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대한민국 진단2」 주사파(主思派)는 어떻게 생겨났고 그 영향력은 어떠한가
김재호
▲ 청와대를 장악한 주사파 전대협의 문제점을 지적한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출처: TVCHOSUN 뉴스 캡처>
만약, ‘주사파’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면, 십중팔구는 8,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사람일 것이다. 그는 화염병, 돌멩이, 최루탄이라는 말도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8, 90년대 대학가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했던 세력이 바로 ‘주사파’이기 때문이다.
그때 대학을 다니지 않았는데도 그 말들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 정권의 실세가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는데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1. ‘주사파’를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주사파’는 8, 90년대 대학가에서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主體思想)1을 따르던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본인이 대학교에 다닌 2000년대 초반에는 ‘한 주에 학교를 네 번 나오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때 활발하게 활동한 주사파는 ‘주사파(主思派)’가 아니라 ‘주사파(週四派)’였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8,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학생 운동의 여파가 아직 대학 문화 속에 남아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한총련 주도로 반미(反美)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집회에 호응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눈 뜨고 보기 민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반미자주(反美自主) 선전, 선동 구호는 너무도 이질적이었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8, 90년대에는 농촌 활동, 소위 ‘농활’이 참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외된 농촌을 돕고 살리자면서 방학 때마다 시골로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농활은 순수한 농촌 봉사 활동이 아니었다. 농촌 사회를 의식화해서 사회주의 세력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한 정치 활동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대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참여하는 학생이 없어서 일정을 취소하는 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랬던 만큼,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대부분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 나온 온라인 게임을 하며 놀기 바빠서 정치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냥 한나라당은 구태의연한 수구꼴통당이라는 정서에 편승하여 함께 욕하며 낄낄거리는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그런 정서와 대학 문화가 없었다면, 훗날 “나는 꼼수다”와 같은 팟캐스트 방송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취업 문이 계속 좁아지면서 그냥 입사에 필요한 자격 요건이나 잘 갖춰놓자는 기조가 차츰 대학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한 시대 상황과 문화 속에서 자라난 청년 대학생에게 ‘주사파’가 한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들려주면 어떨까? 분명히, 너무도 당혹해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다. 마치 보수 우파 국민들이, 안철수 전 의원이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똑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얘, 또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듣고 와서 헛소리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주면 ‘박근혜 광신도’ 취급을 받을 게 확실하다.
그만큼, 현재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주사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별 관심도 없다. 그들은 그저 현실의 어려움을 기성세대 탓으로 돌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발언에 동조하며 열광할 뿐이다. 그들을 가르치고 설득하여 진실에 눈뜨게 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들에게는 ‘사람 사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주사파가 꿈꾸던 변종 공산주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비상식적인 광풍’을 조성하는 색깔론자라고만 치부하며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그런 대한민국 국민 덕분에, 주사파는 오늘도 마음껏 대한민국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2. 주사파와 학생 운동
모두가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부모들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 하지만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기 일쑤였다. 선후배가 어울려 먹고 마시는 대학 문화가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대학을 나와도 갈 만한 기업이 없었던 점도 크게 한몫했다. 60년대 들어서 독일 광부 파견이 이루어졌을 때, 수많은 대졸자가 학력을 속여서라도 광부가 되려고 했던 점은 당시 현실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처지에 놓여 있던 대학생들에게,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와 제국주의 세력에 들러붙은 기회주의자들을 타도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사상은 엄청난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더구나 어떻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도 이미 일제 시대 때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일제와 대결하던 소련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제가 패망할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사상범의 수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2 또한, 우리의 민족 정서에는 이상적인 도덕 공동체를 지향하는 유교 사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미 군정이 해방 직후인 1946년 8월 13일에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공산, 사회주의를 원하는 이들이 77%에 달했던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3 이는 국민 절대다수가 자유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급하게 나라가 세워졌다는 뜻이다.4 공산, 사회주의는 그러한 사상적 공백 지대를 파고들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대학은 줄곧 좌익 사상의 온상이자 모판이었다.
그 결과, 6, 70년대의 학생 운동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황이 많이 바뀐다. 변종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나 기존 학생 운동 조직과 단체를 하나둘 접수해 나갔다. 그래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운동권 인사의 70~80%가 주사파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5 다시 말해, 소위 ‘386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전부 주사파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했던 김철홍 교수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주사파가 약진한 이유를 주사파의 혁명 전략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즉, 공산주의 기본 혁명 전략은 폭력으로 정부를 뒤엎는 것인데, 학생들이 광주 사태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민중 봉기로는 그런 일을 이루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自覺)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시민들이 일어나 무기고를 탈취한다고 해도, 과연 잘 훈련된 정규군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그것도 못 한다면, 어떻게 미제의 항공모함을 당해낼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공산혁명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북쪽에 있는 힘, 곧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군사정권과 미제에 맞서는 방법밖에 없다는 주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6
연세대학교에 다닐 때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던 이동호 씨는,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그는 학생 운동 진영은 논리 싸움에 진다고 해서 곧바로 승복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사파가 그렇게 급속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한의 남파 간첩이 내려와 통일혁명당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7 다시 말해, 그때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감대와 함께 북한 당국이 운동권 조직과 단체를 접수하는 공작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386 운동권 인사들은 태생적으로 친북, 종북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운동권을 떠나 학교, 언론, 시민단체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8 그렇게 학생 운동권을 손에 넣은 북한은 대한민국 안에서 민주화 투쟁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이때, 대학가에서는 보도블록을 깨는 법, 화염병 제조, 쇠파이프를 다루는 법 등이 체계적으로 가르쳐졌다. 운동권 학생들의 입에서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만세’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소득이 3,000달러 선에 이르렀다. 많은 정치 학자들은 국민 소득이 대략 3,000달러 수준에 이르면 국민들이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된다고 본다.9 그렇게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이미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폭넓게 퍼져 있었기에, 인민 민주주의를 꿈꾸며 북한 지령을 받드는 주사파 운동권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다.
장년층은 그들이 돌과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 때, 참으로 청년다운 양심과 패기와 용기가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알게 모르게 감쌌다. 그러다 나중에는 결국 거리 시위까지 참여해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라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데 이르게 되었다.
3. ‘민주화’의 그늘과 자유 대한민국의 위기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그로 인해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 운동권 인사들이 자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종북 세력으로 분류되지 않고, 민주화 투사로 자리매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 고위직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을 종북 인사라고 비판하며 위험성을 제기하는 일은 독재, 파쇼 정권의 탄압과 근거 없는 흑색선전, 선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상은 그들이 자기 입으로 탄압을 받는다고 말하는 게 바로 공산주의 선전, 선동이었는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민주화를 이뤄낸 공로를 인정받아 언론, 법조, 사법, 행정 등의 요직에 대거 진출했고, 국회에 입성한 이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김일성의 머릿속에서는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십중팔구는 조국 통일(적화 통일)의 날이 성큼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은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으니, 막연히 그들도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를 꿈꾸지 않았다면, 그게 어떻게 청년이겠느냐?”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대답을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공산주의, 정확히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실체와 속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북한은 김씨 숭배 사상으로 전 인민을 억누르고 감시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이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소련을 위해 일했던 휘태커 챔버스는, 스탈린의 만행(蠻行)이 드러나자 공산주의를 버리고 전향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산주의자는 전향(轉向)하면 반드시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하여 전향하는 것이다. 싸우기 싫으면 전향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10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엄청난 거짓말을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거짓 선전, 선동에 능하기 때문이다.11
또한, 김철홍 교수는 공산주의 이념은 역사, 정치, 경제, 문화를 모두 통합해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준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개종과 매우 유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초월의 세계를 만나는 경험, 곧 회심했기 때문에 계속 공산주의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했다고 했다.12
이처럼, 공산주의자는 공산 이념을 압도하는 다른 사상이나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그의 헛된 망상(妄想)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실체를 감추고, 뒤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활발하게 벌인다.
그래서 공산주의자가 전향했다는 증거는 단순한 공개 전향서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는 투사가 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그토록 믿고 따랐던 이념이 사상 최악의 이념이었음을 깊이 깨닫고, 사람들이 더는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건져내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사람만이 정말로 전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8,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운동권 인사 중에서 현재, 공산주의와 적극적으로 싸우는 행보를 보이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답은 “거의 없다.”이다.
최근, 이런 일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일이 국정감사(國政監査)에서 나타났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은, 임종석 비서실장에게 주사파 전대협 인사들이 장악한 청와대 비서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들이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13
그러자 임종석 비서실장은, 전희경 의원이 말한 인사들 대부분이 8, 90년대 독재 정권에 목숨 걸고 항거한 민주화 투사들이었다면서 자기는 인생을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며 그런 게 질의냐고 반문하면서, 질문의 핵심인 전향 여부는 끝까지 답변하지 않았다.14
앞서 말한 휘태커 챔버스가 제시한 기준을 고려하면, 그들이 아직도 북한을 조국(祖國)으로 여기고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라.”라는 레닌의 말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자기를 민주화 투사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어,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선전, 선동으로 거대한 촛불을 일으켜 공권력을 손에 넣는 일까지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할 공권력은, 자유 대한민국의 기초를 차례차례 파괴하는 무기로 변화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외친 사회 정의 구현이 적폐 청산이 아니라 인민 재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이 말한 민주화의 실상이 혁명 과업의 이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평화를 외치던 베트남 총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베트남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보트 피플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동안 교수는 청와대 비서진의 35%와 민주당 의원의 절반 가까운 57명이 운동권 출신이라면서 그들이 전향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밝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15 지금 이 상태로 내년 지방선거와 개헌(改憲)이 함께 이루어지면, 자유 대한민국은 정말로 영원히 침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자유 대한민국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번성했던 기독교인들은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 강요를 넘어서는 탄압을 받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원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더구나 최악의 김일성 숭배국가인 북한은 더더욱 그러하다.
부디, 부족한 이 글을 읽고 기독교인들만이라도 빨리 정신을 차리기 바란다. 추미애 대표가 헨리 조지를 인용하면서 거리낌 없이 토지 국유화를 말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자유 대한민국의 위기와 민주화의 그늘은, 곧 기독교 신앙과 자유의 위기이다. 교회와 기독교인은 말씀과 기도로 공산 주사파 세력과 맹렬하게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할 자유와 권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4. 마무리하며
지금 자유 대한민국은 표류하고 있으며 교회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그러는 사이, 주사파 혁명가들이 민주화 투사로 위장하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만약, 미국이 우리의 동맹국이자 패권국(霸權國)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북한에 흡수되어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국민은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또한, 기독교인은 자기 자녀의 영혼과 교회를 잘 세우고 지켜야 할 고귀한 소명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성도들은 주사파가 무엇이며, 그들이 지금 어떤 활동을 벌이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의 궤계가 무너져서 성도들이 평안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한다(딤전 2:1, 2).
각주
1 주체사상이 어떤 사상인지는 「북한은 왜 기독교를 핍박하는가」라는 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2 김용삼, 『대구 10월 폭동/제주 4·3사건/여·순 반란사건』, 백년동안, 2017, p. 20.
3 같은 책, p, 53.
4 박주연 기자, 김범수 편집인, 「세상엔 공짜가 없다, 우파는 대가 치르고 있는 것」, 미래한국, 2017. 7. 17.
5 김철홍, 「[김철홍의 좌파 탈출기]-대통령 탄핵 대한민국은 이미 내전상태」, 미디어펜, 2017. 2. 22.
6 같은 글.
7 안동데일리 편집국, 「촛불시위의 실체와 배후는 주사파다」, 안동데일리, 2017. 11. 19.
8 김철홍, 같은 글.
9 하종대, 「중국도 민주화 홍역 치를까」, 주간동아, 2008. 1. 15.
10 조갑제, 「공산주의자가 轉向(전향)하였다는 증거는」, 조갑제닷컴, 2017. 11. 02.
11 김용삼, 같은 책, p. 38.
12 김철홍, 같은 글.
13 조갑제닷컴, 「국정감사장에서 벌어진 전희경-임종석 주사파(主思派) 논쟁」, 조갑제닷컴, 2017. 12. 07.
14 같은 글.
15 양동안, 「[양동안의 새論새評] 운동권 정권의 사상적 정체」, 매일신문, 2017.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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