인 이론으로 성립시키려고 하면, 그 모든 것을 떠받드는 전제가 그 순간 왕좌에 오르게 된다. 물론 그 왕은 해당 학문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된다.
이 사실을 실제 사례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지질학은 찰스 라이엘의 ‘동일과정의 원리(principle of uniformitarianism)’ 위에 세워져 있다. 라이엘이 제시한 이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과거의 환경이 어떠했는가를 추론할 때, 현재의 환경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바닷가에 모래가 쌓여 하나의 퇴적층을 이루는데 몇 천 년이 걸리는데, 새롭게 발견된 단층은 이런 층이 수십 개다. 그러면 이 지층의 나이는 몇 만 년이 된다. 그 연수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동일과정이라는 ‘전제’다.
이렇듯 한 학문이 성립되고 기능하려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전제가 존재한다. 전제가 없다면 학문도 없으며, 사용한 전제의 옳고 그름에 따라 해당 학문 전체의 타당성이 좌우된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지질학의 경우, 지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동안 항상 변함없는 방식으로 유지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지구가 ‘동일한 과정’ 위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 입증해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현대 지질학에게 그 일은 ‘사망선고’와 맞먹는다. 과거 지구에 ‘대격변’이 있었고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미래에 다시 격변이 올 수 있다는 격변설의 ‘전제’가 진정 사실이라면, 현대 지질학을 주장하는 수많은 책은 라면 냄비 받침 정도의 의미밖에 남지 않게 된다. 학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이처럼 학문에게 전제란 체스 경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왕’과 같다. 그가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된다면 해당 학문은 ‘체크 메이트’가 걸렸다고 봐야 한다. 온전하게 방어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경기는 종료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학문이든지 그 학문 전체를 다스리는 ‘왕’인 전제를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역량에 따라 해당 학문이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경우, 그 학문을 떠받드는 전제가 완전히 허황되고 잘못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일정 수준의 타당성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시골 군소 제후 정도밖에 안 되는 역량을 지닌 전제들이 자기 분수를 넘어 ‘왕의 왕’, 즉 절대 전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른 영역으로 군사를 일으켜 침공해가는 일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전제’라는 단어에 내포된 것처럼, 전제에는 다 궁극적인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다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두가 바라는 그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학문의 세계에서도 각자 소유한 힘을 이리저리 겨루면서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리된다. 진 쪽은 이긴 쪽의 신하가 된다.
물론 진다고 해도 이긴 쪽이 보장해준 자기 영지 안에서는 여전히 ‘왕’과 같다. 그러나 예전 같지는 않다. 이긴 쪽이 설정한 정책을 받들고 순종해야 하며, 다른 나라와 전쟁이 일어날 때 이긴 쪽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야 할 의무가 부여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긴 쪽을 향한 반역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며, 다시 한 번 왕좌를 놓고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 결과, 서열이 유지되거나 재정립되기도 한다.
일반 학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가 요구한 왕의 왕에 해당하는 면모를 잘 갖추어 학계를 평정한 수많은 열왕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열왕들은 자기 시대에는 딱 한 명이다. 그러나 역사 전체를 펼쳐놓는 순간 여러 명이 되어버린다. 전제는 궁극적인 속성 때문에 왕의 왕을 꼭 가려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 전체를 놓고 학문을 개괄하려고 하는 순간, 시간 전체를 아우르며 모든 학문들을 알맞게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초월 전제’의 실존과 마주하게 된다.
이 초월 전제는, 시간 안에서 어떤 전제가 왕의 왕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지지고 볶다 결국,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것까지도 자기 신하로 부리는 절대 주권자의 면모를 지닌다. 즉, 모든 전제들의 신이다. 전제들의 궁극성은 바로 이 초월 전제의 절대 주권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 초월 전제야말로, 모든 학문이 존재하고 성립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주인공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전제들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그 자리에 앉은 절대 주권자는 영원 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 자리를 비운 일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절대 왕권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학문에서 전제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다가 해를 입는 경우는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실수가 잦기 때문에 항상 주의하고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고 학문에 접근하는 것과 모르고 접근하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크다. 전자는 피해를 덜 받으며, 받더라도 회복이 빠르다. 그러나 후자는 헤어나오기 쉽지 않으며 심하면 지성 자체를 포기하고 폐기하려는데 이르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책을 보고 무엇을 연구하든지, 위에서 언급한 전제의 특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학문에 접근할 때, 학문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최대한 누리면서 동시에 피해도 줄일 수 있다.
이제 신앙을 살펴보자. 여러분은 어떤 대상을 왜 믿는가? 무엇 때문에 믿게 되었는가? 물론 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요인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신앙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남녀관계나 가족관계 등에서도 아주 쉽게 발견된다. 연인들은 서로 사랑한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 결과, 모든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가 잘못을 범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말하게 되곤 한다. “내 너를 믿었건만…….” 우리가 진정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려면, 사랑의 속성과 합치되는 무언가가 반드시 그 대상에게 존재해야만 한다.
이쯤 해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시스템만 믿어요.”라고 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나 자신만 믿어요.”라고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사실 위에서 서술한 모든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시스템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가? 분명 전자는 어떤 편벽이나 팔이 안으로 굽는 일을 사전에 예방하는 객관성과 공정함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는 타인의 뜻대로 살지 않고 어떤 배신이나 이용당하지 않으려는 삶의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이미 ‘사랑’이 작용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당신은 모든 이가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는 일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당신은 사람이 자기 인격을 따라 각자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영위하는 일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권한 남용으로 기회 자체를 상실하게 하는 차별을 ‘미워한다’. 자기 뜻과 의지를 억지로 강요하고 위에서 명령하는 것을 ‘미워한다’.
이런 당신에게 ‘시스템’과 ‘나 자신’이야말로 사랑할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기꺼이 시스템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다. 더하여 시스템을 통해 사회가 더 평등하고 공정해지기를 꿈꾸며,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써 각자의 개성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이 이룩되기를 소망하게 된다. 이렇듯 믿음, 소망, 사랑은 각자 따로 활동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연합체이며 하나다. 무엇을 사랑하면 그것을 믿게 되고 믿으면 꿈꾸게 된다. 사랑이 믿음을 낳고 믿음이 장성하여 소망을 이룬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알고 보면 이 질문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사랑은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자족적이어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모든 이유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부모가 베풀어준 사랑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왜 자기 자녀를 돌봐야 하는가? 사랑으로 낳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왜 부모 자식 사이에 존재하여 둘 사이를 끈끈하게 연결해주어야 하는가? 이유가 없다. 마땅히 그래야 할 뿐이다.
우리의 이성이 ‘사랑’에게 존재 이유와 다른 어떤 근거를 요구하면, 사랑은 자신에게 회귀하며 답변한다. 사랑은 자족적이어서 자신을 벗어나고 초월하는 행동을 본성상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이성의 활동조차도 사랑의 도움을 입어야만 비로소 인격적일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랑을 전제하지 않는 이성은 결국 기계 신호로 전락할 뿐이다. 이렇듯 사랑은 스스로 모든 것의 정점에 선다. 모든 것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무엇에도 판단 받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의 근본요인이 사랑임을 기억한다면, 왜 신앙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망을 가져다주면서도 그 무엇에도 판단 받기를 거절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본래 속성이 신앙 안에서 자연스럽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참 신앙에는 사랑에 근거한 절대 권위를 가진 대상이 ‘반드시’ 하나 존재하게 된다. 모든 일이 다 그에게서 말미암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를 벗어나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심히 불경하고 역겹고 화나는 일이 된다. 이렇듯 신앙은 어떤 인격에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사랑을 따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참된 신앙과 학문
자, 드디어 학문과 신앙이 만나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이 조성되었다. 이성을 사용하는 학문은 시간조차도 넘어서 있는 초월적 절대 주권자 노릇을 할 유일한 전제를 반드시 요구한다. 사랑이 낳은 아들인 신앙은 스스로 빛을 내어 모든 것들에 관한 완전한 이유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이 사랑이시며 시간조차도 그에게 의지하는 유일한 절대 주권자의 실재를 통해서만, 양쪽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절대 주권자는 누구일까? 여러분이 잘 아는 바대로,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참 신학이란 무엇이고 참 신앙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이성이 요구하는 유일한 초월 전제를 제공해주는 일을 뜻한다. 그분의 사랑과 실재하심이 인격 속에서 완전한 권위가 되어, 우리 이성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도할 때, 우리는 참된 신학, 또는 학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분의 실재를 의심하거나 그분 이상의 근거를 요구하는 일은 심히 어리석고 불경한 것이 된다. 참 사랑이신 그분을 의뢰하지 않고 자기 지혜를 신뢰하는 일은 가장 미련한 일이 된다. 그런 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며 말씀하신 분의 권위를 믿고 의지하며 높인다. 여호와를 참되게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가 소유한 모든 지식과 지혜의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토대가 된다. 결국, 그는 모든 죄와 미련함이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초이성적인 토대에서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이런 토대 위에서 특정 학문에 접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랍게도 해당 학문의 모든 것을 깨우치는 일이 일어난다. 이는 교만한 말이나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위와 같은 접근방식이 정말 제대로 구사된다면, 우리의 이해는 본질상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즉, 특정 학문의 토대와 발전 과정 및 미래의 최종 상태를 비롯하여, 현재 우리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유익과 해악까지 모두 다 포괄하여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이 제대로 구사된다면 반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럴 여지를 아예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다른 전제를 사용하는 모든 군소 제후와 왕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물론 이런 일은 사람의 부족함을 고려하지 않은 하나의 이상이다. 실제 삶에서는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상당히 근접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실패도 있고 반론과 난점에 온전하게 답을 못하는 일도 많다. 그래도 다른 방식보다 본질상 우월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신학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존재하는 모든 신학을 포괄적이고 통합적으로 평가하며 이해할 수 있다. 어디까지가 강조점이고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으며, 누구는 온유함으로 기다려줘야 하고, 누구는 잘못된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어 경고해줘야 하며, 누구는 심하게 잘못되어 떼어내어야 하는지를 아주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이 늘어난 만큼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고 사랑하는 삶의 깊이와 넓이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우리는 학문과 신앙 모두를 온전하게 함양해야 한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다른 ‘접근방식’을 택할 수는 없다. 또한, 이 방식을 온전하게 구사하기 위해 많이 연습하며 인내하라. 숙련도가 늘고 경험이 쌓일수록, 학문과 신앙 양쪽 모두가 온전하게 세워져 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도가 되어, 그분의 영광스러우심을 널리 증거하는 복된 자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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