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진화론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과학과 진화론 진단1」 그리스도인은 ‘과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김재호
우리는 ‘과학 만능’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만큼 과학은 우리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크게 끼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학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눈앞의 유익만 바라보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과학을 수용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조차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과학이 신앙의 핵심 영역을 침범하고 파괴해도, 대부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과학이 무엇이며 어떤 토대 위에서 이 세상을 설명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이 신앙과 배치되는 소리를 낼 때, 잘 분별하고 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이 말하는 세상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께서 짓고 다스리시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1. 과학의 토대와 한계
과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것에 기초한 학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사람의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이름으로 더 오랫동안 불렸다.
원래, 과학(science)이라는 단어는 연구를 통해 체계를 세우는 학문이라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특히 3학(trivium: 문법, 논리, 수사) 4과(quardrivium: 천문, 기하, 산술, 음악)라는 일곱 개의 교양과목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1
그러나 궁극적인 권위를 ‘사람의 이성’에 둔 근·현대 시기를 거치면서, 과학이라는 단어에는 점점 전에 없었던 지극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학문이라는 뜻이 생겨나기 시작했다.2 그 결과, 오늘날 사람들에게 과학은 보통 주관의 개입을 배제하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낸 학문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객관적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비이성적인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기가 십상이다. 또한, 과학을 신학의 시녀로 여기는 학문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대번에 ‘사이비 과학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과학은 생각만큼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학문이 못 된다. 과학은 사람의 생각에 기초하므로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사실 규명을 위한 연구 방식과 최종 결과물이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학에 ‘어떻게’와 관련된 부분을 질문하면, 참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런 방식이 의미가 있으며 잘 작동하는지를 물으면,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대답을 듣게 된다.
실제로 뉴턴에게 물체의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물으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우선, ‘운동 3법칙’으로 불리는 운동 현상(관성, 가속도, 작용·반작용)을 보여준 다음, 그 현상을 행성 운동, 조수 간만의 차 등을 ‘계산’하는 데 적용하면서,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작용한다고 설명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왜’ 모든 물체에 수치화하여 계산할 수 있는 인력이 작용하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하는 일은 물체가 그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답할 뿐이다.3
한편, 아인슈타인에게 가서 물체의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물으면 뉴턴과는 사뭇 다른 대답을 듣게 된다. 그는 우선 빛의 속도가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보여줄 것이다. 그런 다음 기존에 사용하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 대신,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상대화한 시공간의 개념을 제시하며, 모든 운동을 중력장에 의해 시공간이 구부러진 정도에 맞춰 설명해줄 것이다.4
그러나 그에게 ‘왜’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상태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며, 중력장을 실측 가능한 연속적인 값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물으면 그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단지 이론의 완전성과 실제 세계와의 관계를 논하며, 과학자가 어떻게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설명하려고 해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5
이처럼 과학적 사실은 자기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세계관이 뒤에서 떠받쳐주는 힘에 의지하여 서 있다. 그 세계관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합리적인지에 따라 과학적 사실의 확실성과 설명 능력이 결정된다. 실제로 뉴턴이 말하는 과학적 사실은 모두 자연이 수학책과 같다는 ‘수학적 자연관’에 기초해 있다. 즉, 뉴턴에게 자연이란 근본적으로 존재적 특성과 상태 변화를 측정하여 양적인 개념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뉴턴의 관점은 후대의 과학자들에게 이어져, 과학과 수학은 점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자리매김했다.6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수학을 경시했지만, 훗날에는 수학의 가치와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양자 역학을 무너뜨릴 목표로, 모든 힘의 작용을 온전히 통합하여 실재(實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학 공식을 발견해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7
그러므로 누군가 만약 자연이 수학적인 ‘방식’으로 기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기라도 한다면, 근·현대 과학은 그동안 설명한 모든 ‘과학적 사실’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여 다시 설명해야 하는 지극히 당혹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을 수학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을 따라 ‘주관적으로’ 도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수학적 자연관을 주관적으로 도입했고 후학(後學)들도 그의 연구 방식을 주관적으로 인정하고 따른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 주관에 맞는 세계관을 따라 자연 현상을 탐구하고 설명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세계관을 선택할 때가 아니라 선택한 다음에 발생한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했던 것보다 더 폭넓게 자연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할 책임이 주어진다.
다시 말해, 어떤 세계관으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할지를 선택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자연 현상을 가장 합리적으로 풀어내고 설명해야 할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 과학계에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주류를 이루며, 다른 자연관을 따르는 이들은 소규모 게릴라 전을 벌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과학의 이러한 속성은 과학이 사람의 생각에 기초하는 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실이 완전히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는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환상에 이제 그만 휘둘리도록 하자. 현대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과학적인 사실은 연구자의 주관적인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는, 지극히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며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세계관과 종교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갖게 되는 데에는 교육, 시대 흐름, 기질, 정치 상황, 민족적 특성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요인 중에 가장 압도적인 것이 바로 종교이다. 어떤 사람의 종교적 태도와 신념이 정말로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어떤 교육을 받았고, 시대 흐름은 어떠하며, 타고난 기질이 무엇이고, 정치 상황 및 역사적 배경이 어떠한가와 같은 요인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한 요인은 종교의 강력한 영향력에 순응하는 가운데 세부적인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삶을 살던 청년이 이슬람교에 귀의한 뒤, 갑자기 성전(聖戰)을 치르겠다면서 머나먼 타향 길에 오르더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와 국민을 향해 거칠게 총부리를 들이미는 일은 종교가 세계관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좌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계관은 자리를 잡는다.
앞서 말한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형성과 확립에도 종교적인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뉴턴이 이 세상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며, 수학을 통해 그 질서의 의미를 발견하고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즉, 그는 이 세상에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것과 그 법칙을 일정한 수식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근거를 신의 존재와 속성에 두었던 것이다. 뉴턴은 그 일을 통해 자연계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고 확립하는 일에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8
그렇게 그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자연을 계량화한 뒤 거기서 나타나는 일정한 특징의 의미를 수학의 원리에 따라 이해하고 입증하는 법을 확립함으로써, 근·현대 과학이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확립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아인슈타인이 종교에 대해 내놓은 적대적인 발언만 놓고서 그를 철저한 무신론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인슈타인이 아주 단호하게 배격하는 ‘종교’는 우리에게 친숙한 모든 제도권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제도권 종교를 단호하게 배격한 반면, 세상의 합리성과 사람이 그러한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초월적인 근원’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무한히 우월한 영’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그러한 ‘미지의’ 존재를 향한 믿음과 경외심을 아주 강력하게 표현하곤 했다.9 이들뿐만 아니라, 근·현대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의 신학에 근거하여 특정한 연구 방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자신의 세계관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10
물론, 이들 과학자가 말하는 신(神) 개념은 대부분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현상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精髓)를 담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씨앗’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11
즉,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든지 모르든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종교심과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 감지한다. 앞서 말한 과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합리적이며 일정한 계획에 의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분이신가를 ‘본성적으로’ 자각하고, 그 사실을 종교적인 힘으로 굳게 붙든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곧바로 그 종교의 씨앗이 죄로 부패하여 본래 목적을 이루는 데 얼마나 쓸모없어졌는지를 말한다.12 즉, 죄성이 종교의 씨앗이 온전하게 결실하는 일을 막고 방해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데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현대 과학을 지탱하는 수학적 자연관에는 자연의 전체 의미와 관계 중에서 수치화할 수 없는 질적(質的)인 부분은 배제한 채로 법칙을 발견하고 설명한다는 맹점과 사각지대가 있다.13
그래서 훗날 핵폭탄이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과연 세상이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표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즉, 근·현대 과학이 무엇이 가능한지만 늘어놓았을 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다스려야 하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굳게 믿은 그 신은 이 세상을 ‘온전하게’ 설명해줄 수 없는 절름발이요, 애꾸눈인 어리석은 우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죄의 영향이 없었다면, 그들 안에 있는 종교의 씨앗은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래에서부터 위’로 향하거나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에 이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성경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깨닫고, 모두가 그분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롬 10:6~8).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그런 사실을 자기 힘으로 깨닫지 못한다. 모두 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왜’ 그러한지를 아예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기에는 많이 미흡한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부족함과 맹점으로 가득한 불완전한 연구 결과를 세상에 계속 내놓게 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종교의 씨앗이 죄로 인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는 죄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다. 복음을 믿는 이들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죄의 대가, 은혜의 영광스러움이 깊이 새겨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인격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성경 말씀을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이들은 자연 만물 안에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들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우주를 보며 세상 사람들처럼 적막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보고 즐거워하게 된다(롬 1:19, 20).
또한 우주 공간 안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만들고 정교하게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심과 조화로우심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며 그분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시 8:3). 그리고 이글거리며 불타는 태양을 바라보며, 악을 소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열의를 엿보고 매사에 진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된다(벧후 3:10~13).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연 만물에서 ‘어떻게’와 관련 있는 부분뿐만 아니라, ‘왜’ 그러한지도 성경 말씀을 통해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온전한 자연관을 소유하게 된다. 세속 과학자들은 ‘왜’ 그런지를 알아내려고 자기 생각을 억지로 쥐어짜다가 결국 자기가 원하는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게 되지만(롬 1:21~23),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왜’ 그러한지를 기록된 말씀을 따라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불타는 태양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는 것은 이방 종교인들처럼 주관적인 ‘모종의 영감’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있을 ‘불의 심판’을 그 내용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친다(마 3:12; 벧후 3:5~7). 그런데 이 불의 심판에서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사실은, 그 불이 나타나는 방식이 우리가 오늘날 ‘원자력’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이용해 불이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벧후 3:10, 12).
즉, 장차 임할 심판의 불과 같은 종류의 불이 오늘도 우리 머리 위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수소폭탄이 폭발한 자리에는 모든 것이 증발하여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태양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열의가 세상의 악을 완전히 소멸하고 이 세상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태양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죄로 어두워진 사람은 기록된 말씀의 도움 없이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깨달을 수 없다(시 19:1~6).
그러나 들을 귀를 가진 이들은 말씀 안에서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정말로 이해한 이들은 절대로 원자력 에너지를 섣불리 다루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그분께서 햇빛을 통해 온 세상 만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사용하려고 하면서 매사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가는 종말의 날에나 볼 법한 대재앙이 수많은 인생을 한순간에 불살라버릴 것이며, 그것이 당신의 공의를 무시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관은 종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데, 모든 면에서 온전히 합리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다른 자연 종교의 세계관은 모두 다 죄의 영향으로 인해 자기 중심성이 세계관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틈으로 온갖 비합리성이 드나들며 세계관 전체를 오류로 채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세상을 정말 온전히 합리적으로 기술하려면, 그는 과학 탐구 방법을 익히기에 앞서 우선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건짐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에 관해 논하고, 장님이 코끼리의 모양새를 설명하는 어리석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광과 합리적인 과학 활동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진정으로 합리적인 과학 활동을 하려면 학문적 토대를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둬야 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사용하는 연구 방법이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비평하기 위한 건전한 신학적 토대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만약 어떤 연구 방법이 자연계를 정말 폭넓고 그럴듯하게 그려내더라도,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면 해당 연구 방법과 그것에 기초한 과학적 사실은 모두 원점에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 반대로 어떤 연구 방법이 아직은 자연계를 폭넓게 설명하지 못하고 이론적 완성도도 떨어진다고 해도, 신학적인 근거가 분명하다면 해당 연구 방법과 그것에 기초한 과학적 사실은 끝까지 고수되어야 한다.
물론, 자연주의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소리가 매우 불쾌하게 들릴 것이다. 그들은 이 말이 과학을 억지로 성경에 꿰맞추려는 폭압이며, 어둠 가득한 중세 시대로 회귀하자는 것이라며 거칠게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한 말은 현대 과학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소리이다. 단지 연구 방법을 비평하는 기준이 신학이 아닌,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는 부분만 다를 뿐이다.
뉴턴은 이 세상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그려냈고,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설명을 상대적인 방식으로 다시 기술했으며, 닐스 보어가 아인슈타인의 설명을 확률적 형태로 재진술하는 가운데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 절대 시간과 공간, 물리적 실재의 확실성이라는 의미를 원점에서부터 재고하고 다시 구축했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의 과학도 신학에 근거해 과학의 온갖 개념과 설명을 재고하고 비평하며 확립하는 똑같은 과학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연주의 과학에 충실한 이들은 하나님 중심의 과학을 추구하는 이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배척하고 경멸하는, 아주 불합리하고 교만하며 비과학적이고 폭압적인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근본적인 근거와 동기는 하나님의 손에서 완전히 독립하려고 하는 자기완성의 타락한 종교심에서 나오지, 과학 그 자체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과학을 추구하는 이들은 저들의 부당한 비난과 조소와 경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 모든 소리들은 누워서 하늘을 향해 뱉는 침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중심의 과학을 추구하는 이들은 성경이 과학의 언어로 기술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경이 해가 뜨고 진다고 할 때, 그 말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24시간마다 한 바퀴씩 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한 일상 어휘이므로, 그 말에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올바른 자연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려고 할 때는 성경이 말하는 문맥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은 내용을 과학 탐구의 토대로 삼고, 오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실수는 하나님 중심의 과학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비방거리를 제공해주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중심의 과학이 활동할 기초 토대로 삼기 가장 적합한 것은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구속 사역이다. 이 구속 사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상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자연 연구의 토대로 삼을 수 있는 기초 명제가 들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초 명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언약을 연구하면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마구잡이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느닷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아담에게 약속해주셨던 대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자연 연구에 필요한 기초 명제는 근본적으로 언약 신학에서 확고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자연 현상을 일정한 형태로 기술한 뒤, 실제 실험을 통해 ‘자연법칙’으로 확립하는 실험 과학의 연구 방식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창 8:21, 22). 그 언약 안에는 자연 현상의 ‘일정성과 반복성’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연 현상을 일정한 형태로 기술한 뒤 실제 실험을 통해 기술한 내용과 같은 결괏값을 얻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같은 값을 얻을 것이라는 결론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결론이 ‘대홍수 이전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노아 언약은 대홍수 이후에서부터 주님의 재림 때까지를 적용 범위로 갖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자연법칙이 대홍수 이전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 어떠한가를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뉴턴의 표현에 의하면 ‘만유인력’이고 아인슈타인의 표현대로 하면 ‘중력장’인 힘의 법칙은 아담 언약이나 노아 언약이나 똑같이 지지하는 자연법칙이다(창 1:14; 8:22). 그러므로 힘의 성질을 근거로 전개하는 과학 이론은 언제 어떻게 적용해도 현실 세계에 상당히 정확하게 적용되는 편이다.
그러나 지구의 기후나 지형과 관련된 부분은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이 각각 기술하는 내용이 정말 판이하다(창 2:5, 6; 7:11, 12).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자연법칙은 오직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부분에서만 현실과 맞아떨어지게 된다.
이처럼 실험 과학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별 무리 없이 하나님 중심의 과학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잘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실험과학의 영역에서 둘은 심각할 정도로 충돌한다. 왜냐하면 실험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분야의 과학은 근본적으로 어떤 현상의 ‘일정함’까지는 진술할 수 있어도, 그것이 ‘반복 가능’하다는 부분을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런 분야의 과학은 그럴듯한 설명만 계속 제시할 뿐, 그 설명이 실제 세계의 현재, 과거, 미래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학자가 그냥 자신의 설명을 현실 세계와 ‘임의로 끼워 맞춰’가다 보면, 결국에는 구속 언약의 핵심 개념과 충돌하는 큰 사고를 불러오게 된다.
비실험과학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진화론만 살펴봐도 이런 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진화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실험이 불가능하다. 진화론은 자신이 ‘자연법칙’임을 입증하기 위한 그 어떤 실험적 실측치를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생물의 다양성을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자연 선택의 원리에 따라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부분만 계속 보여준다.
진화론자들 말대로, 뛰어난 연관성과 경제성을 지닌 진화론은 위대한 가설(假說)로서의 면모는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이 세상을 온전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과 맞물리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비과학적이며 눈 가리고 아웅하는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진화론이라는 거대한 비실험과학 이론을 지탱하는 궁극적인 요인은 놀랍게도 우연과 오랜 시간이다. 진화론자들은 그 화려한 가설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 위해 ‘우연이 쌓이고 또 쌓이면 대단한 지적 생물체가 툭 튀어나오게 된다.’라는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고 합리적 근거도 없으며, 거의 종교적 신념이라고 할 만한 진술을 계속 되풀이한다.
더구나 그들의 설명은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언약에 근거해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진화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지어지고 다스려지는 곳이 아니라, 왜 존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맹목적이고 무의미하며 허망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실제로 맺으신 영원한 언약은 사람의 상상력이 빚어낸 소설이 되며, 예수님께서는 역사적 실재와는 거리가 먼 설화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다.
유신(有神) 진화론이라고 해서 이런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신 진화론은 명목상 세상을 지으신 분을 하나님으로 설정한 다음, 실제 창조 과정은 진화의 힘에 맡겨버리기 때문에 진화론과 별 차이가 없다.14 즉, 진화론이나 유신 진화론이나 성경이 증거하는 구속 언약의 역사적 실재성을 무너뜨려, 결국 예수님을 정신이상자가 되게 하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 비실험과학의 ‘임의 적용성’은 실제 세상과 맞닿는 합리적인 접점을 파괴하여, 학문 활동이 그들만의 공상과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는 죄악으로 귀결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비실험과학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제 세상과의 올바른 접점을 제공하는 구속 언약의 기초 명제를 꼭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그 기초 명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온갖 현상들을 폭넓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순서가 뒤집히거나 기초 명제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가면, 제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결국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비실험과학을 다루는 이들은 19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성경 비평학이 실재하는 요한복음 사본 한 조각 때문에 정신 나간 헛소리 신세가 된 것을 명심하고, 성경의 역사성에 절대로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겸손하게 자기 분야를 탐구하고 연구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면 자연 만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분을 높이는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4. 마무리하며
과학은 절대로 자기 능력과 힘으로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과학의 힘은 세계관에서 나오고, 세계관의 힘은 종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 활동을 정말 합리적으로 하려면, 합리성의 근원을 가장 타당하게 알려주는 종교인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언약에 근거해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런 합리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은 과학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현대 비실험과학의 신성모독적인 거짓말을 진리로 무너뜨리는 일에 지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안목이 없는 사람은 과학의 노예가 되어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망령된 일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각주
1 퍼트리샤 파라,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 (A four Thousand Year History)』, 김학영 옮김, 21세기북스, 2010, pp. 126, 127, 312.
cf. 이 책은 기본적으로 다원주의 이념에 기초해 쓰인 책으로서, 다분히 기존에 평가 절하되던 부분을 높이 평가하고 높이 평가하던 부분은 깎아내리려는 특징을 보이는 가운데 진보적 가치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 특성에 주의하면서 기존의 과학사가 잘 알려주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참고하는 용도로 사용하면 나름의 유익이 있다.
또한 현대 과학은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만큼, 과학 관련 책에는 반(反)기독교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과학 서적을 볼 때는 항상 잘못된 서술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2 같은 책, pp. 348~354.
3 김성근, 『교양으로 읽는 서양 과학사』, 안티쿠스, 2009, pp. 171~174.
4 곽영직, 「특수 상대성 이론」, 네이버캐스트, 2009.03.27.
곽영직, 「일반 상대성 이론」, 네이버캐스트, 2009.04.10.
5 이상욱 외 3명, 『과학으로 생각한다.』, 동아시아, 2007, pp. 53, 54.
곽영직, 「EPR 패러독스」, 네이버캐스트, 2010.02.19.
6 이상욱 외 3명, 『과학으로 생각한다.』, 동아시아, 2007, pp. 18~23.
곽영직, 「양자 세계의 해석」, 네이버캐스트, 2010.01.18.
7 곽영직, 「일반 상대성 이론」, 네이버캐스트, 2009.04.10.
박준수, 『과학기술 발전의 발자취』, 자유아카데미, 2009, 네이버 지식백과
8 편집주 엮음, 『종교학 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지식백과
9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There is A God)』, 홍종락 옮김, 청림출판, 2011, pp. 109~113.
10 같은 책, pp. 113~121.
11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 (Institution of Christian Religion)』,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15, p. 119.
12 같은 책, p. 125.
13 이상욱 외 3명, 『과학으로 생각한다.』, 동아시아, 2007, pp. 20, 21.
14 임번삼, 「<리뷰> 기독교계로 침투한 유신진화론 1: 유신론적 진화론의 주장과 문제점들」, 한국창조과학회.
「과학과 진화론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과학과 진화론 진단1」 그리스도인은 ‘과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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