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 죄의 참담함
김재호
「세상의 황폐한 광야를 두루 다니다가 어떤 곳에 이르니 거기에는 굴이 있었다. 나는 그 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집에서 떨어진 어떤 장소에 서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던 그는 이윽고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슬픈 목소리로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다.」1
천성을 향한 크리스천의 위대한 여정은 예기치 않게 시작된다. 그는 그 일을 계획하지도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 여정 때문에 설레거나 들뜨지도 않았다. 단지 어떤 책 한 권을 펴서 읽었을 뿐이었으나 그것이 위대한 여정의 첫 발걸음이 되었다.
크리스천은 그 책을 읽으며 심히 근심하고 떨며 울었다. 슬픔이 그의 마음을 덮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과 두려움, 절망이 몰려와 그를 어디론가 내몰아갔다. 누가 이 첫걸음만 보고 영광의 여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새벽이 가장 가깝도록 하신다.
본문에서 말하는 책이란 바로 성경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경’이라는 책을 사용하신다.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시는 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써 그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주신다. 그 빛을 받게 되면 이전에는 없었던 영적인 감각이 생겨난다. 그로 인해 생애 처음으로 자기 실상을 보고, 그 참담함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며 괴로워하게 된다. 자신의 죄와 부패로 인해 멸망이 사자처럼 달려들고 있음을 비로소 ‘맛본다’. 쓰디쓴 괴로움 때문에 비틀거리며 진지하게 살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진지함’은 자연인들이 보이는 진중한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영적인 빛에 의해 마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새로운 성향을 말한다. 그 성향이 자신의 모든 것, 즉 전 인격과 생애를 기꺼이 걸고 참 생명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게 하는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나를 발견할 것이다.” (잠 8:17)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마음에 거룩함을 향한 열망과 영적인 지각을 불러일으키신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죄의 종’이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다. ‘자녀’가 아니며 ‘살아 숨 쉬는’ 상태가 아니다. 종과 시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거듭나는 일’이 있어야만 한다. 거듭나는 일은 자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죽은 시체 같은 자처럼 비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자각의 세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분명히 실제로 존재한다. 죄를 영적으로 깨닫는 일이 없으면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도 없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죄 때문에 애통해 하기를 기대한다.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듣는 이들의 부패한 민 낯을 그대로 드러내 주셔서 듣는 자들이 온 맘을 다해 살길을 찾아 떠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온 맘을 다해 살길을 찾아 떠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는 일은 오직 성령님께서 홀로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인간적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멈춘다.
어리석게도,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 지혜로 사람들을 낚아 올리려고 한다. 쾌적한 시설, 마음의 위로, 물질 축복과 건강, 자녀의 출세, 인문학적 지혜와 지식, 먹을거리 등등으로 거듭나지 않은 죄인의 육신적 성향을 자극하여 마음을 얻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 천성에는 이렇게 좋고 즐거운 일들이 많으니 어서 그리로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이런 권면을 들은 이들은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는 정반대로 마치 내일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처럼 꿈에 부푼다.
물론 ‘죄’에 대한 이야기도 듣기는 한다. 그러나 헛된 희망으로 한껏 부푼 마음에 그 소리들은 말 귀에 스치는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그냥 떠난다. 결국,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육신적 성향을 여과 없이 ‘누리는 삶’을 기독교적인 삶으로 여기게 되고 만다. 그들은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전혀 구분 못 하는 소경이다.
이런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마 23:15)
“나의 말과 나의 선포는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한 것이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고전 2:4,5)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편에 사람의 지혜를 첨가하는 일은 성령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다. 효율성을 높여 더 많은 이들이 결신하게 만들겠다고 나설수록 성령님은 탄식하신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안에 양의 탈을 쓴 늑대와 이리들이 바글바글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사람이 이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을 옮기는 일은 분명히 기쁘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왜 그 일을 하는가?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성령 안에서’ 진정 깨달았는가? 그 결과가 멸망임을 알고 그 비참함과 두려움을 ‘영적으로’ 감지하는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정말로 무의미하다는 완전한 자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에게 주시는 첫 마음은 바로 그러한 마음이다. 장밋빛 환상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살기 위해 생전 꿈꿔본 적도 없는 험난한 길로 발버둥 치며 나아간다. 그 걸음은 그리스도께 닿기까지 멈추지 못한다. 성령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그 영혼에 빛을 비추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걸음은 잠시 비틀거릴 것이지만 결국 영광스럽게 결실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구원받을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눅 13:3)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 14:26)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자 감추어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마 13:44)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처럼 당신을 찾는 자들을 즐거이 맞아주신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히 나뉘어 나타날 실로 무서운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지금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부디 전자이기를 참으로 바란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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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귀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재호 형제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옆에서 응원하고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힘 내십시요.
감사합니다.
항상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안부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