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걸러내기」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자유주의의 실체 (상)
이종현
1. 서론
“자유주의 신학은 주일학교 교사용 교재, 강단, 종교 언론 등을 통해 기독교 근본을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다.”1
–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구(舊) 프린스턴 정통 신학자 J. G. 메이첸2
90년 전 미국 교계는 자유주의 신학의 커다란 위협 아래 놓여있었다. 교회와 교단을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인사들이 하나씩 주도하기 시작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메이첸은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경고하며 정통 신학을 고수하는데 헌신했다.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통해, 자유주의 신학이 말하는 기독교는 정통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설파한다.
이 글은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일련의 주장과 그 허구성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우선,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이며, 그러한 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어, 교리에 대한 태도, 신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의 5가지 주제로 크게 나누어 자유주의 신학이 믿는 바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허구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온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현실 속에 처해있던 메이첸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제언(提言)을 소개하려고 한다.
2. 자유주의 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 새로운 기독교, 다른 기독교, 기독교 아닌 기독교
자유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자유주의 신학의 활동반경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과격한 자유주의도 있고 온건한 자유주의도 있다. 성경의 완전 무오,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 기적의 초자연적 능력 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도 있고, 성경을 신화나 무용담으로 여기는 자유주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배제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자유주의도 존재한다. 심지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자유주의도 있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기독교는 통일된 규칙이나 정연한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시대의 흐름과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며 믿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4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메이첸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메이첸에게 자유주의 신학은 한 마디로 ‘새로운 기독교’다. 기독교의 용어를 차용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온 종교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정통 기독교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다.5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사실상 포기한 현대의 비구속적(非救贖的)인 종교다. 문제는 그들이 실체를 감추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용어를 차용하여 자기를 변호한다는 것이다. 타종교인 이슬람이나 불교보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 양 가장하지만, 실상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무지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던 중세 시대가 지나고 개인의 자유와 이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조차도 이성이라는 잣대로 연구하고 비평하기 시작했다. 소위 고등비평이라고 부르는 연구방식이었다. 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적인 사고의 신장은, 사람들이 성경을 더욱 회의적으로 보게 했다.
특히,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창조와 종말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한 칸트의 지식론은, 초자연성과 신성에 대한 회의를 부추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와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 사이에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과 과학의 언어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함으로써 이 틈을 좁힐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언어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새롭게 진술하려고 했다.6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및 부활, 그를 통한 구속)에 대한 과학의 반박이 있을 수 있음을 수용하면서, 그 안에서 종교의 보편적인 원리를 건져내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동일한 종교의 원리가 특정 시대에 맞게 각기 상징화되어 나온다고 생각하고, 이 원리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특성을 이룬다고 주장한다.7
4.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4-1. 교리에 관하여
– 반(反)교리적인 사상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정통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비구속적인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19세기 신학자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종교는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며, 종교의 핵심은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닌 감정이고, 종교인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메이첸은 교리와 관련한 자유주의자의 총체적인 주장을 소개한다.
“가르침(교리)은 중요하지 않다. 신조들은 동일한 신앙적 경험을 시대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이며, 동일한 경험을 표현하는 한 모든 신조는 좋은 것이다. 우리의 가르침 역시 동일한 경험상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가르침이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교리)에서 멀리 있을지라도 그 근본은 같다.”8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조(또는 교리)에 대한 진술은 틀렸다. 신조(교리)는 단순히 기독교의 신앙 경험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경험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경험의 기초가 되는 사실은 기독교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참된 기독교는 고려 왕조, 조선 왕조, 대한민국처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한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어느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벌어진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기점으로 기독교가 생겨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행적은 수많은 기록을 통해 훌륭하게 보존되었다(신약 성경의 무수한 사본들). 역사적인 기독교에 관하여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변호하였다.
“초기 기독교 운동은 현대적 의미를 지닌 삶의 방식으로써 도입된 것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에 근거한 삶의 방식이었다. 기독교는 어떤 사실(사건)에 대한 설명, 즉 교리에 근거한 것이다.”9
따라서 교리를 뺀 기독교는 절대로 온전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기독교 자체가 교리에서부터, 즉 어떤 사실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백의 체계인 교리를 부정한다거나 필요 없다고 한다면━심지어 그것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약화한다면━그것이야말로 기독교 전체를 포기하는 전초전이 되고 말 것이다.
4-2. 하나님에 관하여
-반(反)교리적 성향, 보편적 부성(父性)에 대한 강조, 범신론적 경향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반(反)교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갖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정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도덕적인 요구도 있을 수 없다.
순수한 느낌은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독교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관계에는 관계를 맺은 대상을 아는 지식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독교의 기초 그 자체다.10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 되심이 기독교의 총체적인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성이라는 현대 교리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철저하게 구원받은 선민에게만 국한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4~45)
자유주의 교리를 뒷받침할 때 자주 사용되는 이 구절은 결코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성을 말하지 않는다.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악인과 선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이 구절의 핵심은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가 되시지 않고, 특정 사람들만 자기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이다.11
자녀로 삼으신 이들은 자기들의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이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구절로 보편적인 부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이 일으키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이 세계를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우리는 웅장한 진행 과정의 한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의 진행 과정 전체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구별된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자체이고, 우리는 그 일부분이다.
결국, 복음서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은 최고 상태에 이른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한 사건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인격의 구별을 없애려는 이러한 시도는 결국 범신론적인 경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범신론은 기독교 신앙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다. 하나님의 인격을 부정하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하며, 심지어는 인간의 죄를 이 세계의 일부이자 하나님의 일부로까지 간주하도록 한다. 이 사상은 정통 기독교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는 하나님에 관한 반(反)교리적 태도, 보편적 부성에 대한 강조, 범신론적 경향은 결국 기독교를 점점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게 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특수한 곳에서만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곳에서 똑같이 역사하시는 보편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역사하실 때,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역사하고 계셔야만 한다. 그들은 선교의 물결이 들어가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곳에서 역사하고 계셨다고 변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전도지에 존재하던 토착 신앙이 믿는 대상, 다시 말해 우상이 하나님의 다른 이름을 보여준다는 기괴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부처도 이름만 다르지 결국 하나님이요, 알라도 하나님이라고 여기게끔 된다. 그렇게 하나님은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보편적인 사랑을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명백한 종교 다원주의다. 자유주의 신학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종교 다원주의의 뿌리가 된 것도,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왜곡된 신론의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4-3. 인간에 관하여
-인간의 내적 선함에 대한 허망한 열망
자유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인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에 기초한 설교가 죄책과 형벌로부터 구원으로 나아가는데 주안점을 둔다면,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설교에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강한 확신에 강조점을 둔다. 메이첸은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여러분은 매우 선합니다. 여러분은 사회의 안녕을 추구하는 모든 호소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특별히 예수의 생애 속에서━우리는 여러분처럼 선한 사람들에게조차 선하게 보일 정도로 선한 어떤 것을 발견합니다.”12
메이첸은 인간 안에 있는 선함에 대한 낙관적 경향을 ‘이교주의’라고 명명했다. 이교주의란 현존하는 인간의 능력을 건강하고 조화로우며 즐겁게 발전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인생관이다.13 그런 의미에서 이교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선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을 변호하는 이들은 때때로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너무 강조하는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알아가는 신학을 추구해야 한다. 신학은 사실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신학은 인간학이다.”14 그들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 및 형제애가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그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고,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소망이 있다.
기독교가 죄책으로 인한 절망에서 시작한다면, 이교주의는 낙관에 찬 희망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끝은 정반대다. 절망에서 시작한 기독교인은 마지막에 영원한 빛을 보지만, 낙관으로 가득한 이교주의자의 말로에는 영원한 어둠과 화염이 기다리고 있다.
복음주의권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 2월 19일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지(誌)는 “복음주의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새로운 모델로서 하나님의 진노, 원죄와 실행죄(자범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법정적 칭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다.”라고 보도했다.15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자유주의의 실체 (하) 에서 이어집니다.
각주
1. J. G.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황영철 옮김, 복있는 사람, 2013, p. 50.
2. J. G. Machen(1881~1937)
3. 1929년, 장로교 최후의 보루인 프린스턴 대학마저 마침내 자유주의에 넘어가자, 메이첸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게 되어버린 미국북장로회(PCUSA)를 떠나 정통장로교회(OPC)를 세웠다.
4. http://cafe.naver.com/thebandofpuritans/45086
5. 『기독교와 자유주의』, p. 35.
6. 존 스토트·데이비드 에드워즈, 『복음주의자가 자유주의에 답하다(Essentials : a liberal-evangelical dialogue)』, 김일우 옮김, 포이에마, 2010, p. 64.
7. 『기독교와 자유주의』, pp. 39~40.
8. Ibid, pp. 51~52.
9. Ibid, p. 55.
10. Ibid, p. 95.
11. Ibid, p. 102.
12. Ibid, pp. 110~111.
13. Ibid, p. 108.
14. 이 내용은 필자가 배웠던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적인 경향이다. 실제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저서를 출간한 교수도 있다. 그 교수의 전공은 종교철학이다.
15. 밴드오브퓨리탄스 카페, <낙관적인 인간관>,
「거짓 걸러내기」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자유주의의 실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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