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3)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김재호
▲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철제 감옥 속에 갇혀 있는 한 사람
「크리스천: “이 무시무시한 절망의 감방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까?
그 남자: “예, 이제는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크리스천: “왜요?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은 매우 인자하시지 않습니까?
그 남자: “나는 내 자신의 정욕을 위해 그를 새로운 십자가에 다시 한 번 못 박은 죄인입니다(히 6:6). 나는 그분의 인격을 경멸했고(눅 19:14), 그분의 의로우심마저도 경멸했습니다. 또한 그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였습니다(히 6:4~6, 10:28~29).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모든 언약으로부터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림으로써 결국 모든 은총을 잃고 버림받게 되었고,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맹수가 나를 집어삼킬 듯한 위협, 확실한 심판과 원소로서 나를 태워 죽일 듯한 가혹한 분노의 위협과 두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1
“은혜와 긍휼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만큼 극악무도한 죄가 있을까?”
이 질문은 의도와 초점이 무엇이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를 다 덮기에는 부족함과 모자람이 있느냐는 취지였다면, 답은 “아니다.” 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와 긍휼을 악용하며 모독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벌하실 것이냐는 뜻이었다면, 답은 “그렇다.” 이다.
하지만 많은 이가 ‘성령훼방죄(성령모독죄 혹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불리는 이 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지극히 부분적인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엄청난 결론을 너무 쉽게 내버린다. 다시 타오를 불씨가 충분히 살아있는데도 스스로 불씨를 헤집어 꺼뜨린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을 감히 스스로 제한하려다가 멸망에 이른다.
한편, 죄를 마음 한쪽 구석에 여전히 남겨두고 즐기면서 ‘이런 죄인인 나를 용납하고 사랑해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가증함 속에서 사는 이도 있다. 그들은 그 일이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가장 욕되게 하며, 성령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장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입으로만 회개하는 위선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로 잘못 믿어서 멸망에 이른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에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유다가 예수께서 정죄당하시는 것을 보고서, 스스로 뉘우치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 은전 삼십 개를 도로 갖다 주며 말하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아넘김으로써 죄를 지었소.” 하니, 그들이 말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아서 하여라.” 그러자 유다가 그 은전들을 성전에 던져 버리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마 27:3~5, 바른 성경).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조심하여라.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라. 또한 음란한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아는 대로, 후에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축복을 갈망하였으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5~17, 바른 성경).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할 것이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이런 자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죄에 눌리고, 항상 배우기는 하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 3:5~7, 바른 성경).」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아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이들은 위에서 말한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그의 심령을 ‘실제로 끝까지’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란 없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시 35:10). 그들은 가롯 유다의 잘못된 선택을 정말로 깊이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때라도 돌이켜 예수님을 찾아갔다면, 예수님께서는 두말하지 않으시고 그를 받아주셨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들 눈에는 정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양심은 그런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가장 아파하고 못 견뎌 한다(시 6:6, 7). 그런 분께 누가 되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신음을 토하며 괴로워한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겨우 세 살배기 꼬마라고 해도 기꺼이 무릎 꿇고 배울 용의가 있을 정도로 간절하게 거룩함을 사모한다. 그가 받은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서 자기를 무한히 내어드리기 원하는 마음이 ‘정말로 끝없이’ 생겨난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다. 또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소망할 것이다(마 12:19~21, 바른 성경).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이가 확신하며 말하기를 “확실히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으니, 그가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하면서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곧 닭이 울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눅 22:59~62, 바른 성경).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하겠느냐?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누가 정죄하겠느냐?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살리심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나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 기록된 것과 같으니, “우리가 종일 주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며, 도살될 양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롬 8:33~37, 바른 성경).」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짓는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하는 죄를 짓고 넘어진다고 해도, 곧 다시 일어난다. 울고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간다(마 26:74). 하루에 일곱 번 같은 죄를 짓고 넘어져도 일곱 번 다시 일어나 주님께 계속 나아간다(눅 14:7).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자기중심적으로 이용하던 이들은 엎드러질 때,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것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한 당황스러움, 두려움, 혼란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점점 영원한 좌절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가다가, 결국 제풀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만다(잠 24:16).
그러니 그런 무서운 일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인지 미리 점검해봐야 한다. 심히 위급한 상황에서 한없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영원한 생명줄을 믿음으로 붙들어 건짐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절벽에 매달렸을 때야 비로소 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오직 무저갱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리라는 사실만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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