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진화론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과학과 진화론 진단2」 진화론과 타락한 인류의 교만함
양승훈
「위아래를 뒤바꾸는 자여,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길 수 있으며 지음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만든 자를 향해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말할 수 있겠느냐? 혹은 그릇이 그 만든 자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사 29:16)」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다윈이 뿌린 조그마한 거짓의 겨자씨는 엄청나게 자라나서 사회, 경제, 문화, 인류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지배하더니, 마침내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장차 이 세상이 나아갈 방향과 목적까지 제시하는 열매를 맺었다. 진화론은 인문학·철학·문화와 같은 신하를 거느리고, 이제 신(神)의 자리마저 차지하려고 꾀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Jullian Huxley, 1887~1975)는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100주년 기념학술대회(1959)에서 “다윈의 이론은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의 저서 『진화론의 문제』(Issues in Evolution)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이론이 아니고 사실이다. 진화론을 부인하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1
이러한 진화론이 저들의 주장처럼 정말 진리의 왕좌에 올라 온갖 사회적 가치와 굳게 결합하게 되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의 섭리와 영광,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로서 사람에게 있는 존귀함 모두가 이 세상에서 제거되는 끔찍한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화론만큼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치명적인 사상은 없다.
이처럼 진화론은 기독교의 강력한 대적자이지만, 그 기본 개념은 의외로 단순하다. 태초에 우연이 있었으며, 그 우연은 단순한 생명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수십 억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자연의 선택을 받으며 점점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걸러내는 ‘거대한 체’와 같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다. 진화론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진화는 선두 그룹에 드는 극소수 생명체만이 자연 선택이라는 좁은 체를 통과하여 자기 유전 형질을 후대에 전하는 실로 무자비하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2
오늘날 이러한 진화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 대신 ‘다양성’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기는 했다. 하지만 적자생존 없이는 진화를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흐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진화론은 실험과 검증을 할 수 없는 가설(假說)에 불과하며, 과학적 사실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 진화론은 과학의 진보와 발전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수정, 심지어 폐기처분까지도 될 수 있는 잠정적인 이론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진화론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진리에 버금갈 정도의 큰 신뢰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과학에 대한 일반 대중의 선입견과 무지 때문일 것이다. 일반 사람은 실험과학과 비(非)실험과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이해하지 못한 채, 과학이라면 다 객관적이고 정직하며 일관성이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변치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 이론은 시대정신과 온갖 이념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고 발전하며 제동도 걸린다. 특히, 실험을 통한 검증이 불가능한 비실험과학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더구나 대중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소위 ‘지식인’이라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정직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더는 과학을 자기 신념과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지렛대처럼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실험과학의 어떤 사상이나 이론이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산만하며 조잡하고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해도, 자기 신념을 따라 기꺼이 모자란 부분을 덮고 사회적 권위라는 달콤한 크림을 발라놓는다. 그래서 대중이 그 이론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지난 역사에서 진화론이 어떻게 특정 사회 이념과 결합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이념을 따르게 했는지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진화론이 서구 사회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오자, 많은 사회학자가 진화론에 주목했다. 그들은 진화론을 사회 이론에 접목하여 이 사회를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사회 이념이 태동하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893)는 백인종이 일구어낸 이 우월한 문명이야말로 백인종의 우월함과 그들이 이 세상의 ‘적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월한 백인종이 열등한 흑인종을 다스리는 것은 자연 선택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었다.3
이러한 사회적 다윈주의 이념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생물학 이론이 바로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을 휩쓴 우생학이었다. 다윈의 사촌이자 대표적인 우생학자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은, 지능이 떨어지는 계층이 머리가 좋은 계층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으면 인류 전체의 지적 하락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지적 도태(intellectual dysgenesis)’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국가가 인류 발전을 위해 ‘부적격자’의 출생률을 낮추고 ‘적격자’를 늘리기 위한 ‘선택적 인종 개량’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진화론은 이렇게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을 태동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온 나라와 사회가 그러한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 질서를 재편하는 일을 지지하고 따르게 하는 데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적합성, 자연 선택, 인공 선택이라는 진화론적 가치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와 부합하는 사회 이론에 지대한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1927년, 가난한 백인 여성이었던 캐리 벅(Carry Buck)은 이러한 사회 풍조가 낳은 최대의 피해자였다. 그녀는 멀쩡한 사람이었지만, 양부모의 조카에게 성폭행 당한 뒤 정신박약자로 몰려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국가가 정신박약자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시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희대의 재판을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 Homes) 판사는 이 사건을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공공의 복지가 때로 최고의 시민들의 생명을 요구할 수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중략)… 국가의 힘을 빨아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덜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저능아 출산이 3대에 걸쳐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5
그리고 이 판례는 미국에서 광범위한 강제 불임시술 시행이 적법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되었다.6
독일의 유전학자이자 인종 이론가인 에르빈 바우어(Ervin Bauer), 유진 피셔(Eugine Fischer), 프리츠 렌츠(Fritz Lenz)는 그들의 저서 『인간의 유전』에서 유전자화한 인종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우생학을 인종 위생(衛生)이라고 하며 지지했다. 1927년에 출간된 이 책은 곧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책을 자신의 유대인 대량학살 정책에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여 합리화하는 일에 사용했다.7
독일의 과학자들은 순수 ‘아리안’ 인종의 성장을 저해하는 열등 인종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해야 하며, 그들을 독일 땅에서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펼쳤다. 나치는 그들의 최신 과학 연구 성과를 환영하며, 과학 연구소를 세운 뒤 그곳에 유능한 생물학, 의학, 역사학, 정치학 교수들을 배치하여 더욱 그러한 연구 결과를 내놓게 했다. 결국, 그들이 내놓은 수많은 연구 결과에 따라 ‘페스트(병균)’와 ‘기생충’인 유대인을 나라에서 제거하는 ‘치료(Gesundung)’가 시행되어 수많은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8
이러한 만행은 유대인 제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집권 직후, ‘유전적 질환을 보유한 자손의 출생을 막기 위한 법’을 만들어 무려 30만 명에 이르는 장애인에게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 수술을 시행했으며, 1940~41년 사이에는 “건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장애인들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여섯 개의 ‘살인 센터’에서 7만 273명의 장애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러한 만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져서, 무려 20만 명 이상이 사회적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9
광기(狂氣)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이 일들은 적자생존을 주창한 진화론 과학자, 그 개념을 사회 이론에 접목하여 사람의 차별과 서열화를 역설한 지식인, 자신이 최적자이자 우월한 계층이라는 지식인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다른 이들의 멸절 계획을 열렬하게 지지한 오만한 대중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나타난 대참사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광기를 사회적 부적격자(the unfit)를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진보와 문명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 발전과 사회적 조치를 통해 인간의 본능까지도 개선하여 완전한 진보 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꾸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10
이처럼 진화론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에 정당한 과학적 권위를 제공했으며, 일반 대중은 그 권위를 믿고 의지하다가 실로 끔찍한 일에 빠져드는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을 통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는지, 여전히 과학과 진화론을 자기 구원자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고 화려한 미래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한 진화론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우리 삶을 파고들고 있다.
인류는 이제 우등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서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초인본주의) 시대를 꿈꾸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이란 진보하는 과학 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함으로써,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 등을 정복하려는 문화 운동을 말한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 세상은 누구나 영생(Super Longevity), 초지식(Super Intelligence), 슈퍼 웰빙(Super Wellbeing)을 향유하는 지상낙원이다.
쉽게 말해, 과학 기술을 통해 전지전능한 신과 같이 되어보자는 운동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인 것이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옹호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장차 ‘특이점(the singularity)’이라고 부를 만한 과학 기술 진보의 일대 변곡점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때가 되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 기술로 모든 신체·정신적 결함을 완벽히 보완하고 해결한 ‘바이오사이버네틱 포스트휴먼(biocybernetic posthuman)’이 출현하게 되리라고 전망했다.11
제2차 세계대전 때, 진화 사상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우등한 생명체를 전폭적으로 늘리는 방법으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었다. 그 시도는 정말 참혹한 실패로 돌아갔지만, 진화론은 자신의 꿈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에 굴하지 않고 생명공학을 새로운 동반자로 삼아 사람의 한계 자체를 뛰어넘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진화론은 여전히 이 세상에 ‘맞춤형 생명체’, ‘완벽한 아기’, ‘반인반기계(半人半機械)’와 같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지상낙원에 대한 환상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진화론과 세상의 진보, 인류의 완성이라는 사상은 늘 함께 활동한다. 물론, 진화론 진영 안에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기는 하다. 그들은 진화가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갖고 있지 않은 순전히 우연적이고 확률적인 과정이므로, 그와 같은 목표 지향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진화론의 실제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진화론에서 진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원래 이론이 의미하는 대로 우연과 확률만 남겨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까지 정직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연으로 시작해서 확률로 끝나는 세상은 맹목적이다. 그 어떤 의미도 가치도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허무해지고 만다. 그래서 R. C. 스프로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연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칠 힘을 지닌 그 무엇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일을 행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성’(isness)이 없다. 사실 “우연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중략)…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확률이 0%이듯이, 우연이 무언인가를 할 수 있는 확률도 0%다.」12
우연에 의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는 가치도, 목적도, 의미도 없고, 그저 소멸해갈 뿐이다. 그런 허망한 존재가 지닌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과연 신뢰할 수 있겠는가? 진화론을 만든 장본인인 찰스 다윈이 왜 “저등 동물의 머리에서 발전되어 나온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신념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또는 도대체 신뢰할 만한지에 대한 무서운 의심이 항상 제기된다. 설혹 원숭이의 머리에 어떤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원숭이의 머리에서 나온 신념을 신뢰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진화론이 함축하는 의미를 불안해했겠는가?
그러므로 진화론자는 진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진화론이 함축하는 끝없는 무의미함과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비이성적인 자기 신뢰와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처럼 진화론을 떠받들고 있는 근본적인 힘과 권세는 과학 자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진화론이 말하는 본래 내용은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실로 허망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곧 타락한 사람의 마음이 그러한 상황을 뒤집어놓는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사후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장차 사람과 사회가 완전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 전망하는 진화론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귀를 기울일 것 같지 않은 그 ‘허망한 이론’은 타락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갑자기 온 세상을 끝없이 발전하게 할 혁명적인 사실로 둔갑한다.
그들은 진화론이 무너지면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 하나님의 심판뿐이라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자각한다. 그들이 꿈꾸던 지상낙원은 끝없이 불타오르는 지옥으로 변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한 멸망의 공포에서 자신을 지켜줄 만한 지적, 권위적 대안이 진화론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필사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진화론을 열렬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아름다운’ 지상낙원이 실현되는 꿈으로 달래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배척하는 성경에는 그러한 허망함과 부패와 자기모순에서 그들을 건져줄 구원의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진화론처럼 사람의 기원을 우연과 자연 선택이라는 비인격적인 요소에 둠으로써, 사람을 끝없는 공허함과 무의미함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격적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또한, 모든 일은 그분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으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려줘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준다.
한편, 성경은 그런 피조물인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거스르고 거역하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자기를 스스로 파괴하고 허망하게 하는 짓을 저지르면서도, 그런 잘못을 지혜롭고 합리적으로 여기는 어리석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된 사람은 죽음이라는 형벌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사람이 한 모든 생각과 행동을 공정하게 심판하여 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의 길을 알려준다. 성경이 사람의 악한 실상을 드러내며 심판을 경고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비참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자기 신뢰와 모순에서 벗어나, 그들을 지으시고 그들의 죄를 속량하신 주님 안에서 참 평안과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에게 그러한 참 생명의 길을 알려주면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알려준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헛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진화론과 같은 가설(假說)을 따라 바벨탑을 쌓는 길로 나아가 멸망하고 만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며 고집하는 이들에게 갑절의 진노를 쏟으신다.
초인(超人)을 향한 사람의 덧없는 희망은 무참하게 깨지고 짓밟힐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적하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끝없는 진화와 진보를 붙들었던 결과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날, 그들은 절규하며 까무러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요, 창조주며, 구속주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먼지와 같을 뿐이다. 지음받은 질그릇이 어떻게 토기장이와 논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최고로 높임 받고 존중받으셔야 한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을 자극하는 진화론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지 말라. 우연과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은 그들의 종말은 영원한 암흑과 절망이며 고통이기 때문이다.
각주
1 박영철, 「19세기 다윈의 진화론 및 그의 영향」, 백석대학교, 진리논단 (2009년 16호), pp. 519~544.
2 칼 세이건·앤 드루얀,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인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하여 (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A Search for Who We Are)』,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p. 104.
※ 칼 세이건은 불가지론자로서 진화론을 신봉했던 천문학자이다. 그런 그가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생명체를 걸러내는 거대한 체’에 비유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3 알리 라탄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 (Ra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구정은 옮김, 한겨레출판, 2011, p. 97.
4 같은 책, p. 97.
5 힐러리 로즈, 스티븐 로즈,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 (Genes, Cells and Brains)』, 김명진, 김동광 옮김, 바다출판사, 2015, pp. 171, 172.
6 같은 책, p. 172.
7 같은 책, p. 175.
8 알리 라탄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 (Ra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구정은 옮김, 한겨레출판, 2011, p. 106.
9 박경태, 『인종주의』, 책 세상, 2009, pp. 107, 108.
10 김호연, 『우생학, 유전자 정치의 역사』, 아침이슬, 2009, pp. 16~18.
11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The Singularity Is Near: When Humans Transcend Biology)』, 김명남·장시형 옮김, 김영사, 2007, pp. 413~445.
12 R. C. 스프로울·키이스 매티슨, 『창조인가 우연인가 (Not a Chance)』, 김태곤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4,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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