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3) 타락한 사람의 본성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마태복음 15장 19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아멘. 우리는 지금 소요리문답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을 전체적으로 강해하고 듣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렇게 교리문답 전체를 강해하려고 하면, 신자들은 대체로 그런 시간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지루해합니다.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목회자가 듣는 이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세세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쉽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교리문답을 강해하려고 하니, 다소 미흡하게 여겨지는 측면이 엿보이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살펴볼 소요리문답 17, 18문은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가르쳐줍니다. 19세기 중반, 서구에서는 산업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사람의 본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낙관적인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진보하고 발달하니, 세상은 계속 좋아질 것이다. 지금처럼 더 좋은 교육, 더 진보한 지식이 사람에게 계속 제공된다면, 야만스럽게 서로 싸우고 다투며 굶주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자유 사상가로 불리던 이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했지만, 그 영향을 받은 신학자와 목회자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곧 신세계(新世界)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모든 사회·문화·언론 활동은 그 기대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문들은 장차 올 좋은 세상, 즉 완전히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글을 앞다투어 발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때까지 일어난 전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기관총은 순식간에 수많은 젊은이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들을 불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그동안 유럽 사회를 들뜨게 했던 장밋빛 환상을 깨뜨려버렸습니다. 교육과 예술과 문화와 과학이 그렇게 진보했는데도, 결국 엄청난 참사가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는 일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유럽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붙들고 살아온 그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발달한 무기로 인해 훨씬 끔찍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원자폭탄 투하(投下)는 그런 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깊은 절망과 비관적인 견해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그토록 천대하고 멸시했던 기독교의 전적 타락 교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정하려는 움직임도 조금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인본주의와 자연주의(自然主義) 사상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계속 거리를 둔 채, 소망 없는 이 세상 것에 빠져 사는 삶을 고수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짧지만, 문제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근원이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철학자, 과학자, 교수, 사회학자들이 외적인 요인을 거론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외쳐댑니까? 또,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제도와 법을 고치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며, 훌륭한 대학과 연구소를 세워 학문을 발전시키고, 공장을 세워 좋은 물건을 많이 만들어 내면서 사람들 스스로 좋은 생각과 기대를 하도록 인도하면 사람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이건만, 세상 사람들은 한 세기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 교훈의 의미를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사람의 근본 문제는 마음, 곧 본성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지식과 환경을 마련해줘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외에는 사람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교도 모든 문제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가르치기는 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만사에 마음을 좋게 가지라고 할 뿐, 그 마음이 어떻게 타락해 있으며 어떻게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불교는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하지만, 사람의 영혼이 죄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결국, 불교의 가르침은 시체를 잘 단장하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시체에는 백약(百藥)이 무효합니다. 그 어떤 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향수를 뿌리며 곱게 화장을 해놓아도 시체가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 외에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책은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만이라도 이 사실을 세상에 힘껏 증거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합니다.
설교자는 원래 회중이 마음으로 온갖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탐심, 거짓말,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죄를 저질렀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 죄로 인해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죄의 악함을 일깨우고 깨우쳐 통회하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돌아갑니다. 한 주간 마음으로 온갖 죄를 저지르고 온 죄인에게 “당신은 잘될 것입니다.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헛된 환상을 심어주기에 바쁩니다. 과연, 그런 설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마저 이런 형편이니, 대체 어디에서 사람의 심령이 타락해있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가르치겠습니까? 또, 누가 그 사실을 참으로 깨달아 알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높아진 자기 마음을 따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의 말씀을 멸시하는 악한 본성을 지닌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증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육 방법이 발전하고, 지식수준이 높아지며, 문화가 발달해도 타락한 마음 상태는 변하지 않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나면 마음이 겸손해져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처럼 외적인 요인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항상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초점을 두면서 사람의 악함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이방 종교와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이 죄로 죽었다는 사실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기에, 죄인에게 마음을 좋고 편안하게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그런 이유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으며, 당신의 원수를 향한 그분의 거룩한 진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까지 쉼 없이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며, 이 사실을 증거하며 믿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이 위대한 진리를 외면한 세상의 문제 해결 방식은 모두 실패했고, 지금도 실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실패할 것입니다. 실제로 외적인 큰 성공을 이룬 재벌가에서는 비극적인 일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토록 많이 배우고 교양을 잘 갖추었으며 물질적으로도 풍부한 그들이 내적인 빈곤과 우울증, 정신적 허약함에 시달리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외면한 채, 외적인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결국 그러한 비극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죄로 타락한 마음을 다른 것으로 달래고 채우며 연명(延命)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의 시대를 주도한 독일 철학자 중에 자살을 예찬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의 타락하고 뒤틀린 본성이 자기 파멸을 원하고 추구할 때, 그들의 고상한 지식과 풍부한 물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파멸을 미화하고 수월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타락한 자기 본성을 해결할 만한 어떤 수단이나 능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고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학자는 “지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라져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주장은 분명히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일말의 진실도 담겨 있습니다. 사실, 개, 돼지, 사자, 호랑이 따위가 이 세상을 죄와 악으로 물들이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망가지고 부서져 몸살을 앓습니다.
교회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깨끗하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와 복음의 목적과 존재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타락한 죄인을 의롭게 하는 곳이지, 그들을 다독이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커피를 나눠주며 이웃을 섬기는 사회봉사기관도, CCM의 열기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무도회장도 아닙니다. 오직 타락한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중요한 사역은 뒤로 제쳐놓은 채 엉뚱한 일에 힘을 기울인다면, 어떻게 그 교회를 우리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겉모습, 즉 십자가도 걸어놓고 설교도 하고 찬송도 부르는 모습을 갖춰놓았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교회를 실제로 움직이고 다스리는 정신과 원리가 타락한 사람의 본성을 다루지 않는 이방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그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도, 타락한 본성과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소망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룬다고 해도, 그 마지막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악인과 죄인에게 아주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대합니다. 마치 “내가 생각하는 거룩함은 이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이러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렇게 신앙 생활하지 마십시오. 그런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이 타락한 자기 본성을 따라 짓는 죄는 하나님의 추궁과 형벌을 불러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정부, 법, 윤리, 도덕 등을 통해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억눌러 주십니다. 비록 이런 것들이 타락한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완화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완화 방편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턱대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잠시 증상을 완화하여 연명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문제의 실상을 깨닫고, 유일한 해결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어 새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이 중요한 일을 잘 감당하는 것보다도 문화 사역에 더 열을 올리는 잘못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물론, 문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그런 일을 하는 거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르쳐 일깨우는 문화가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행여 그런 문화가 있다고 해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세상 사람들이 과연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문화 사역은 세상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활동이 아닌, 교인들을 죄로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화 사역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90년도 초반에서부터 지금까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던 저도 어느덧 4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문화를 점령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낳은 실제 결과는 세상의 복음화가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문화 사역의 바람이 일기 전의 설교와 그 이후의 설교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합니까? 요즘에 죄인의 심령을 상하게 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한다고 꾸짖고 책망하는 설교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같이 죄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그저 부드럽고 좋은 말로 감싸고 위로하는 이들만 넘쳐나지 않습니까? 마치, 어린이에게 칭찬만 해주는 게 좋은 교육 방식이라고 여겼던 미국의 교육학자들처럼 가르치는 설교자들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미국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 아이에게 칭찬만 해주는 것을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에 이르러 그러한 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은 일정한 범위에서 규제하고 통제하며, 잘못을 혼내야 올바르게 자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일반 교육 방식에도 꾸짖고 책망하는 일이 꼭 필요한데, 하물며 하나님 백성을 목양하는 일이겠습니까? 교인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려면 무조건 어르고 달래며 위로만 해줘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악한 일을 책망하고 꾸짖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로 고통받고 지친 이들이 교회에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죄는 우리 영혼의 눈을 가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볼 수 없게 방해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공자나 맹자가 말한 차원 높은 인격을 달성하기 위한 수양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까? 공자나 맹자는 분명히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철학을 논하고 실천한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진 일도 없고, 설령 진다고 해도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약 기독교에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기독교는 여타 이방 종교와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명확하게 가르쳐 알게 하지 않는 종교는 절대로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읽고 위로를 얻어 편안한 마음 상태가 되라고 성경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마음을 위로하여 기분을 좋게 해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커다란 못이 박혔고, 채찍질로 뜯겨나간 살점 사이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시려고 그런 끔찍한 공연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불경한 생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참혹한 일을 당하신 것입니까? 그런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은 타락한 본성과 그 본성을 따라 짓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은 사람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하겠습니까? 또, 그런 형벌을 앞둔 사람이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윤리·도덕적으로 탁월하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며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겉보기에는 그런 삶이 참 대단하고 좋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타락한 본성의 문제가 그런 방식으로도 해결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썩은 구정물과 악취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족족 거대한 시궁창과 무덤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여러분, 오물과 해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멋지게 살아가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여력이 있다면 우선 집을 지을 만한 터부터 제대로 잡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3장 27,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다 함께 읽어볼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아멘.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이 말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천주교도입니다. 여러분, 천주교도가 겉으로 얼마나 선하고 올바르게 보입니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성자이며 선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고, 온갖 공로의 효능을 믿고 의지하는 천주교도의 실상은 가장 악랄한 위선자이며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범죄자입니다. 그 아름다운 겉모습 뒤에 감춰진 속사람의 모습은 자기를 사랑하는 죄로 썩어 문드러져 있습니다. 한 꺼풀만 벗겨내면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속을 뒤집어놓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그들의 실상입니다.
이처럼 타락한 본성과 그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만 믿고 의뢰하지 않는 모든 종교와 가르침은 결국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외식과 불법에 빠뜨려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깊은 구렁텅이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일을 이루고 수많은 사람의 찬사와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는 마치 희미한 촛불이 사그라지듯 깜빡이다 결국, 끝없는 어둠과 고독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맙니다. 그것이 “겉으로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던 이들”의 결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내 속사람을 살피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본성이 우리 사고와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조엘 오스틴처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과 태도를 보이면 절대로 안 됩니다. 『잘 되는 나』와 같은 책을 보면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죄로 여기는 악한 길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까? 죄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까?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어떠했습니까? 선지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악한 길로 가는 것을 책망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조엘 오스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이 부정적이 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잘못을 수없이 저지르고 계신 꼴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마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 것처럼 믿고 가르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항상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이 오류에 빠지면 만사를 좋게만 보게 되어, 날 선 검같이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경고하는 바도 그냥 ‘좋은 말’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는 죄로 썩어가는 부분을 예리하게 도려내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날카로운 하나님 말씀도 그들 손에 쥐어지면, 날이 심각하게 무뎌져서 무 한 조각 자르기조차 어렵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죄로 부패한 부분을 말끔하게 제거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시도했다가는 생살이 뜯기고 저며지는 사고가 날 것이 분명한데, 누가 그 일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 덮고 넘어가기만 하면, 나중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조그만 종기가 거대한 암 덩이로 자라 있지 않겠습니까? 서구 사회에서 100년 이상 사람의 본성을 낙관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세계대전과 대규모 인명 살상이 아닙니까? 끝 모를 미움과 광기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지 않았습니까? 겉보기에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계속 낙관적으로 보고 대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언제 거듭납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입니다. 자신의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어떠한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자기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사람들처럼 그럴싸하게 겉모습을 꾸밀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둠과 고독과 절망이 가득한 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연극 무대가 아닙니다. 연극 무대에서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사기꾼이요, 위선자일 뿐입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열심히 교회에 충성, 봉사하면서 그런 자기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지옥의 안방에 자기 처소를 마련한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죄악으로 똘똘 뭉친 괴물 같은 우리 본성이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고삐를 죄어야 합니다. 말씀의 울타리 안에 머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락한 본성은 우리 생각과 정서와 행동을 지배하여, 우리를 짐승처럼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온갖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 버리게 할 것입니다.
『잘 되는 나』와 같은 책을 멀리하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분명한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하십시오. 이런 것을 가까이할수록 사람은 타락한 본성의 실체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속사람이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일이 계속 줄어들게 됩니다.
여러분, 1년 365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고 예배드리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사람의 본성에 대해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타락한 본성을 부인하고 죽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기도함으로써 정욕을 이겨내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에 힘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 일이 바로 여러분이 한 주간 살아가면서 힘써야 하는 일입니다.
이번 한 주 내내 이러한 일에 승리하여 타락한 본성에 휘둘리지 않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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